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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병일기(乙丙日記) 조선이 기록한 조일수호조규의 체결 과정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일본 특명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간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수호조규(속칭 강화도 조약)가 체결됐다. 조일수호조규는 우리 근대사의 기점으로 언급될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막대했음에도, 기존 연구는 주로 구로다가 집필한 《사선시말(使鮮始末)》이나 《사선일기(使鮮日記)》와 같은 사료에 기초해서 이뤄져 왔기 때문에 실제 협상 과정은 물론, 당시 조선 측의 인식이나 대응 방식에 관해 적지 않은 오해나 왜곡이 생겼다.

1876227,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일본 특명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간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수호조규(속칭 강화도 조약)가 체결됐다. 조일수호조규는 우리 근대사의 기점으로 언급될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막대했음에도, 기존 연구는 주로 구로다가 집필한 사선시말(使鮮始末)이나 사선일기(使鮮日記)와 같은 사료에 기초해서 이뤄져 왔기 때문에 실제 협상 과정은 물론, 당시 조선 측의 인식이나 대응 방식에 관해 적지 않은 오해나 왜곡이 생겼다.




 
그림 1. 《을병일기》 古2159-1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쇼, 강화도 협상

 

조일수호조규는 일반적으로 일본이 서양 열강의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방식을 모방해서 조선에 강제한 불평등조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몰락한 무사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고, 군대 및 재야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책동을 미연에 방지하며, 동아시아에서 진보의 대변자로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쇼(Show)에 가까웠다. 마치 1853년 미국의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일본을 무력으로 개국시킨 것처럼 일본 또한 조선을 개국시켰다는 이미지는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왜곡된 이미지를 교정하고 조약 체결 과정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당시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을 발굴해서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강화도 협상에 관한 조선 측의 중요한 기록으로는 신헌(申櫶, 18101884)심행일기(沁行日記)와 추금(秋琴) 강위(姜瑋, 1820~1884)가 남긴 심행잡기(沁行雜記)가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할 을병일기(乙丙日記)또한 조일수호조규의 체결 과정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 문헌이다.

을병일기란 을해년(乙亥年, 1875)과 병자년(丙子年, 1876)의 일기라는 뜻으로, 강화도 협상 당시의 문정(問情), 협상, 장계, 상소, 회의록, 외교 문서 등 중요한 관련 문서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문헌이다. 특히 심행일기와 더불어 조일수호조규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일급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함선이 강화도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128일에 일본 함선의 무력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각 도()의 포수를 징발할 것을 명하는데, 이에 따라 131일부터 224일까지 2,200여 명의 지방 포수들과 감병영의 장졸들이 서울로 집결하여 총융청, 무위소, 어영청, 훈련도감, 금위영 등에 배속됐다. 필자의 관견에 따르면, 군사적 대비에 관한 이러한 기사는 오직 을병일기에만 수록되어 있다.

 

학계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까닭은
 

을병일기는 을해년 1219(양력 1876115) 강화도로 향하는 도중에 부산항에 기항한 일본 사절 선단에 대한 문정 기록에서 시작해서, 병자년 29(양력 34) 계엄이 해제된 후 고종이 광화문에 친림(親臨)하여 포군들을 위문하고 호궤(犒饋)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을병일기는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 권

 

ㆍ부산에 기항한 일본 사절 선단에 관한 각종 문정(問情)(1219~22일조)

ㆍ남양부사 강윤(姜潤)의 문정(12, 4일조)

ㆍ최병대(崔柄大)의 상소(13일조)

ㆍ강화부 판관(判官) 박제근(朴齊近)의 문정(14일조)

ㆍ훈도(訓導) 오경석(吳慶錫)과 현석운(玄昔運)의 문정(15, 6, 10일조)

ㆍ교동부사(喬桐府使) 임흥준(任興準)의 문정(17일조)

ㆍ인천부사 윤협(尹𣇍)의 문정(18일조)

