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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난 윤봉길(尹奉吉)은 고향에서 월진회를 조직해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0년 만주(滿洲)를 거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임시정부에서 김구(金九)를 만나 함께 거사의 기회를 기다렸다. 
  윤봉길이 상하이에 도착한 다음해인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공하고 곧이어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하였다. 만주국 수립에 대한 중국 내 여론을 의식한 일본이 중국인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고자 1월 28일 연이어 상하이 침공을 단행하였다. 이때 상하이에는 중국에서 가장 뛰어나기로 소문난 중국군 제19로군 등 3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상하이는 곧 일본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상하이 점령에 성공한 일본은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침공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식을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의거 이후 또 다른 기회를 찾고 있던 김구는 ‘기념식에 참석할 사람은 도시락 한 개, 물통 한 개, 일장기 한 개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상하이마이니치신분(上海日日新聞)의 4월 20일자 기사를 보고 이 사실을 윤봉길에게 알렸다. 윤봉길은 자신이 거사를 거행할 뜻을 밝히고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김구는 왕웅(王雄)으로 활동하던 김홍일(金弘壹) 장군에게 부탁해 상하이 병공창의 송스마(宋式馬)에게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부탁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봉길은 무사히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기념식이 거행된 후 윤봉길은 기회를 엿보던 중 물통을 식장 정면을 향하여 던졌고, 이로 인해 상하이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 거류민단장 겸 행정 위원장 카와바타(河端貞次)가 죽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과 주중 공사 시게미쓰(重光葵),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거 소식은 즉각 중국 각지에서 보도되었고, 중국인들은 이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침체되어 있던 주중 한국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일본은 현상금을 걸고 김구·김동우·김석·김철·백기준·송진균·엄항섭·이춘산·조소앙·조완구·최석순 등 임시정부 요인들 체포에 나섰고, 실제 이 과정에서 안창호 등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거를 자신이 지시했다고 인정한 김구와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이에 우선 김구와 김철이 외국인기독교청년회(YMCA) 주사 미국인 피치와 교섭해 김철과 김구·안공근·엄항섭까지 4명이 함께 피치 집 2층에서 20여 일을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림 1. 대한민국임시정부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일본의 추적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무를 수 없자 임시정부 측은 항저우(杭州)로의 이전을 결정하고, 항저우 청태제이여사(淸泰第二旅社) 32호에 임시판공처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5월 15·16일 제1회 국무위원회의가 개최하였다. 김구·김철·이동녕·조소앙·조완구 등 5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김철은 군무부장에서 재무부장으로, 김구는 재무부장에서 군무부장으로 직책을 변경하였다. 이곳에서 다섯 달 정도 활동을 이어가던 임시정부는 1932년 11월 서호(西湖) 근처 호변촌(湖邊村) 23호에 두 번째 청사를 마련한 뒤 1934년 11월까지 생활하였다. 이 시기 소위 항저우 사건으로 김구와 이동녕이 자싱(嘉興)으로 떠나면서 한때 임시정부가 위태로워지기도 하였으나 항저우에서의 생활은 3년 반 만이나 유지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다시 임시정부판공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일본과의 전면전쟁을 선포하였다. 전쟁 초반 중국의 전세가 계속 악화되면서 전장은 물론 난징(南京) 또한 함락되었다. 11월 19일 결국, 자싱 방어선이 무너지며 자싱과 쑤저우(蘇州) 등 항저우 만의 도시들이 일본에 함락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는 이날 난징을 포기하고 쓰촨성 충칭(四川省 重慶)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1934년 1월 25일 장수성 전장(江蘇省 鎭江)으로 옮겨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도 중국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들과 함께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목선을 이용해 후난성 창사(湖南省 長沙)로 출발하였다. 난징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창사로 이동해 이곳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했다. 전세가 계속 악화됨에 따라 창사에서 8개월여를 지낸 임시정부는 1938년 7월 19일 광둥성 광저우(廣東省 廣州)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고, 7월 22일 광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저우 도착 직후 동산백원(東山柏園)에 거처를 마련했다가 중국군이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일본군을 피해 광저우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불산진(佛山鎭)에 자리를 잡았다. 
  10월 일본군이 곧 광저우에도 침입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임시정부는 광저우에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피난길을 떠나 광시성 류저우(廣西省 柳州:1938년), 쓰촨성 치장(四川省 綦江: 1939년)을 거쳐 마침내 1940년 11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먼저 충칭에 도착해 화평로(和平路)에 청사를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오랜 이동 생활을 끝내고 새로이 충칭에 정착해 이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참고문헌

양우조·최선화 지음/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혜움, 1998
한상도, 『한국독립운동의역사24(대한민국임시정부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한시준, 『한국독립운동의역사24(대한민국임시정부Ⅲ)』,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권성욱 지음, 『중일전쟁』, 미지북스, 2015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편,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사적 성격』,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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