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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나던 그녀들의 삶에 가려진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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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나던 그녀들의 삶에 가려진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
한무숙의 <이사종의 아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나 고전 소설의 등장 인물 중에는, 시대를 앞섰던 사고와 행동으로현대적 여성상을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조선의 명기였던 황진이와, 영국의 작가 샬럿 브론테가 쓴 소설 <제인 에어>의 여주인공인 제인도 그에 속할 것입니다.
 스스로 기생이 되는 길을 택함으로써 당시 여성들에게 씌워졌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껏 예술을 논하며 하고 싶은 것을 행할 자유를 얻었던 황진이, 19세기 보수적인 영국에서 고아이고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 나갔던 제인 에어. 그녀들의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욕망과 그에 따른 행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경을 사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두가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우선하며 살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삶의 중요한 부분들 때문에 자신을 억누르기도 하고, 속한 사회의 부당한 관습과 문화 때문에 혼자만의 힘으로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면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비해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매도할 수 있을까요?
 여기 앞서 언급한 두 여성과 연관된, 또 다른 입장의 여성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쓰인 문학 작품 두 편을 소개합니다.


황진이의 자유로운 삶과 사랑은 그녀에게 아픔이었다, <이사종의 아내>

 


그림 1. 영화 <황진이> 스틸 사진

 

 

 지족선사며 벽계수 등 이름 높은 남성들을 유혹하여 그들의 허울을 벗기는 것으로 유명했던 황진이. 하지만 그녀에게도 유혹의 대상만이 아닌, 정해진 기간이나마 시간을 들여 지긋하게 정을 나누며 살길 원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선전관이었던 이사종이 바로 그 상대인데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송도(지금의 개성)에 있을 적 이사종이 천수원 개울가에서 쉬어 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마침 그 근방을 지나던 황진이가 이사종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가 명창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6년간의 계약 동거 형태로 이어지게 되었는데요, 당시로서도 드문 일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 뒤에는 어엿한 이사종의 정실부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특별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이사종과 황진이의 사랑과 같은 화제를 흥미롭게 여길 뿐, 처첩제의 조선사회에서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눌 때 그 아내는 어떤 일들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짐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작가 한무숙은 조선시대 쓰였던 내간체를 충실히 복원하여, 화제의 주인공인 이사종이나 황진이가 아닌, 이사종의 아내의 입장에서 지아비를 앗긴 여인의 마음을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단순히 투기의 감정만이 아닌, 자기가 옳다고 배우며 따른 삶과는 전연 다른 삶을 사는 여자에 대한 시기와 놀라움, 그리고 체념이 우아한 문장 속에 배어 있습니다.

 

 작품의 형식은 이사종의 아내가 그녀의 외할머니에게 올리는 편지글로 되어 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상을 당한 외손녀가 홀로 남으신 외할머니를 염려하는 편지로 작품은 시작됩니다. 요즘 시대에는 쓰이지 않는 말들이 서두부터 쏟아져 나오므로 독자는 뜻을 단번에 파악하기 쉽지 않고,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편지를 읽다 보면, 고어의 세세한 뜻은 다 파악하지 못해도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풀려나갈지를 조금씩 눈치채게 됩니다.

 

 일전 서외조모, 천만 뜻밖에 행차 계시와 합내제절 만안하옵심 아압고 하정에 경하 만만이로소이다. 서외조모 전일과 달리 숙연하와,
 “대방마님께서 무료해 하시니 지척에서 지성껏 뫼시고 싶은데 이 서방댁 의향은 어떠허시우.” 하옵기,
 “그러허시우. 할미씨(서 조모를 칭함) 음성이 고우시고 할머님께서두 이제 안력이 전 같지 않으시니 좋아하시는 책도 읽어드리구 가곡 시창도 들려드리시구려.” 하였나이다.

