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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재유집(支齋遺集) 스승과 벗들의 삶을 담아낸 책 한 권
가끔 생각지도 않게 흥미롭거나 가치 있는 책을 만난다. 요사이 출간된 책에서도 때때로 그런 경험을 한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고서를 만나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필자처럼 고서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한 행운이 없다. 지재(支齋) 이희(李熹)의 초고본 문집 《지재유집(支齋遺集)》도 그런 기쁨을 가져다준 책이다.

가끔 생각지도 않게 흥미롭거나 가치 있는 책을 만난다. 요사이 출간된 책에서도 때때로

그런 경험을 한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고서를 만나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필자처럼 고서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한 행운이 없다.

지재(支齋) 이희(李熹)의 초고본 문집 지재유집(支齋遺集)도 그런 기쁨을 가져다준 책이다.



 
그림 1. 지재유집성호3648-62-918



 

지재의 문집을 만나다
 

저자인 이희(1691~1733)는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의 문집 역시 33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얄팍한 책 한 권이라 눈에 띄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하는 유일본이라 많은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다. 필자도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고전 번역을 의뢰받기 전까지는 이 책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접하게 된 문집이지만 훑어보자마자 바로 번역 의뢰를 수락했고 작업에 임했다. 그 이유는 초라한 외형으로도 감출 수 없는 풍성하고 의미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책은 거죽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세상에는 예상과 다른 좋은 책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스승인 옥동의 서예론을 논하다

이 책에서 크게 흥미를 끈 주제가 두 가지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책의 맨 앞에 수록된 서예를 다룬 글 두 편이었다. 양정 이군(李君)이 임서(臨書)한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서첩 서문(養靜李君臨書鍾王帖敍)양정 이군의 6첩에 다시 서문을 쓰다(重敍養靜六帖)이다. 글이 제법 길어서 책 전체 분량의 4분의 1쯤을 차지하는데 서예를 보는 웅숭깊은 식견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의 제자로서 서예에 대한 깊은 지식과 뛰어난 안목을 소유하고 있었다. 옥동은 한국 서예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명필이다. 조선 후기 서예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옥동 서예론의 깊이를 이보다 또렷하게 밝혀놓은 글이 다시 있을까 싶다. 옥동의 서예론을 설명한 글은 서예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집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자세에까지 확장하여 생각하고 읽어봐도 좋을 글이다. 당연히 필자 역시 이 부분에 시선이 꽂혔다.

 

완벽주의자였던 그의 스승, 옥동
 

너 나 할 것 없이 고금에 걸쳐 최고의 서예가로 종요(鍾繇, 151~230)와 왕희지(王羲之, 303~361)를 든다. 그들을 평가하여 보통 글씨를 본받을 만하다(可尙也)”,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可嘉也)”라고 말해왔다. 사실 그들처럼 쓴다면 대가 축에 끼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옥동의 생각은 달랐다. ‘할 만하다라는 의미의 ()’겨우 괜찮다정도의 의미로 평가절하하였다. 저 대가들을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평한 것이다. ‘()’라는 표현은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옥동은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서예의 대가들을 겨우 괜찮은 정도로 보았다. 이는 누가 봐도 서예 대가를 가볍게 여기고,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태도로 보인다.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옥동은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대개 군자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공자가 그런 태도를 지녔다. 공자는 훌륭하다고 인정받은 인물을 평가할 때도 전폭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가장 뛰어났던 수제자 안연顏淵에게도 그랬다고 한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그 경지에 접근한 정도라면 온전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예도 예외가 아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군자라면 아무리 수준이 높아 보여도 그 정도면 됐다라고 말할 수 없다. “괜찮은 정도다라고 하면서 더 완벽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옥동은 가장 뛰어난 서예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대가들의 붓글씨를 겨우 괜찮은 정도다라고 평하고 늘 부족함을 느끼며 정진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참으로 치열한 인내와 정진을 요구하였다. 그 치열함은 서예만이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동일하게 요구되었다.

때문에 이희의 문집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그의 스승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감하고 있는 완벽함을 향한 갈구의 정신이 무서울 정도다.
 

격동의 비사를 담다
 

다음으로 문집의 흥미로운 주제는 조선 후기 정치적 격동기의 비사(祕史). 1722년 노론(老論)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발로 인해 노론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세력의 다수가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 해에 이 고변(반역 행위를 고발한 것)이 무고로 판명되어 목호룡 편에 섰던 소론과 남인이 대거 몰락한 사건이 바로 신임옥사(辛壬獄事). 큰 정치적 사건으로 저자를 비롯한 젊은 남인 관료들이 축출되었다. 이희 역시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함께 축출된 일군의 지식인들이 바로 이중환(李重煥), 강박(姜樸), 강필신(姜必愼), 이인복(李仁復)이었다. 그들은 허목(許穆)을 영수로 추종하는 남인의 벽파 문외파(門外派)에 속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주목할 인물이 바로 이중환으로, 그 유명한 저작 《택리지(擇里志)》의 저자이다. 이중환은 목호룡의 배후 세력으로 몰려 여섯 차례에 걸쳐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으나 극적으로 섬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고 몇 년 뒤에는 무사히 풀려났다. 하지만 이로써 그의 정치적 생명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는 평생을 방랑하며 지내다 말년에 《택리지》를 저술하였는데, 이후 《택리지》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저술과 저자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희의 문집에 신임옥사를 전후한 시기의 이들 청년문사, 그중에서도 이중환의 행적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백하록과 수창집 서문(白下錄酬唱錄序)」이다. 그들 동인(同人)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서로 창수한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중한 기록이다.

