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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고 철학논변 못할소냐 : 임윤지당(1721~1793)
여성선비 , 임윤지당 , 철학
윤지당은 강원도 원주에서 임적의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리학자 임성주와 임정주의 여동생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 임성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윤지당이라는 당호도 임성주가 지어준 것이다. 형제들이 홀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경전과 역사책을 공부하고 토론했는데, 윤지당의 논평은 모두를 놀라게 할 때가 많았다.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문예부흥기라고 부른다. 동서양 철학교류사에 정통한 황태연 교수는 당시 조선은 세계 최고수준의 문화를 꽃피웠고 사회 전면적 교육복지가 시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생산력 증가와 생활수준 향상이 문화융성을 불러왔는데 당연히 여성들의 책읽기도 활발해졌다. 국가정책으로 한글 번역판 여성 수신서(修身書)가 보급된 것도 크게 한 몫 했다. 
  여성들의 책읽기는 의식을 변화시켰다. 여성학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셈이다. 사대부 집안 여성들은 어렸을 때, 남자형제들과 같이 공부하곤 했는데 임윤지당은 훗날 대학자가 되는 둘째오빠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에게 글을 배웠다. 
 

 

“어릴 적부터 성리학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었다. 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자 조금 말을 할 만한 식견이 생기게 되었다”
 

 

-『윤지당유고』 「문초등송계상시단인(文草謄送溪上時短引)」 
 

 

                                                                              그림 1.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윤지당 임씨의 문집 『윤지당유고』. 윤지당 임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에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었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했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림 1.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윤지당 임씨의 문집 『윤지당고』. 윤지당 임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에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었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했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유년시절부터 입이 고기 맛을 즐기듯 호학했음을 알 수 있다. 소녀가 까다로운 성리학에 그토록 흥미를 붙였다면 그만큼 철학적 소양을 타고났다고 봐야 옳다. 성리학이라는 게 갖가지 용어의 개념파악조차 힘들어, 최소한 십년 이상은 붙들고 매달려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논설을 지을 정도가 되려면 수십 년의 내공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내가 비록 부녀자이기는 하지만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 사이에 다름이 없다. 비록 안연(顔淵, 공자의 애제자)이 배운 것을 능히 따라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성인을 사모하는 뜻은 매우 간절하다.”
 

 

-『윤지당유고』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공부에 남녀차별을 둠이 옳지 않음을 드러낸 논설이다. 그는 이 논설을 통해서, 인간의 선한 본성을 어지럽히는 외부의 자극 대처법을 명쾌하게 일러준다. 뜻을 세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노라고. 

  윤지당은 강원도 원주에서 임적의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리학자 임성주와 임정주의 여동생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 임성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윤지당이라는 당호도 임성주가 지어준 것이다. 형제들이 홀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경전과 역사책을 공부하고 토론했는데, 윤지당의 논평은 모두를 놀라게 할 때가 많았다. 고금의 인물과 정치의 잘잘못을 한 마디로 결단했는데 사리에 착착 들어맞아, 오빠들이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여성이 해야 할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의 학식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림 2. 강원도 원주 여성가족공원 내에 2015년 10월 30일 개관한 ‘임윤지당 선양관’(위)과 선양관 내에 꾸며진 규방(아래).

그림 2. 강원도 원주 여성가족공원 내에 2015년 10월 30일 개관한 ‘임윤지당 선양관’(위)과 선양관 내에 꾸며진 규방(아래).

 

  19세(1739) 때 강원도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혼인했다. 하지만 27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남편의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한 집에서 봉양하며 부인의 덕성을 잃지 않았다. 평소 책을 가까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일상생활의 대화에서도 문장에 관해 말하는 일없이 오직 부인의 직분에만 힘썼다. 멀리 가 있는 시동생에게 소식을 전할 때도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써서 보냈다. 경학에 대한 식견을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시부모가 모두 돌아가고 본인이 늙었을 때에야 비로소 학문에 매진했다. 집안 일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보자기에 싸 두었던 경전을 펴놓고 낮은 목소리로 읽곤 했다. 이렇게 자신의 학식을 감추었기 때문에 친척들 중에서도 그의 박식함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단정하고 조신했으나 삶은 순탄치가 못했다. 난산 끝에 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었고 이어서 남편이 죽었다. 시동생의 큰아들 재준(在竣)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마저도 28세로 세상을 버렸다. 게다가 그 이듬해 아버지처럼 존경하던 친정오빠 녹문 임성주까지 잇달아 죽자, 제문에 “오장이 무너져 찢어질 것만 같고, 피가 솟아 얼굴에 덮어쓸 것만 같다”고 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타고난 운명이 기이하게도 박복하다. 이른바 네 부류의 불쌍한 사람인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노인) 중에서 세 가지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앞으로 바라보고 뒤로 돌아보아도 스스로 위로할 것이 없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나와 같이 박복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 『윤지당유고』 「인잠(忍箴)」.