 한마님께오서 숙덕 유여하오시며 관용하심이 바다와 같사와 소시부터 일절 투색이 없으셨기, 서외조모의 경모함이 지극하와 아름답더이다. -<이사종의 아내>, p.474

 

 서외조모는 곧 외할아버지의 첩을 말합니다. 젊은 시절 남편이 들인 첩을 두고도 질투하지 않고 덕으로 다스려, 훗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첩에게서 모심을 받게 되는 외할머니의 부덕을 기리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글에서, 위의 이야기는 단순히 외할머니의 덕을
기리고자 꺼낸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지아비 이사종이 풍류를 즐기며 기녀들과 어울리고, 지어미인 자신은 그 치다꺼리에 집안을 돌보느라 보람 없이 외로움만 쌓이는 사정을, 역시 비슷한 일들을 겪었을 외할머니께 은근히 털어놓습니다.

 

 오늘밤도 사랑에서는 어느 장화를 꺾고 있아온지 귀가치 아니하옵고 존고께서는 사직골 작은 소고(시누이)댁에 행차하시어 준행남매만 어미와 집에 머물고 있아와 오래도록 지필을 대하고 있아옵니다. 곁에서 오묵이가 반은 졸며 보선 볼을 대고 있아옵고 밖은 적막 칠야이옵니다. 오묵이가 문득,
 “나리마님 보선은 참 야릇하게 떨어지지오니까, 볼보다 굼치가 더 많이 떨어져와요.” 하옵니다. 백학같이 선인같이 춤추는 그 모습이 안전에 떠오르매 사람과 춤은 남이 보고 춤으로 하여 심히 떨어진 보선 굼치만 지어미가 다스리고 있나이다. -<이사종의 아내>, p.475-476
 
 자신이 심신을 다하여 섬기는 남편의 훌륭한 모습은 바깥의 다른 이들이 누릴 뿐이고, 정작 자신은 남편의 그 같은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뒷수발하는 존재로 멀어진 것에 대한 헛헛하고 서러운 마음이, 남편 없는 밤 ‘심히 떨어진 버선 굼치만 다스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읽혀집니다. 자기 자신으로서 드러날 길은 없고, 남편과 자녀를 섬기는 것으로 그나마 존재감을 심어야 하는 조선시대 여성의 맹점이 비치는 대목입니다.

 

 

그림 2. 영화 <황진이> 중에서

 

 

 그래도 여기까지는 남편이 특별히 마음에 두었던 대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그녀, 황진이의 존재가 나타납니다. ‘방종은 하되 중심은 잃은 적이 없었다’고 표현되는 이사종이 넋을 잃고 일상을 흐트러뜨릴 만큼 빠져든 여성, 황진이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사종의 아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황진이의 이력, 풍문과 함께, 그녀의 시재를 경악과 질투를 담아 외할머니에게 털어놓습니다. 황진이의 시 <동지달 기나긴 밤을>을 편지에 옮기며, 심중을 계속해서 드러냅니다.

 

 한마님, 손이 떨리옵니다. 아무리 화류에 노니는 음부라 할지라도 머리 긴 치마두른 여신이 언감생심 이런 글을 어찌 쓸 수 있겠아오잇까. 하오나 이런 차마 읽지 못할 부끄러운 글귀가 대장부의 간장을 녹인다 하오니 심규에서 엄엄 침중히 심신을 거두어온 손녀로서는 천만 측량할 수 없아온 것이 그 마음이옵니다. -<이사종의 아내>, p.478

 

 자신이 속한 곳에서 옳은 길이라 배워온 대로 이제껏 살아왔는데, 자신을 인정해 줄 지아비의 사랑은 간데 없고 그 자리를 이제껏 배워온 여성의 삶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는 황진이가 채우고 있는 것에 대한 허탈함과 분노가 배어납니다. 이어서, 이 작품에서 이사종의 아내가 가장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아프게 드러내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들어와서는 아내를 목석으로 놓아두고 나가서는 노류장화와 부끄럼없이 정분 나누며 사는 것이 대장부의 치레이오잇까. 기방 출입하는 남편 의복 매무새 추레하오면 아내의 흉이라 하옵니다. 투기는 칠거지악에 드는 것이온적 강작으로 참사오나 맺히고 맺힌 한이 가슴에 응어리졌아오며 삼팔바지 다듬고 짓는 손이 자꾸만 떨리옵니다.
 한마님, 진정 이몸은 목석이 아니옵니다. 목석이 아니옵니다. -<이사종의 아내>, p.478

 

 본심을 겹겹이 감싼 고어로 이어지던 편지글을 일순 뚫고 나오는 듯한 “이몸은 목석이 아니옵니다”는, 어쩌면 이 작품의 핵심과도 같은 말이요, 이후 다시 부덕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감정을 봉인해 가는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외쳤던 가장 생생한 고백일 것입니다.