ㆍ모리야마 시게루와 접견부관 윤자승(尹滋承)의 예비 회담(112일조)

ㆍ강화유수 조병식의 상소(114, 16일조)

ㆍ일본 전권의 강화부 입성(116일조)

ㆍ조일 양국 대표의 공식회담(117, 19, 20일조)

ㆍ일본 측이 제시한 조일수호조규 원안(119일조)

ㆍ장호근(張皓根)의 상소와 최익현(崔益鉉)의 상소(123일조)

ㆍ일본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해명하는 의정부 조회문(125일조)



 

 

하 권

 

ㆍ오상현(吳尙鉉)의 상소(128일조)

ㆍ신헌의 상소(128일조)

ㆍ윤치현(尹致賢)의 상소(130일조)

ㆍ일본 측 조규 원안에 대한 의정부 대안(對案) 6개조의 추가 요구(128일조)

ㆍ의정부 수정 조회문

ㆍ조선국왕 비준서

ㆍ조일수호조규 조약문(128일조)

ㆍ조일수호조규의 체결(23일조)

ㆍ일본 사절단이 선물한 물품 목록(24일조)

ㆍ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대신들의 입시(入侍)(25일조)

ㆍ신헌과 윤자승의 복명(復命)(26일조)

 

그런데 을병일기는 아직까지 학계에 제대로 소개된 바가 없으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조일수호조규 연구에 인용된 사례도 없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본(底本)이 되는 국립중앙도서관본 을병일기가 원본이 아닌 필사본인 데다가 표지, 서문(序文), 발문(跋文) 등이 누락된 잔결본(殘缺本)인 까닭에 그 편찬 동기나 시기, 편찬자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을병일기편찬자로 추정되는 이최응
 

을병일기의 편찬자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강화도 협상 당시 영의정이었던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1815~1882)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직후인 25일조(양력 229) 소견(召見) 기록을 보면,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그의 이름만 기휘(忌諱)해서 OO’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최응은 전()우의정 박규수(朴珪壽), 이조판서 민규호(閔奎鎬)와 함께 조정 내에서 주화론(主和論)을 주도하고 조약 협상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이최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셋째 형이자 고종의 큰아버지로, 강경한 배외정책(排外政策)을 고집했던 흥선대원군과 달리 고종의 뜻을 받들어 개국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이재긍(李載兢) 또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 인사들과 어울리다가 1881년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최응의 입장은 1875510(양력 69) 일본 외무경과 외무대승(外務大丞)의 서계(書契) 접수 및 외무성 파견원의 연향의절(宴享儀節)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일본의 서계를 접수하고 일본 사절에 연향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분위기에선 매우 급진적인 견해였다.



 

일본의 서계가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외무성에서 보내온 것은 300년간 없었던 일이니 접수할 수 없고, 교린(交隣) 문자가 겸손하지 않고 호칭 간에 무분별하게 스스로 존대(尊大)했으니 접수할 수 없고, 특별히 연향을 베푼 것이 유원(柔遠)의 덕의(德意)에서 나왔는데 여러 의절(儀節)을 갑자기 변경했으니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 나라는 이미 대마도를 폐지하고 관제(官制)를 변경해서 정령(政令)을 일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교린하는 처지에 통호(通好)하려는 뜻이었는데, 8년 동안 서로 끊임없이 다투었습니다. 이제 대마도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바로 저 나라에서 보낸 것이요, 저 나라의 신하들이 자기 군주를 스스로 높이는 말이니, 이웃 나라가 억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들은 저들이 이미 대략 고쳐 왔습니다. 고쳐오라고 한 후에 또 이처럼 수십 일을 대치하는 것은 성신(誠信)의 도리가 아니니, 이웃 나라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말썽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일성록(日省錄)고종(高宗) 12510(十二年五月十日)
 

 

