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연행록(燕行錄) 청나라 연경을 다녀온 기록
연행록 , 여행기 , 강선 , 명나라 , 청나라 , 장계 , 사대교린
숙종(肅宗) 25년(1699) 11월 3일(丁酉)에 서울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숙종 26년(1700) 3월 20일(癸丑)에 귀환하여 복명한 사은 겸 동지사행의 부사(副使)로 정사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서장관으로 임명된 만휴정(晩休亭) 유명웅(兪命雄, 1653-1721)과 함께 중국의 연경을 다녀온 호조참판 강선(姜銑, 1645-?)의 사행기록 중의 하권에 속하는 불완전본이다.
《연행록(燕行錄)》은 호조 참판 강선 공이 숙종 25년 11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청나라 수도 연경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인 숙종 26년 3월 20일 귀국 , 대궐에 들어가 복명하기까지의 사행 기록이다. 일기체 여행기와 몇 편의 장계(狀啓)가 실려 있고, 강선 공이 지은 뜻글시(韓)·(漢詩)와 이를 정사, 서장관과 주고받으며 감상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행 기록을 통해 사대교린(事大交鄰)이라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 외교정책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대하는 조선의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도 엿볼 수 있다.

 
 
그림 1. 《연행록》 한貴古朝51-나182


시대에 따라 다른 사행 기록의 이름 

조선 시대의 대표적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鄰)이다. 이는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대등한 처지에서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 왕실은 스스로가 명(明)나라의 속국임을 명예로 알았기 때문에 ‘큰 나라 섬기기’ 외교는 한족(漢族) 주원장(朱元璋)(1328~1398)이 세운 명나라 섬기기와 동이족(東夷族) 누르하치(奴兒哈赤)(1559~1626)가 세운 청나라 섬기기라는 두 시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명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이루어진 사행 기록의 경우, 지은이 대부분이 스스로 명나라 천자에게 조회(朝會)하고 왔다는 뜻을 담아 《부경록(赴京錄)》, 《조천록(朝天錄)》, 《조천일기(朝天日記)》, 《조천일록(朝天日錄)》, 《황화일기(皇華日記)》 등의 이름을 붙였다. 반면,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지어진 사행 문학 작품들은 지은이 스스로가 조선은 문화 후진국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청나라의 천자보다는 청나라 수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으로 《북원록(北轅錄)》, 《심양일기(瀋陽日記)》,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 《유연록(輶燕錄)》, 《출강록(出彊錄)》 등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필자가 정리한 작품 210여 편 중에 조천록류가 60여 편, 연행록류가 150여 편 전해지고 있다. 
호조 참판 강선(姜銑)(1645~?) 공의 《연행록》은 숙종 25 년(1699년) 11월 3일(정유), 서울을 출발하여 청나라 수도 연경 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인 숙종 26년 3월 20일계축 귀국, 대궐에 들어가 복명(復命)하기까지의 사행 기록이다. 이 사행은 사은 겸 동지 사행이었으며, 그는 부사(副使)로서 당시 청나라 수도를 다녀왔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전반부가 결락 되어 불완전한 49장짜리 1책의 필사본이다. 당시 동행 한 정사는 왕족으로서 여러 차례 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1701) 공이고, 서장관은 집의(執義)였던 만휴정(晩休亭) 유명웅(兪命雄)(1653~1721) 공이다. 


강선, 12월부터 3월까지 청에 다녀오다 

이 책에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 땅으로 들어가 낭자산(狼子山)에 이르기까지의 앞부분, 즉 숙종 25년 11월 3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일정과 견문 에 관한 기록이 없고, 12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20일 서 울로 돌아와 복명하기까지 일기체 여행기와 몇 편의 장계(狀啓)가 실려 있다. 