 

 아마도 손녀를 다독이고 부덕으로 일을 넘길 것을 권하는 외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듯, 다음 편지는 잘 견뎌 나가겠다는 내용을 담아 외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립니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시앗(남편의 첩)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에서 얼마나 마음 상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지를 그녀는 알알이 느끼게 됩니다. 집안 건사며 시부모 봉양에 소홀함 없던 며느리를 앞에 두고, 시어머니는 황진이를 가리켜 아들 이사종과 ‘천생연분’ 이라며 “아들이 데리구 살면 며느리”라는 말을 태연히 합니다. 시어머니뿐 아니라 심부름 하는 여종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 만큼 황진이의 수완은 뛰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이사종의 아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황진이와 사랑에 빠지면서 변화한 남편 이사종의 모습입니다.

 

 하오나 근자에 와서, 그 구미호와 살림을 갖고부터 사랑의 인품이 달라졌아오니 전에 없이 조용해졌아오며 오히려 자상해지옵고 착실해진 것이옵니다. 남편을 시앗에게 아이옵고 아내는 수발드옵는 수고가 없어졌아오니 이 허전하옴을 어찌 다 아뢰오리까. 요물은 요물이어서 행전 하나 보선 하나 때묻은 것을 보온 일이 없아오며 방탕기녀로 언제 침선을 배웠압는지 남편의 의복 일절 손수 짓는다 하오니 존고께서,
 “체체하고 습습하고 상냥하고 온 그런 기집이 천하에 있겠느냐.”
 침이 마르시게 칭찬하오시는 것 천근으로 가슴을 누를 따름이옵니다.
 요망한 것이 제법 너그러운 체 법도를 지키는 체 자주 사랑을 본제에 머물게 하오니 사랑에서는 살림차리기 전보다 오히려 외박이 줄었나이다. 동기들과 집안 동서들이,
 “그런 시앗이 어디 있우. 시앗복두 타고나야던데.”

하옵니다만 한마님께서는 아시옵나이다. 사리 밝고 투기 없고 체체한 시앗 가진 본댁네 마음이 어떠하온가를 아시옵니다. 차라리 간악하고 발칙하고 방자하게 구오면 이렇듯 외롭고 슬프지는 아니하올 것이오이다. 스스로가 이토록 초라하옵고 보잘것없이 느껴지오며 자격지심에 마음이 시들어가지는 아니하올 것이옵니다. -<이사종의 아내>, p.481
 
 그 가운데서도 이사종의 아내는 매무새를 단장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머무는 사랑문 밖에서, 그녀는 뜻밖의 노랫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름우희 댓님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죽을 만뎡/ 어름우희 댓님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죽을 만뎡/정둔 오날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가만한 가운데 억천 가지 시름이 서린 처절하옵도록 절절한 노랫소리였아옵니다. 명창을 지아비로 근 이십 년, 이토록 사모치는 그리움과 절절한 정과 사나이 막중한 모든 것을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던진 듯하온 그런 처참한 창은 처음 들었아옵니다. -<이사종의 아내>, p.482

 

 한 남자의 아내로서, 다른 여성에게 향하는 그 같은 노래를 남편이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사종의 아내는 더 이상 정념에 휘둘리지 않기로 합니다. 남편을 두고 황진이와 여성으로서 겨루기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허락된 것들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기로 합니다. 그 다짐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보다도 자신이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투심에 불타던 아수라를 비키옵고 미움의 야차를 멀리하옵고 겨누려 하던 초열에서 빠져나와야 하겠나이다. 제 나이 송도집(황진이)보다 하나 손위인 갓서른, 천금 같은 준행 나이 열두 살이옵니다. 내년이나 다음 해에 자부 보옵고 송도집이 섬기지 못하오는 사당과 봉사 뫼시고 지내오면 그럭저럭 삶도 저물어 진정 목석이 되리이다. -<이사종의 아내>, p.482