 

                    

                                                                    그림 3. 「배송중씨남귀서(拜送仲氏南歸序)」. 함께 살던 둘째오빠 임성주가 공주(公州) 녹문(鹿門)으로 옮겨가자 그를 그리워하며 보낸 윤지당의 친필 편지. 학문적 동지일 뿐만 아니라 우애가 깊었던 형제간의 애틋한 그리움과 존경이 잘 묻어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여자가 시집을 가면 부모형제를 멀리 떠나나 정(情)으로는 멀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그리워하면서 모두 백발이 되었고 …저는 오로지 형제간에 사랑하는 실천뿐만 아니라 둘째 오빠의 거룩하신 덕(德)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마음속에 간절합니다.”

그림 3. 「배송중씨남귀서(拜送仲氏南歸序)」. 함께 살던 둘째오빠 임성주가 공주(公州) 녹문(鹿門)으로 옮겨가자 그를 그리워하며 보낸 윤지당의 친필 편지. 학문적 동지일 뿐만 아니라 우애가 깊었던 형제간의 애틋한 그리움과 존경이 잘 묻어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여자가 시집을 가면 부모형제를 멀리 떠나나 정(情)으로는 멀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그리워하면서 모두 백발이 되었고 …저는 오로지 형제간에 사랑하는 실천뿐만 아니라 둘째 오빠의 거룩하신 덕(德)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마음속에 간절합니다.” 
 

  윤지당은 이런 불행을 학문으로 승화시킨다. 사람이 귀한 것은 삼강오륜 때문이라며 남녀는 차별이 있는 게 아니라 역할분담이 다를 뿐이라고 봤다. 그의 남동생 임정주는 “누님 같은 사람은 진실로 규중(閨中)의 도학(道學)이오, 여인들 중의 군자라 할만하다.”고 했다. 
  여성 성리학자 윤지당은 종부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살았다. 두 시동생 식구들까지 한 집에서 거느리고 살며 종가의 큰살림을 관장하는 틈틈이 공부하고 저술했다. 오늘날로 치면 직장 다니고 공부해서 학위까지 따낸 커리어 우먼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의 인품과 덕성은 보통의 커리어 우먼이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그가 저술한 『윤지당유고』에는 2편의 여성인물전, 6편의 논설, 2편의 경의(經義), 11편의 역사인물론, 3편의 제문이 실려 있다.

 

                                                    그림 4. 뛰어난 여성 성리학자였음에도 쓸쓸히 잊혀져간 윤지당 임씨. 원주에 있는 그의 자취는 ‘임윤주당길’이라는 좁고 초라한 골목의 이름으로 남아있다(왼쪽). 윤지당 임씨의 것으로 추정하는 초라한 무덤(오른쪽).

그림 4. 뛰어난 여성 성리학자였음에도 쓸쓸히 잊혀져간 윤지당 임씨. 원주에 있는 그의 자취는 ‘임윤주당길’이라는 좁고 초라한 골목의 이름으로 남아있다(왼쪽). l 윤지당 임씨의 것으로 추정하는 초라한 무덤(오른쪽).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그를 문화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그때 선보인 초상화는 좀 엉뚱해서 고증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았던 원주시 봉산동에는 원주 경찰서에서부터 비좁고 초라한 골목으로 이어지는 ‘임윤지당길’이 있다. 봉산동 작은 공원에 세운 기념비에는 그가 짓고 수시로 마음을 다잡은 비검명(匕劍銘)이 새겨져 있다. 그중 한 대목을 보자. 
 

 

힘내라 칼이여勖哉匕劍
나는 아녀자가 아니다無我婦人
너의 날카로움 드높이라愈勵爾銳
숫돌에 새로 간 듯이若侀新發 

 

  용맹한 문장이다. 온화한 인품의 내면에서 카랑카랑한 선비의 기상이 뿜어 나온다. 이쯤이면 어찌 규방의 아녀자만이겠는가. 종가가 아니라 국사를 맡겨도 능히 처리할 그릇이다.

 

                                                             그림 5. 2008년 11월, 봉산동 새마을공원에 세워진 ‘임윤지당 기념비’ 정면 모습과 그 뒷면에 새겨진 비검명(匕劍銘.)

그림 5. 2008년 11월, 봉산동 새마을공원에 세워진 ‘임윤지당 기념비’ 정면 모습과 그 뒷면에 새겨진 비검명(匕劍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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