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황제의 유물에 얽힌 비밀 《황사매책시문첩》
 《황사매책시문첩》은 조선 중기 문장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집안에 있던 책 한 권과 매화 한 그루에 대한 기록이다. 이 물건들은 이정귀가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웅화熊化로부터 받았다고 전해졌으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뒤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 《황사매책시문첩》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예상 밖의 비밀과 의문이 숨겨져 있었다. 

 

 《황사매책시문첩》은 조선 중기 문장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집안에 있던 책 한 권과 매화 한 그루에 대한 기록이다. 이 물건들은 이정귀가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웅화熊化로부터 받았다고 전해졌으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뒤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 《황사매책시문첩》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예상 밖의 비밀과 의문이 숨겨져 있었다. 

 

  

그림 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희귀본 《황사매책시문첩》 한貴古朝43-가52



소중한 유물에 담긴 사연을 기록하다
 

 이정귀는 글솜씨가 뛰어나고 중국어도 능통해 명나라와의 외교 업무를 전담했다. 네 차례나 사신으로 다녀왔고,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면 영접을 도맡았다. 
선조 임금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609년, 명나라에서 조문을 위해 파견한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웅화熊化라는 인물이었다. 이정귀는 웅화를 극진히 대접했다. 웅화 역시 이정귀의 인품과 문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웅화가 귀국한 뒤에도 두 사람은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1616년, 이정귀는 광해군의 모친 공성왕후의 부고를 전하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웅화와 해후했다. 7년 만의 만남이었다. 마침 생일을 맞이한 웅화는 이정귀를 집으로 초대했다. 이정귀는 그곳에서 진귀한 물건을 보았다.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도장이 찍혀 있는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이하 《속강목》)과 서호西湖산 매화 화분이었다. 웅화가 대궐에서 숙직하다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물건이었다. 두 사람은 이 물건들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결과 는 이정귀의 승리였다. 이정귀는 책과 꽃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 왔다. 
 1635년 이정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난리 통에 책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매화는 제자 민효건閔孝騫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작별 선물로 주었기에 병화를 피했다. 하지 만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런 물건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1681년 이정귀의 증손 이흥조李興朝가 의원을 찾으러 약방에 갔다 가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약값 대신인지 책 한 권을 약국에 팔려고 했다. 신종 황제의 도장이 찍혀 있는 《속강목》이었다. 그 아래 장서인藏書印은 먹칠에 덮여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이정귀의 장서인이 분명했다. 이흥조는 거금을 주고 그 책을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황제의 하사품은 반 세기 만에 이정귀 집안으로 돌아왔다. 매화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쳤으나 역시 무사했다. 그로부터 다시 반 세기가 지난 1736년, 이정귀의 현손玄孫 4대손 이우신李雨臣이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고 유명 문인들에게 시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문을 엮은 책이 《황사매책시문첩》이다. 


 

그림 2. 《황사매책시문첩》 첫머리에 실린 이우신의 발문


 

신종 황제의 하사품에 담긴 의미
 

  《황사매책시문첩》 첫머리에는 이우신의 글이 실려 있다. 이정귀가 신종 황제의 하사품을 얻은 경위와 후손이 이를 되찾은 경위를 밝힌 글이다. 앞에 소개한 이야기는 이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어서 안중관安重觀, 이영보李英輔, 남한기南漢紀, 조귀명趙龜命, 이병연李秉淵, 이구완李九畹, 조유수趙裕壽, 김시민金時敏, 이숭진李嵩鎭의 시문이 실려 있다. 모두 당대에 시문으로 이름 높았던 쟁쟁한 문인들이다. 이 가운데 이영보는 이정귀의 5대손, 이 병연과 김시민은 외현손外玄孫이다. 소론계 문인도 일부 섞여 있으나, 대부분은 ‘노론계 처사형 문인’에 속한다. 
  노론계 처사형 문인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은거를 택한 일군의 문인들을 말한다.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던 이들은 관직에 진출하는 대신,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학문과 문학에 몰두했다. 이들은 오랑캐 청나라가 천하를 지배 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이것이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으므로, 조선은 명나라에 의리를 지켜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 파병을 결정한 황제가 다름 아닌 신종이다. 임진왜란의 승리가 신종 황제 덕택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말로 감사를 표했다.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라는 뜻이다. 이처럼 추앙받는 신종 황제의 유물이 명나라가 멸망한 지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났으니, 노론계 처사형 문인들이 열광한 것도 당연하다.   
  신종 황제가 하사한 책과 꽃이 하필 《속강목》과 매화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속강목》은 주자朱子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의 속편이다. 《자치통감강목》은 이민족 왕조를 배제하고 한 족 왕조에게 정통을 부여하는 주자의 정통론正統論에 입각한 역사책이다. 당시 노론계 처사형 문인들은 이러한 주자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를 숭상했다. 따라서 신종 황제가 하사한 《속강목》은 대명의리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정귀가 가져온 매화는 신종 황제의 연호年號를 따서 만력매萬曆梅라고도 하고, 이정귀의 호를 따서 월사매月沙梅라고도 했다. 매 화도 노론계 처사형 문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꽃이었다. 매화는 예로부터 고결한 은자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노론계 처사형 문인들은 매화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곤 했다. 매화는 그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둘러싼 몇 가지 의문
 

