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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전책(錦帶殿策) 역사에 남지 못한 천재, 이가환의 대책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唯一本) 가운데는 조선 후기 학자인 이가환(李家煥)이 지은 《금대전책(錦帶殿策)》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책이 있다. 대부분의 책은 제목만 보고서도 대충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알기 쉽지 않다. 금대(錦帶)는 무슨 뜻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이가환의 호이다. 책의 제목처럼 어떤 사람의 호 역시 보면 대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나, 이 금대라는 호는 지은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호 치고는 참으로 독특하다. 이가환은 이 호 이외에 정헌(貞軒)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면 전책(殿策)은 무슨 뜻인가? 전시(殿試)를 볼 때 임금이 제시한 책문策問에 대해 답으로 지어 올린 대책(對策)이라는 뜻이다. 《금대전책》은 바로 금대 이가환이 전시의 과거 시험에서 답안지로 지어 올린 대책문(對策文)을 모아 놓은 책인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唯一本) 가운데는 조선 후기 학자인 이가환(李家煥)이 지은 《금대전책(錦帶殿策)》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책이 있다. 대부분의 책은 제목만 보고서도 대충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알기 쉽지 않다. 금대(錦帶)는 무슨 뜻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이가환의 호이다. 책의 제목처럼 어떤 사람의 호 역시 보면 대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나, 이 금대라는 호는 지은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호 치고는 참으로 독특하다. 이가환은 이 호 이외에 정헌(貞軒)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면 전책(殿策)은 무슨 뜻인가? 전시(殿試)를 볼 때 임금이 제시한 책문策問에 대해 답으로 지어 올린 대책(對策)이라는 뜻이다. 《금대전책》은 바로 금대 이가환이 전시의 과거 시험에서 답안지로 지어 올린 대책문(對策文)을 모아 놓은 책인 것이다.

 

 

그림 1. 《금대전책》 성호(古)1258 -15

 

 

비운에 스러진 천재 이가환

 

이가환은 1742년(영조 18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정조(廷藻)이다. 실학(實學)의 중심인물인 이익(李瀷)의 종손이며,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고, 천주교인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이가환은 1777년(정조 1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대사성, 개성 유수, 형조 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노론(老論) 계열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고, 노론 측에 서는 남인(南人)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가환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노론 측에서 이가환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가환의 증조부가 숙종 때 노론을 공격하다 처형당한 이잠(李潛)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가환에게 한때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혐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가환은 1784년(정조 8년)에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 신앙이 점차 확산될 때 이벽(李檗)을 통해서 천주교를 접했다. 이벽은 이가환을 천주교인으로 이끌기 위해 설득하였으나, 이가환은 오히려 격렬한 논쟁으로 이벽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또 한,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이후에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가사인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전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1792년(정조 16년) 정조는 서양의 과학과 문명에 밝은 이가환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여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조처는 노론 측의 반발을 불러와 오히려 이가환을 위험에 빠뜨렸다. 정조는 이가환을 노론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개성 유수로 내보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가환에 대한 노론의 공세는 점점 심해졌고, 결국 정조는 1795년(정조 19년)에 이가환을 충주 목사로 임명하여 아예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충주로 내려간 이가환은 천주교를 배척하면서 노론의 공격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가환의 노력은 자신을 비호해 주던 정조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가환은 정조가 죽은 다음 해인 1801년(순조 1년) 노론 벽파(辟派)가 정국을 주도, 신유박해를 일으켜 시파(時派)를 숙청하고 천주교를 탄압할 때 하옥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형벌을 받았다.

 

이가환은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남인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채제공(蔡濟恭)의 뒤를 이어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이가환의 이런 정치적 역량을 잘 알고 있었던 채제공은 죽기 전 자신이 이가환을 정승으로 삼아 달라고 정조에게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정조 역시 내심 이가환을 정승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가환은 유가사상(儒家思想)은 물론, 역사와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인 학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대의 일반 학자들과 달리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도 남달랐다. 그는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밝아 황도(黃道)와 적도(赤道)의 교차 각도를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이가환은 당시 정약용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자로 칭송받았으며, 정조는 그를 ‘정학사(貞學士).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가환은 이처럼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 모든 분야를 망라한 학문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적으로 거의 잊힌 인물이 되었다. 이는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옥사(獄死)한 정치적 불운으로 인해서이며, 또한 그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이다.

 

 

《금대전책》에 담긴 이가환의 놀라운 학문 역량

 

《금대전책》에는 대책(對策) 3편과 논(論) 3편이 들어있다. 대책은 천문(天文)에 관한 대책, 지리(地理)에 관한 대책, 문체(文體)에 관한 대책이고, 논은 ‘부도오강론(不渡烏江論)’과 ‘불수유주론(不受維州論)’과 ‘소하대기미앙궁론(蕭何大起未央宮論)’이다.