이중환을 비롯한 관료들은 1721년 윤6월 백련봉(白蓮峰)(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스위스그랜드호텔 뒷산 아래)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서 시사를 결성하였다. 연사(蓮社) 또는 정토시사(淨土詩社), 매사(梅社), 서천매사(西泉梅社)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 시사를 거점으로 시를 주고받으며 정치와 문학을 논하던 이들에게 신임옥사의 화란이 닥쳐왔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에 청담(이중환의 호)은 전부(前部) 낭중(郎中)(병조정랑) 벼슬을 하고 있었고, 신재(이인복의 호)는 전() 시랑(侍郞)(형조참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라에 큰 변고가 발생하였다. 우리들은 산반(散班)(실직이 없는 관료)으로 급히 궁궐 앞으로 달려가 엎드려 재차 상소를 올렸다. 신재는 또 소사구(少司寇)(형조참의)로 상소를 올려 정국을 논쟁하되, 먼저 핵심 인물을 제거하고 이어서 시사(時事)를 크게 변경해야 재앙이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은 직언(直言) 탓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신재는 지방 고을 수령을 자청해서 떠났다. 청담은 성품이 뻣뻣하고 깨끗하여 아첨과 비방을 싫어했기에 특히 미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올해 모함을 받아 앞일을 예측하기 힘들었는데 비로소 풀려났다.

 

옥사가 벌어지자 이들은 매우 강경하게 노론 측에 항거하였고, 특히 뻣뻣한 성품을 지닌 이중환이 타협을 거부하다가 큰 곤경에 처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이중환은 처형의 위기를 겨우 모면하였다.

 

앞길이 막힌 젊은 청년들의 상념
 

이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은 그 이후 이들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평소 산수를 즐겨 유람에 나섰던 이중환은 그 이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종 하나와 시 주머니를 가지고 단양으로 들어가 초연이 속세를 벗어나 신선처럼 살려 하였다. 신재 역시 벼슬을 그만두고 소백산 남쪽에 은거하자 이중환이 그리로 가서 함께 태백산과 소백산을 유람하였다.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된 청년 관료들의 당시 심경은 어떠했을까? 글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때는 늦가을이라 가을의 질서는 산언덕에 퍼지고 스산한 가을 소리가 온 숲을 진동하였다.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과 시들어가는 만물을 보고는 서글픔이 밀려왔고, 울적한 마음에 훌쩍 날아 멀리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글프고 무료해져 밀려드는 불평한 심정을 모두 시에 담아냈다.

 

가을을 상심하기에는 너무도 젊은 나이였으나 그들의 마음은 그렇게 우울하고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지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들의 마음자리가 그랬다. 그처럼 영조 초반 정치의 격랑 속에서 패배와 좌절의 심경을 동인들끼리 시를 주고받으며 해소하려 했던 자취가 인상 깊게 묘사되고 있다. 이 문집에 실린 시 작품은 서문에서 말한 백하록수창록의 운자(韻字)를 따서 지은 작품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저자 역시 그들의 심경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잊힐 뻔했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다
 

이중환의 청년기 행적을 이처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집은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귀중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29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장령 등의 청요직과 지방 현감을 지냈다. 관료로서 미래가 기대되었으나 43세의 젊은 나이로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학계에 이름난 저자는 아니지만, 이 작은 문집이 사라졌다면 그의 스승과 벗들이 일구어놓은 예술과 파란의 삶도 역사의 물결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지재유집이 수록한 잡체시(雜體詩)에서는 훌륭한 작품성이 보이고, 운문성 산문인 지연부(紙鳶賦)라는 글에서는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과 감수성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①                            

지은이가 15세 때 지은 소쩍새 노래.

이 밖에도 문집에는 10대 때부터

시를 잘 지었던 지은이의

몇몇 작품이 담겨 있다.



















서예론을 설파한 양정 이군이 임서한 종요와

왕희지의 서첩 서문」. 문집 첫 번째 장에 실려 있다.

















             


 

지은이가 남인 벗들과 시사를 결성하여 활동한 내용을 서술한 백하록수창집서문.






















집필자
 

.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1월부터 현재까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20124월부터 20144월까지 문화재청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고전산문산책》, 《정조의 비밀편지》, 《완역정본 북학의》, 《주영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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