  노론계 문인들은 신종 황제의 유물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했다. 하지만 의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이다. 조영석은 ‘이 판결사 집에 보관된 속강목의 발문李判决家藏續綱目跋’이라는 글에서 유물의 의문점을 낱낱이 지적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정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정귀와 웅화의 만남은 한 차례 뿐이었다. 당시 조선 사신은 객관에 갇혀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따라서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황제의 하사품을 걸고 내기 바둑 따위를 둘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또 이정귀의 문인 최유해崔有海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선물은 따로 있다. 이정귀는 패도佩刀를 주고, 웅화는 답례로 회소懷素가 쓴 《천자문》 한 권과 소식蘇軾의 글씨 한 폭을 증정했다. 《속강목》과 매화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황제가 하사한 책과 꽃은 귀중한 물건이다. 만약 주고받은 사실이 있었다면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조영석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유물은 가짜다”였음이 분명하다. 
  조영석의 글은 《황사매책시문첩》에 실려 있지 않고,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조영석은 이우신의 부탁을 받고 이 글을 썼다. 이우신은 어째서 기껏 글을 부탁해 놓고 이 책에 넣지 않았을까? 유물의 진위를 의심하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조영석의 의문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이정귀와 웅화가 주고받은 글은 모두 《월사집》에 실려 있다.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거나, 선물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신종 황제의 유물이라는 책과 꽃은 가짜이며,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이정귀가 세상을 떠난 뒤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까?  


 

  그림 3. 이병연이 쓴 시문 ‘월사선생댁 황조안보서책가’

 

거대한 사기극의 이유는 무엇인가
 

  《황사매책시문첩》이 편찬된 1736년은 노론이 신임사화로 입은 타격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소론과 정국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이다. 노론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명분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치는 명분 싸움이다. 명분을 얻으면 이기고, 잃으면 진다. 노론이 선택한 명분은 대명의리론이었다. 대명의리론은 송시열宋時烈 이래 노론의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념이었다. 
  대명의리론을 주장한 노론계 문인들은 명나라 황제를 십분 활용했다. 그 시초는 송시열이다. 1674년, 송시열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종毅宗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얻어 자신의 본거지 화양동華陽洞 바위에 새겼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노론은 이 곳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신종 황제와 의종 황제를 제사지내는 장소로 삼았다. 의종 어필이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자, 이후 명나라 황제의 유물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에서 발견된 명나라 황제의 유물은 모두 출처가 불분명하며, 진위도 확실하지 않다. 유물을 입수한 사람이 대부분 노론계 문인이라는 점도 의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이 유물들이 하나같이 대명의리론을 재점화하여 노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황사매책시문첩》 역시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책에 시문을 남긴 이들이 유물의 진위를 정말로 몰랐는지, 아니면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모르는 척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종 황제의 유물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황사매책시문첩》은 조선후기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대명 의리론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집필자

글.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일일공부》, 번역서로 《현고기》, 《동국세시기》등이 있다.


관련콘텐츠


皇賜梅冊詩文帖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