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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선비를 기다리며
세속의 정서로 말하자면 임금은 정말로 선비들을 미워할만하다. 선비들이 치도(治道)를 논할 때는 멀리 요순(堯舜)을 끌어대고, 간언을 할 때는 난처한 일로써 임금을 책망하고, 임금이 불러도 머물러주지 않고, 은총을 내려도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당세의 임금이 싫어할 바가 아니겠는가

“세속의 정서로 말하자면 임금은 정말로 선비들을 미워할만하다. 선비들이 치도(治道)를 논할 때는 멀리 요순(堯舜)을 끌어대고, 간언을 할 때는 난처한 일로써 임금을 책망하고, 임금이 불러도 머물러주지 않고, 은총을 내려도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당세의 임금이 싫어할 바가 아니겠는가.”
-『율곡전서(栗谷全書)』권6

 

그림1. ‘세찬 한파가 몰아친 연후에야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그를 늘 변함없이 공대하는 제자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그림1. ‘세찬 한파가 몰아친 연후에야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그를 늘 변함없이 공대하는 제자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 
 

 

직언과 받아쓰기

  선비는 죽음을 무릅쓴 곧은 말로 한 번 죽어 천년을 사는 지성이다. 율곡의 말처럼 임금이 벼슬을 내려도 곧잘 사양했다. 율곡은 24회를 거절했고 퇴계는 36회나 거절했다. 그렇다고 늘 거절만 했던 건 아니다. 필요할 때는 나아가서 행도(行道)했다. 이렇게 협조와 비판을 병행한 것이 정통파 선비들이 걸어온 바른 길이다. 
  오늘날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장관이 있을까?
  민주주의시대라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 분야에서는 대통령보다 더 전문가인 장관과 수석들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에 바쁘다면 문제가 있다. 왕이 만기를 친람하던 왕조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그 때문에 ‘한국문화대탐사팀’이 실시한 여론조사와 설문조사에서도 오늘날 장‧차관이나 정치인들 가운데는 선비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응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선비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그 이유로 ‘사회지도층과 지식인들의 부족한 인격수양’과 ‘엘리트층의 사리사욕 추구’를 꼽았다. 대기업 회장들이나 경제인들 역시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선비정신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나마 교수와 언론인, NGO 단체장이 선비정신을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다고 봤다. 권력비판과 사회통합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고위공직자, 그리고 경제인들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국민과 시민을 위해 그들 스스로 자기정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림 2. “조국의 국권침탈은 저에게 목숨을 보전할 어떤 명분도 앗아 갔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경술국치로 인한 극도의 수치심과 책임감으로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권총 자결한,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2. “조국의 국권침탈은 저에게 목숨을 보전할 어떤 명분도 앗아 갔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경술국치로 인한 극도의 수치심과 책임감으로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권총 자결한,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비정신은 분명 한국인의 소중한 문화 유전자다. 그런데 그 선비정신이 정작 필요한 때, 가령 조선말 개화기 무렵에는 전혀 사회적 기능을 하지 못했다. 선비들은 동서 문명교체기에 전통의 재발명과 선진 서구문명을 흡수할 줄 모르고 옛것만 고집하거나 기회주의자로 처신했다. 지조는커녕 친미파, 친러파, 친청파, 친일파로 나뉘어져 훼절하기에 바빴다. 일부 선비들이 자결하여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동력이 될 수는 없었다. 
  사회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은 선비정신의 몰락 원인으로 빈곤문제를 꼽는다. 일찍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오래 가난하면서 인의를 즐겨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행실(長貧賤 好語仁義 亦足羞也)”이라고 꼬집었다. 화식(貨殖)은 경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향신이나 영국의 젠트리 계급의 역할을 생각하면 기개에 그친 우리 선비정신의 한계를 실감한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던 선비들은 새로운 과학문명 세상에 적응할 능력이 없었다. 
  신분제도 역시 건강한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고용 노동제의 활성화는 자유 시장경제나 시민사회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데, 노비제도나 서얼차별 같은 전근대적 신분제도가 이를 가로 막았다. 농사짓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과 노비제도 혁파를 병행, 관철시키지 못한 실학(實學)은 요란한 구호에 그쳤다. 근대국가 형성기에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변혁에 따라 이미 기능을 상실한 주자학만 고집한 것도 몰락의 원인이었다. 
 