 

 다행히 그녀의 아픈 결심은 열매를 맺습니다. 아들인 준행이 혼사를 치르게 되어, 그녀도 며느리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며느리를 맞게 되었지만 의젓한 시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려 애쓰며, 어린 며느리를 미쁘게 여기는 그녀의 모습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던 정념들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고행의 시간들을 견디고 삼키면서 그녀의 삶에도 굳은살과 같은 부분이 생깁니다.
 
 수삼 일 전에 들렀던 서외조모 편에 아뢰온 갑사 한끝 며느리의 효도이오니 어여삐 받아주옵소서. 서외조모 낙치한 모양 가련하와,
 “할미씨 이가 없으니 고기도 못 먹겠네” 하였압더니,
 “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지요.” 하와 웃었나이다. 진정 인생은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먹으며 사는 것인가 하나이다. -<이사종의 아내>, p.486

 

 편지는, 그리고 <이사종의 아내>는 위의 말과 함께 외할머니의 복록과 장수를 비는 인사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먹는’ 것이 인생임을 체득하기까지, 그녀가 겪은 일들과 깨달음이 주체적인 삶을 위한 노력에 비해 함량이 적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라도 삶을 이어가며 자신을 긍정하려는 그녀의 선택을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인 에어의 사랑 뒤에 가려진 한 여성의 이야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그림 3. 영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2006년작)> 스틸 사진

 

 

 <제인 에어>에서는 주인공 제인과 로체스터가 맺어지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손필드 저택 깊은 곳에 갇혀 있던 로체스터 부인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제인 에어>를 접한 독자라면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로체스터 부인을 곱지 않게 여긴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로체스터 부인, 버사 메이슨은 로체스터의 말에 따르면 ‘저능한 지능에 애욕은 대단한’, ‘수치스러운 그 어머니의 딸답게 온갖 흉측하고 창피스럽고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남편을 괴롭힌 이국의 광녀라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로체스터의 입장에서만 기술되는 이 같은 설명이 정말 한 사람을 온전히 묘사하는 것이었을까요? 버사 메이슨과 같이 서인도 제도 출신이었던 작가 진 리스는 이에 분노합니다. <제인 에어>는, 제인과 같은 순수한 영국 태생의 여성에게는 주체적인 삶을 위한 과정과 성공을 부여하지만, 크리올(식민지 태생의 유럽인) 여성인 버사 메이슨에게는 어째서 <제인 에어>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비참한 처지가 되었는지, 버사의 입장에서 하는 어떠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 리스는 고향 도미니카에서 많은 수의 크리올 상속녀가 영국 남성과 결혼한 후 ‘광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진 리스는 버사 메이슨을 <제인 에어>의 부속물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녀 입장에서 그녀가 성장한 배경과, 로체스터와의 결혼을 말하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집필합니다.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 제도와 영국이 있는 유럽 대륙 사이에 있는 해역 중의 하나로, ‘사르가숨’ 이라 불리는 해초들이 다량 서식하여 항해를 방해하고, 결국 배가 다니지 않아 죽은 바다로 일컬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국 출신의 로체스터와 크리올 여성인 앙투아네트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림 4. 이국에서의 신혼, 낯설음을 느끼는 로체스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첫 장은 훗날 로체스터 부인이 되는 어린 앙투아네트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앙투아네트는 자메이카의 백인 농장주인 코즈웨이와 그의 젊은 부인 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설정됩니다. 코즈웨이는 방탕한 생활로 많은 혼혈 서자를 남긴 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네트는 딸 앙투아네트, 백치인 아들 피에르와 함께 남겨집니다. 게다가 1883년 내려진 노예해방령으로 인해 그들이 살던 쿨리브리의 농장은 노동력이 빠져나가 황폐화되고, 그들은 가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노예였던 흑인도, 그렇다고 완전한 이방인인 유럽 태생의 백인도 아닌 그들은 미움을 사는 존재였습니다. 집안에 하나 남은 말마저도 흑인에게 독살당합니다. 앙투아네트는 흑인 친구 티아에게 ‘흰 검둥이’ 라는 조롱을 듣습니다.
 다행히 아네트는 부유한 농장주 메이슨과 재혼을 합니다(<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리처드 메이슨의 아버지입니다). 한동안 순탄한 듯했으나, 다시 부유해져 자신들을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인 아네트를 질시하고 미워한 흑인들이 어느 날 그들의 저택과 농장에 불을 지르고, 그 때문에 아네트의 아들 피에르가 죽게 됩니다. 아네트는 그 충격으로 미치게 되고, 메이슨은 아네트를 남겨두고 떠나 버립니다.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에게서 분리되어 수녀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며 성년기까지 자랍니다.