 

천문에 관한 대책은 정조의 물음 부분과 이가환의 대답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가환은 이 대책에서 천체(天體)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운행된다고 말하며 이를 위민의식(爲民意識)과 연결 지어 설명하였다. 또 역대 성왕(聖王)들이 역상(曆象)을 중요시한 것은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며, 천문학 분야는 학문의 중요한 분야이니 이를 바로 세워 역(易)의 본원적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 대책은 정조가 “읽어 보면 읽어 볼수록 더욱더 깊은 맛이 있음을 알겠다.”라고 평하였을 정도로, 그 내용은 물론 문장 역시 아주 뛰어난 명문(名文)이다.

 

지리에 관한 대책 역시 질문 부분과 답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가환은 이 대책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한 나라의 방위와 분야, 지형의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음에 대해 두루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민생의 안정을 위해 산림과 천택의 개발을 비롯해 염전의 확대, 광산의 개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역대 우리나라의 영토 범위는 물론, 국방 강화와 영토 확장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이 대책 역시 뛰어나 정조가 “이 얼마나 대단한 문장가의 글인가. 학문이 넓은 것은 단지 여사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평하였다.

 

문체에 관한 대책은 논 다음에 수록되어 있으며, 정조의 물음 부분은 전문이 다 수록되어 있으나 이가환의 답변은 앞부분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정조는 문장을 지을 때 기교를 중시하는 풍조를 개혁하기 위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며 이 책문을 출제하였다. 이가환은 이 대책문에서 문체를 올바른 쪽으로 되돌리는 문제는 결국 세도(世道)를 운영하는 국왕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문장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 바국왕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문체반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세 편의 논에 대하여서는 우선, ‘부도오강론’은 초한(楚漢) 시대에 항우(項羽)가 유방(劉邦)과 싸우다가 패한 뒤 오강(烏江)을 건너 강동(江東)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결한 것에 대해 논한 것이다. ‘불수유주론’은 당나라에서 토번(吐藩)이 유주(維州) 지역을 바치면서 화친을 청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해 논한 것이며, ‘소하대기미앙궁론’은 한(漢)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을 지을 적에 작게 짓지 않고 성대하게 지은 이유에 대해 논한 것이다


 

  ①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줄부터 문체에 관한

   이가환의 답변이 시작된다.

   이가환은 “천하의 일은 참으로 그것을 되돌려서 만회하고자 할 경우, 그 기틀은 오직 임금에게만
   달려있다고 합니다.”라며 문장력은

   국가 운영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현학적 풍조를 개선하기 위해 국왕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논하였다.





 

《금대전책》의 가치

 

이가환은 당대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다. 따라서 이가환 역시 자신의 학문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저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이가환의 저술은 거의 없다.

 

다산 등의 기록에 의하면 본디 이가환의 문집으로 10책 분량의 《금대관집(錦帶館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저자의 시문 일부를 모아 놓은 얼마 안 되는 분량의 시문집(詩文集)과 이 《금대전책》뿐이다. 그만큼 이 책은 적은 분량에도 이가환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조와 그 당시 학자들의 학문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책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중요한 경전의 구절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위주로 출제하였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정조는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책문을 내고 있다. 이는 자신이 그런 분야에 해박하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통치자인 임금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문적 스승의 역할까지 자임하였던 정조의 학식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대책문은 일반적인 저술과는 달리 임금의 물음에 대해 그 자리에서 작성해 올리는 것이다. 그런 만큼 평소 해당 내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으면 작성할 수 없다. 그런데 이가환이 올린 글을 보면 자연과학 분야의 세세한 지식에 대해서까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이를 명쾌한 문장으로 논리 정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조가 그토록 칭찬하였던 이가환의 학문 역량과 문장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금대전책》은 우리가 이제껏 사서삼경이나 외우고 음풍농월이나 일삼던 것으로 알고 있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통상적인 인상을 완전히 깨뜨리는 책으로, 당시 지식인들의 독서량과 학문 역량을 새로이 보게 해 주는 책이다.

 




 

   《금대전책》에 담긴 세 편의 논 중, ‘소하대기미앙궁론’이 시작되는 부분. 중간 즈음 하단 여백과 함께 ‘소하대기미앙궁론(蕭何大起未央宮論)’이라 적었으며 그 아래 ‘삼상(三上)’이라고 대책이 받은 최고 점수를 밝히었다. 이는 한(漢)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을 지을 적에 작게 짓지 않고 성대하게 지은 이유에 대해 논한 것이다.








 

집필자

 

글.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문집번역실

1957년 충북 괴산 연풍에서 태어났다. 성관대학교 대학원에 문학 석사를 받았으며,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을 수료하였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 수석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의 번역에 참여하였다. 번역서로는 《해동역사》, 《백제사료집》, 《잠곡유고》, 《학봉전서》, 《청음집》, 《우복집》, 《삼탄집》, 《금대전책》 등 총 20여 종 80여 책이 있으며, 몇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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