 


 

미래의 리더십과 새 선비상

  이런 냉정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선비정신이 지닌 긍정적인 미덕을 재발명해서 미래의 리더십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새 시대의 선비상(像)이 나온다.

 

그림 3. 『서유견문(西遊見聞)』. 조선 말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이 1895년(고종 32) 유럽을 순방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된 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림 3. 『서유견문西遊見聞』. 조선 말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이 1895년(고종 32) 유럽을 순방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된 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말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론(國民皆士論)을 제창했다. 교육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선비들로 전국에 사풍(士風)을 일으키고 국가의 제반 산업을 담당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방책이었다. 조선 선비들의 시무책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때를 놓쳐버리고 기울대로 기울어버린 나라에서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근대 서구사회에서는 재산에 기초한 시민이 탄생했다. 덕성에 기초한 조선의 선비는 망국의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상당한 국부를 축적했다. 그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선비의 덕성을 선택적으로 회복한다면 어떨까. 훌륭한 세계 교양시민이 될 것이다.

 


 

선비정신과 교사

  맹자는 군자3락(君子三樂)을 꼽으면서 왕 노릇하는 것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제는 평범한 직업군이 되어버렸지만 50만 명에 육박한다는 대한민국의 교사들은 분명 학생들의 본보기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어느 정도 자기 수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옛 선비처럼 엄격한 수양을 주문하는 건 아니다. 퇴계 이황이나 이사주당 같은 사표를 우러러볼 줄만 알아도 다행이다. 
 

그림 4.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과 제자 가운데 한 전형으로 인정받는, 다석 유영모(1890~1981년, 왼쪽)와 바보새 함석헌(1901~1989년, 오른쪽). 동양사상과 서구의 기독교 정신을 창조적으로 융합해 독특한 한국적 영성을 꽃피운 한국철학가들이다.

그림 4.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과 제자 가운데 한 전형으로 인정받는, 다석 유영모(1890~1981년, 왼쪽)와 바보새 함석헌(1901~1989년, 오른쪽). 동양사상과 서구의 기독교 정신을 창조적으로 융합해 독특한 한국적 영성을 꽃피운 한국철학가들이다.

 


 

선비정신과 공직자

 

그림 2. 표지판

  숭례문 부실복원이나 세월호 사태, 방위산업 비리에서 확인한 것처럼 한국사회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다. 거기에 공직자들의 부패가 작동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수령 방백의 부패로 인해 민생이 황패해지는 것을 개탄하고 그 극복책을 제시했다. 그는 청렴(淸廉)과 절검(節儉)을 관리의 핵심적 도덕률이자 생활신조로 꼽았다. 오늘날 선비형 공직자가 얼마나 될까. 맹자는 순임금을 예로 들며 ‘사기종인(舍己從人)하라’고 가르쳤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는 미덕이다.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 공직자’라는 자조의 말처럼 공무원들은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이전까지와 정반대로 뒤바뀌어도 묵묵히 따라야만 한다. 그럴 때 소신을 가지고 과거의 정책을 밀어붙이기란 쉽지가 않다. 다만 정책을 돌변할 때 생기는 폐단과 피해를 들어 조정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공직자가 나라와 국민이 아니라 부처의 장이나 최고의사결정권자의 눈치만 본다면 선비정신은 너무 멀어진다. 

 


 

선비정신과 기업인

  선비다운 기업인을 유상(儒商)이라고 한다. 일반 장사꾼은 돈만 보지만 유상은 이익을 보면 의리를 따진다. 견리사의(見利思義) 선비정신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경제는 경세제민의 약자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았다. 경제인들은 사업을 일으켜 공동체 생활을 도모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회공헌자다. 기업은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지만 그래도 고용을 창출하기 때문에 사회에 유익하다고 한다. 옳은 말이지만 그러나 부의 편중으로 격차가 심화되고 사회빈곤층 문제가 대두되었다면 아야기가 달라진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불과 250년이지만 유교의 역사는 2500년이나 되었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드러난 이상 그 보완책이 필요하다. 공자나 사마천의 무위이치(無爲而治) 사상은 17세기에 유럽으로 전해져 시장경제의 원리가 되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성리학과 달리, 공자철학은 아직까지도 유용하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공자가 말하는 지도층의 책무를 자본가들은 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니, 안중에도 없다. 이제 기업은 이익추구만이 아니라 도덕적 책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선비정신과 대학생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왕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림 6. 성균관 유생 체험하는  대학학생들.