 

 두 번째 장은 결혼식을 마치고 그랑부아라는 곳에서 신혼을 시작한 로체스터와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시점에서 번갈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장남에게 물려주려던 로체스터의 아버지는 차남인 로체스터가 가난에 처하지 않도록, 의붓아버지 메이슨으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은 앙투아네트와의 결혼을 주선합니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자신이 돈 때문에 순수한 유럽 태생이 아닌 크리올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 내심 꺼리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다. 나는 지친 상태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세상이 온통 푸르고 온통 보라색이며 온통 초록색 천지이다. 꽃들은 너무 빨갛고 산들은 너무 높으며 언덕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그리고 여인은 이방인이다. 그녀의 변명하는 말투도 귀찮다. 나는 그녀를 사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산 거다. 혹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말의 거친 갈기를 내려다보았다. .......아버님 보십시오. 삼만 파운드의 돈은 질문도 조건도 없이 제게 지불되었습니다. 그녀를 위한 어떤 보호 조건도 만들지 않은 채. 이제 저는 꽤 괜찮은 재산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님이나 아버님이 사랑하시는 형님께 수치스러운 인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교활하고 치사한 전술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신의 영혼을 팔았군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p. 105

 

 기후며 문화며, 서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역시 서로 다른 생각이며 생활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아내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무언가 미심쩍은 것, 열등한 것으로 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배다른 혼혈 형제인 대니얼로부터 앙투아네트와 그 가족들에 관한 진실과 음해가 뒤섞인 편지를 받게 됩니다. 앙투아네트의 생부인 코즈웨이와 그 가문에는 광기가 유전되고 있으며, 어머니 아네트 역시 미쳤고, 그 딸인 앙투아네트에게도 혈통으로 인해 광기가 유전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앙투아네트가 혼전에 샌디라는 혼혈 사촌과 성적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까지 흘립니다.
 그러잖아도 아내의 출신이 늘 마음 깊은 데 걸려 있던 로체스터는, 편지의 암시를 받아들여 아내를 외면합니다. 이미 남편을 사랑하게 된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의 홀대를 견디지 못하고 흑인 유모 크리스토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크리스토핀은 남편의 곁을 떠나라고 권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가장 큰 문제는 ‘결혼 후 아내의 전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된다’는, 지금으로서는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당시의 법입니다. 한때는 거액의 지참금이 있는 상속녀였지만, 남편이 돈을 주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림 5. 로체스터에게 상처받은 앙투아네트

 

 

 앙투아네트는 크리스토핀의 권유대로, 남편에게 과거 집안의 몰락과 어머니가 파멸한 사정에 대해 숨김 없이 털어놓습니다. 어머니 아네트는 정신을 놓은 뒤 갇혀 지내던 곳에서, 감시자인 흑인 남자와 그 패거리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간을 당했던 것입니다. 로체스터는 아내의 사정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런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에 내심 더욱 수치감을 느낍니다. 아네트의 남편 메이슨도, 그리고 로체스터도 서인도 제도 출신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의 묵은 원한이며 독특한 관계 등을 폭넓게 헤아리지 못했고, 미칠 수밖에 없었던 아네트며 불행하게 자란 앙투아네트를 이해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려 크리스토핀에게 부탁해 사랑의 묘약을 얻지만, 그 약을 먹고 하룻밤을 보낸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여기며 그녀를 더욱 혐오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때때로 그들의 결혼을 조롱하던 영악한 혼혈 하녀 아멜리와 성적 관계를 갖습니다. 앙투아네트는 심한 상처를 받습니다.