《연행록》의 지은이와 지어진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필자가 이 책의 내용을 살펴 지은이를 동지 사행 의 부사로 동행하였던 강선 공임을 고증, 학계에 공개하였다. 강선 공의 본관은 진주이고, 현종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강백년(姜栢年)(1603~1681) 공의 아들이다. 자는 자화(子和)이고, 숙종 1년(1675년) 을묘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정언 등을 거쳐 숙종 6년 에 지평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남인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연루 되어 삭직(削職)되었다가, 숙종 15년 왕이 숙원 장씨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 함에 반대한 서인이 패배(기사환국)(己巳換局)하면서 다시 교리에 등용되어 판결사, 동부승지를 역임 하였다. 이후 숙종 20년 남인이 소론을 제거하려다 실패 (갑술옥사)(甲戌獄事)하여 다시 삭직되었다가 숙종 25년 재등용되어 형조판서, 호조참판, 승정원 도승지, 강원도 관찰사, 동지의금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특히 숙종 25년에는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사은 겸 동지 사행의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전반부 27일간의 기록이 누락된 《연행록》

《숙종실록》 권33, 숙종 25년 11월 3일(정유)조에서는 이 사행에 대한 기록이 있다. 


“(謝恩兼冬至正使東平君杭姜銑兪命雄等如淸國)
사은사 겸 동지사 동평군 항, 강선, 유명웅 등이 청국으로 갔다.” 



이를 통해 11월 3일, 강선 공 일행이 연경으로 출발했으나 《연행록》에는 12월 1일까지 약 27일간의 일과 노정이 결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연행록》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숙종 25년 11월 3일(정유)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1일까지의 일정과 노정은 결락되어 없다.


12월 2일(병인) 낭자산(狼子山) → 3일(정묘) 신요동(新遼東) → 5일 백탑보(白塔堡) → 심양(瀋陽) → 7일 변성(邊城) → 8일 백기보(白旗堡) → 10일 소흑산(小黑山) → 12일 십삼산(十三山) → 13일 대릉하大凌河 → 14일 연산역(連山驛) → 영원위(寧遠衛) → 15일 동관(東關) → 17일 강녀묘(姜女廟) → 산해관(山海關) → 18일 망해정(望海亭) → 20일 사하역(沙河驛) → 21일 마포영(馬鋪營) → 난주.(灤州) → 풍윤(豊潤) → 22일 고려포(高麗鋪) → 옥전(玉田) → 23일 송자성(宋子城) → 계주(薊州) → 독락사(獨樂寺) → 24일 방균점(方均店) → 호타하(滹沱河) → 삼하점(三河店) → 25일 통주(通州) → 26일 팔리보(八里堡) → 북경(北京) 도착

북경 도착 후에는 체포사(替捕司)에서, 2월 6일부터 귀국일까지는 옥하관(玉河館)에서 머물렀다.

29일 습의(習儀)(의식을 미리 익힘)를 함 → 30일 세찬상(歲饌床)을 받음 → 경진(숙종 26년) 정월 초 1일(을미) 새벽에 태화전(太和殿)에 들어가 인사함 → 11일(을사) 지금 황제의 숙모인 파림공주(坡臨公主)가 죽음 → 2월 6일 옥하관으로 옮김 →9일 하마연 참예 → 10일 상마연 참예

13일 귀국길에 올라 통주에서 잠 → 14일무인 삼하(三河) → 15일 계주 → 16일 옥전 → 17일 풍윤 → 18일 진자점(榛子店) → 사하역 → 19일 이제묘(夷齊廟) → 영평부 → 20일 무령현 → 21일 산해관 → 22일 양수하 → 23일 중후소 → 동관(東關) → 24일 영원위 → 25일 연산역 → 고교보(高橋堡) → 26일 십삼산 → 27일 북진보(北鎭堡) →28일 소흑산 → 29일 백기보 → 3월 초 1일 고가자(孤家子) → 2일 심양 → 3일 십리보 → 4일 요동(遼東) → 5일 낭자산(狼子山) → 6일 연산관(連山館) → 7일 통원보(通遠堡) → 8일 송참(松站) → 9일 봉황성(鳳凰城) → 10일 금석산(金石山) → 11일 도강(渡江) → 의주(義州) → 12일 철산(鐵山) → 13일 정주(定州) → 14일 안주(安州) → 15일 평양(平壤) → 16일 봉산(鳳山) → 17일 총수참(蔥秀站) → 18일 금천(金川) → 19일 파주(坡州) → 20일(계축)에 입경 복명함.