그림 6. 성균관 유생 체험하는 대학학생들.

  1520년 중종 14년 11월 성균관 유생 150여명이 대궐문을 밀고 들어가 농성했다. 개혁파인 조광조를 숙청하지 말라는 시위였다. 절대 왕조시대에도 유생들에게 언로를 열어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생들이 청와대로 진입해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친 셈이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경찰과 경호원들이 차단하고 말기 때문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농성 방법도 과격했다. 유생들이 연명(連名)해 상소를 올렸다. 유소(儒疏)다. 유소가 통하지 않을 땐 권당(捲堂)을 썼다. 권당은 유생들이 성균관 진사 식당에 들어가지 않거나 성균관을 비워 두고 나가는 행동이다. 단식 투쟁과 동맹 휴업이다. 
  조선시대 얘기만도 아니다. 민주화 시기, 대학생들은 의로운 항쟁으로 민주화를 앞당겼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68혁명은 드골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고 중국의 5.4운동은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이 됐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과거 유생들의 유소나 권당을 배우라는 게 아니다. 취업이나 자기문제에만 갇혀 살지 말고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는 옛 선비들의 얼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선비정신과 종교인

  종교인은 세속사람들에게 성인의 거룩한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회의 치유제요 청량제다. 세상의 빛과 소금 노릇을 하는 성직자다. 그들은 고통스런 중생의 삶을 구제하겠다는 용맹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중생이 오히려 종교인들의 뒤틀린 삶을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세속인을 능가하는 탐욕과 종교전쟁, 테러는 세상의 근심과 재앙이다. 
  한국문화대탐사를 하면서 만난 종교인들은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강원룡 목사 같은 분들이야말로 종교계의 선비였다고 입을 모았다. 역사인물 가운데는 원효 성사, 의천 스님도 선비였다고 꼽았다. 
  급속한 세속화로 종파 문제 자체만으로도 허덕이고 있는 종교계가 선비정신으로 거듭날 때, 그 종파도 세상도 맑아질 것이다. 
 

그림 7. 종교인들이 뽑은 종교계의 선비. (왼쪽부터) ‘무소유’를 설파한 법정 스님(1932~2010), 교회와 사회의 '인간화'를 위해 애쓴 강원룡 목사(1917~2006), 명동성당을 ‘민주화 성지’로 만든 김수환 추기경(1922∼2009).

그림 7. 종교인들이 뽑은 종교계의 선비. (왼쪽부터) ‘무소유’를 설파한 법정 스님(1932~2010), 교회와 사회의 '인간화'를 위해 애쓴 강원룡 목사(1917~2006), 명  동성당을 ‘민주화 성지’로 만든 김수환 추기경(1922∼2009). 

  미래학자인 허먼 칸(Herman Kahn, 1922~1983)은 1968년에 발간한 『미래의 체험』에서 21세기에는 유교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서구 자본주의를 대신할 거라고 예언한 바 있다. 앞으로는 교육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 가족과 향토를 소중히 여기는 대가족 문화, 신뢰와 예의를 바탕으로 한 전통사회, 윤리를 중시하는 집단적 국가의식이 중시될 거라는 게 허먼 칸의 예측이었다. 문제는 정작 우리들 자신이 그런 전통적인 미덕을 대부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선비정신을 주목하고 시대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이유다. 
  선비정신과 미래의 리더십, 새 선비상은 어느 특정 단체나 개인의 연구사항이 될 수 없다. 함부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당대 지성의 총체가 국운(國運)이라는 말이 맞다면, 그리고 한낱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정신문화유산이라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서 대안으로 키워가야 한다. 선비정신을 다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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