이최응의 이러한 언행은 유생들에게는 주견 없이 권력에 아부하는 것으로 비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흥인군 최응은 그 아우 대원군과 평소에 불화했는데, 민승호가 그를 추천해서 영의정을 만들어 대원군과 대적하게 했다. 그리고 아뢰어야 하는데 난처한 것들은 모두 이최응을 시켜서 어전에 아뢰게 했다. 이최응은 기꺼이 그 앞잡이가 돼서 그 나머지 혜택을 핥았으므로, 운현(흥선대원군)이 그를 매우 원망했다. [(興寅君最應 與其弟大院君素不協 升鎬推挽之 爲領議政 以敵大院君 凡事可陳白 而有難處者 必使最應達之榻前 最應甘爲之倀而餂其餘潤 雲峴 甚恨之)]” 라고 하였다. 기요타카가 처음 왔을 때 백관이 날마다 정부에 모였는데, 한 사람이 화친해야 한다.’라고 하면 수상 흥인군 최응은 그렇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싸워야 한다.’라고 하면 또 그렇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면 또 그렇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이기지 못하면 화친한다.’라고 하면 또 그렇다.’라고 해서, 가부를 결정하는 바 없이 날이 저물면 흩어졌으니, 온 서울 사람들이 그를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고 불렀다. [(方淸隆之始到也 百官日會政府 一人曰是當和 首相興寅君最應曰唯 一人曰是當戰 又曰唯 一人曰戰不勝則奈何 又曰唯 一人曰不勝則和 又曰唯 無所可否 日晚則散 都下謂之唯唯政丞)]”라는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 이최응은 훗날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와중에 난병(亂兵)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는 동기지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의 정적관계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밀명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병일기의 문헌적 가치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일반적인 여론은 왜양일체(倭洋一體)’ 관념에 입각해서 일본과의 화친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을병일기123일조에도 수록되어 있는 최익현의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가 바로 이러한 사상을 대표하는 문헌이다. 그에 비해 고종과 민씨 척족, 그리고 이최응과 박규수 등은 무고한 백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일본과의 무력 충돌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일본과의 조약 체결 또한 일본과의 300년 옛 우호를 다시 맺는 것(舊好重修)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여론을 설득해 나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화파(主和派)의 입지는 취약하였고, 따라서 이최응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서 여론의 추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을병일기의 곳곳에서 그 고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을병일기는 강화도 협상 당시 조야(朝野)의 극렬한 척화론을 무릅쓰고 일본과의 화친을 관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종과 주화파 관료들의 상황 인식 및 대응 방식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을병일기첫 장.

내관문답(萊館問答)18761219(양력 115)에 일본 함선 7척이 강화도로 향하는 길에 부산에 기항했을 때의 문정 결과와 일본인들의 동향을 기록한 것으로, 동래부사 홍우창의 보고문으로 추정된다.



























 

일본 함선이 강화도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1877년 정월 3(양력 128)에 각 도()의 포수들을 징발해서 대처할 것을 명한다. 그 내용이 담긴 부분. 을병일기는 각 도의 포수 및 감병영 병졸들의 징발과 배속 현황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조선 측의 군사적 대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876년 정월 28(양력 222)에 부호군 윤치현이 올린 상소문 중 일부. 중간에 왜인과 우호를 계속하려는 것이다. 서양인이 아니니 화친할 수 있다. [(與倭續好 匪洋伊和)]”라는 구절이 보인다. ‘()’‘()’의 오자이다. 이는 강화도 조약 당시 고종 및 집권 세력이 조야의 척사론을 무마하고 조약 체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된 논리였다.





















집필자
 

. 김종학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와 외교사를 전공했다. 편찬한 책으로 근대한국외교문서공편,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공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하권, 심행일기, 을병일기등이 있다.

 

 

관련콘텐츠


(국역) 을병일기

朝日修好條規

조일수호조규의 역사적 위치

      日省錄

(한권으로 읽는) 매천야록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

강화도 : 심행일기 : 송호근 장편소설

   梅泉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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