그림 2. 숙종 26년 12월 17일신사의 기록이 시작되는 부분. 
그 날의 날씨부터 먹은 음식, 머문 곳까지 잘 기록되어 있다 


《연행록》 말미에는 「기묘 십일월 이십오일 도강계문(己卯十一月二十五日 渡江啓聞)」, 「이십칠일 입책 장계(二十七日 入柵 狀啓)」, 「십이월 초칠일 심양장계(十二月 初七日 瀋陽狀啓)」, 「경진 이월 이십일일 도산해관장계(庚辰二月二十一日 到山海關狀啓)」, 「환도강장계(還渡江狀啓)」, 「동지부사위상고사(冬至副使爲相考事)」를 소개하고, 그 뒤에 일행 역원 중 군관들과 노자(奴子)와 대통관(大通官)과 차통관(次通官)의 이름들을 소개하고 있다. 
숙종 26년 12월 17일(왼쪽 하단)의 기록을 옮긴 이는 《(국역) 연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날이 음산하고 찬데 눈이 살짝 내렸다. 꼭두새벽 에 삼행이 함께 출발하여 전둔위(前屯衛)와 고령역(高靈驛)을 경유하여 40리 더 가서 중전소(中前所)에 도착 하여 소씨(蘇氏) 성의 사람 집에서 조반을 들었다. 서 장관과 함께 출발하여 망부석(望夫石)을 가서 보았다. 큰 바위 셋이 세 발 솥처럼 있는데 그 바위 아래에 절간을 만들고 금불(金佛)을 안치해 놓았다. 절 앞에 묘당(廟堂)을 지어놓고 흙으로 강녀(姜女)의 소상을 만들 어 탁자 위에 놓았다. 좌우에 각기 비석 둘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해놓았다. 문미門楣 좌우에는 “진 시황(秦始皇)은 지금 어디 있는가, 만리장성은 원한만 쌓은 것을. 강씨 여인은 죽지 않았으니, 천 년 지낸 조각난 돌이 아직도 꿋꿋하네. [(秦皇安在哉), (萬里長城築), (姜女下死也), (千年片石猶貞)]”라 적혀 있는데 송나라 때 의 재상 문천상(文天祥)의 필적이라 한다. 천 년이 지 난 후에도 섬뜩하여 사람의 모발이 곤두서게 하고 또 돌아보도록 한다. 전후좌우의 경치가 매우 산뜻하다. 앞으로 큰 바다를 마주하고 있고 또 구부정한 활이 책상 가까이 있는 듯한데, 만리장성이 바로 눈앞에 있어, 당시 남편을 기다리던 정렬(貞烈)의 기운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여기서 문미 좌우에 적힌 문구는, 범식(范植)이라는 사람이 만리장성 쌓는 일에 부역을 갔는데 그 아내 허맹 강(許孟姜)이 남편을 찾아 만리장성 아래까지 갔다가 그 곳에서 죽은 이야기에 대한 내용이다.


사행 기록 속 여러 편의 시 

《연행록》의 특징 중 하나는 강선 공이 거의 매일 뜻 글시를 지었으며, 이를 정사, 서장관과 주고받아 나누어 감상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강선 공의 시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년 공의 시운(詩韻)에 화답한 것이 가장 많았고, “삼가 경자년에 아버님께서 지으신 시에 답함(敬次庚子年家親韻)”, “삼가 아버님께서 지으신 시에 답 하여 지음(敬次家尊韻)”과 같이 아버지가 지은 뜻글시에 화답한 시 작품들도 몇 편 있었다. 여기서 ‘경자년’은 현종 1년(1660년)으로, 당시 예조 참판이었던 강선 공의 아버지 가 동지 사행 부사로 동행했었다. 
현재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뜻글시는 약 64수인데, 그중 동악 공의 시에 답한 작품이 23수나 된다. 




집필자

글. 최강현 한국기행문학연구소장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교산 허균(1569 ∼1618)이 쓴 중국기행문 《을 병조천록》을 발굴, 번역하는 등 허균의 인물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홍익대학교 문과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기행문학연구소장, 단제숭모회 회장을 맡고 있다.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