 

 “나는 그 글자를 종이에 적어보곤 했어요, 여러 번. 그러나 항상 그 단어는 아주 새빨간 거짓말을 담고 있더군요. 정의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럼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네들이 입방아를 찧고 있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에게 정의가 무슨 역할을 했나요? 흔들의자에 앉아 죽은 말과 죽은 마부들에 대해 얘기하던 불쌍한 어머니, 그리고 악마같이 생긴 검둥이가 슬픈 어머니의 입술에 키스할 때, 어머니에게 정의가 어디 있었나요?(중략)“

”...나는 이 장소를 너무나 사랑했었는데, 당신은 이 장소를 내가 증오하는 곳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아세요?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간다 해도, 나는 이 장소를 끝까지 품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소중한 나의 장소를 완전히 망쳐버린 거예요. 여기는 그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어떤 장소 중 하나가 된 거라고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p. 207-208
 
 크리스토핀은 로체스터를 찾아가, 정 아내를 사랑할 수 없다면 지참금의 반이라도 돌려주고 앙투아네트를 놓아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앙투아네트가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 다시금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는 크리스토핀의 말에 ‘격통 같은 질투’를 느낀 로체스터는,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고 앙투아네트를 자신과 함께 동행시키며 파멸의 길로 몰아갈 생각을 합니다.

 

 제 3장은 그들이 영국의 손필드 저택으로 들어온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체스터는 넉넉한 급여를 주고 그레이스 풀이라는 여자에게 버사(앙투아네트)를 감시하는 일을 맡깁니다. 버사는 자기 자신이며 벌어졌던 일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 대한 인식까지 혼돈된 채로 ‘마분지 같은 세상(손필드 저택을 가리킵니다)’에 갇혀 지냅니다. 그러나 <제인 에어>에서 평면적으로 묘사된 그녀의 생활과는 달리 그녀는 그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을 되찾을 궁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며 다시 쿨리브리로 돌아가기 위해, 촛불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는 버사의 모습에서 끝이 납니다. 그 촛불은,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손필드 저택의 화재로 이어질 것입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 제도를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분위기와, 작중 시점이며 화자가 오가는 데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느낌이 여운을 짙게 남기는 작품입니다. 또한 작품  속 남성과 여성, 유럽 출신과 크리올, 백인과 흑인-그 중에서도 크리올 백인과 흑인 등 갈등 구조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각자의 입장이 다양하기에, 작품 아래 숨은 의미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나오는 이 말로, 하나의 인생은 다른 편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의미일 수 있음을 되새기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모든 일에는 다른 면이 있는 거예요, 항상.“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p183

 

 

 

 

- 자료 출처 -

*서적
<이사종의 아내>, 정통한국문학대계 16권 한무숙 편, 어문각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웅진씽크빅 펭귄클래식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웅진씽크빅 펭귄클래식 p.154

 

- 이미지 출처 -

그림 1,2. 영화 <황진이> 네이버 영화 페이지
http://www.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60311

그림 3,4,5. 영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2006년작)> 스틸 사진
그림 3.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는 앙투아네트와 로체스터
http://www.frockflicks.com/wide-sargasso-sea-2006/
그림 4. 이국에서의 신혼, 낯설음을 느끼는 로체스터
http://rebecca-hall.com/photos/displayimage.php?album=177&pid=2281#top_display_media
그림 5. 로체스터에게 상처받은 앙투아네트
http://rebecca-hall.com/photos/displayimage.php?album=177&pid=2885#top_display_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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