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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과 택지의 대량공급 기반 마련(1970~1980년대)
대량공급 , 주택건설촉진법
1972년 유신개혁 직후 비상 국무회의는 250만 호 주택건설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76년까지 100만 호, 1977년부터 1981년까지 150만 호를 각각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이 250만 호 중에서 1,108,500호는 공공자금의 지원으로 건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연간 건설량을 이전보다 배로 늘리는 셈이었고, 공공주택 공급량을 전체 공급량의 44%까지 계획한 것은 1960년대의 공공주택건설 비율이 12.6%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야심적인 계획으로 정부가 주택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주택건설촉진법의 제정 

1972년 유신개혁 직후 비상 국무회의는 250만 호 주택건설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76년까지 100만 호, 1977년부터 1981년까지 150만 호를 각각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이 250만 호 중에서 1,108,500호는 공공자금의 지원으로 건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연간 건설량을 이전보다 배로 늘리는 셈이었고, 공공주택 공급량을 전체 공급량의 44%까지 계획한 것은 1960년대의 공공주택건설 비율이 12.6%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야심적인 계획으로 정부가 주택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변화와 주택공급 확대에 대한 정치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분배가능한 공공자원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특히 공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던 1970년대에는 주택부문에 대한 지원을 전적으로 공공에 의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민간부문을 더 체계적으로 동원하여 주택건설을 촉진하고, 또 건설된 주택들이 사회적 주택소요에 최대한 부응하도록 그 배분과정을 더 정교하게 관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비상 국무회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써 250만호 건설계획의 수립과 함께 1972년 12월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주택은 물론 공공자금의 지원을 받는 민간주택에 대해서도 개발계획, 시공계획 및 분양까지 관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이전의 공영주택법과 크게 다른 점은 공영주택법은 지방자치단체나 주택공사가 건설하는 공영주택의 건설, 공급, 관리에만 적용되었고, 공공주택 또한 지방자치단체나 주택공사만 건립할 수 있었다. 주택건설촉진법은 일반 사업자들이 건설하는 주택에 대해서도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함으로써 입주자 선정 등 분양방법, 주택의 관리까지 정부가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정부는 민간부문에 의한 주택건설 및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특히 대형 민간건설업체들로 하여금 주택개발에 참여하도록 다양한 유인책을 제공하였다.

 

우선 1970년대 초 경제성장이 둔화되었을 때 정부는 경제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큰 건설업체들로 하여금 주택개발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다. 1973년 공포한 특정지구개발촉진법이 그 예이다. 이 법에 의해 국민주택개발촉진지역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주택건설과 토지거래에 관련된 모든 세금이 3년간 면제되었다. 이는 서울의 여의도 및 뒤이은 영동지구 개발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큰 건설업체들이 특히 주택건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주택전문의 대형 민간개발업체들을 육성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로 1977년 12월 정부는 주택개발업체 등록 제도를 도입했다. 1977년과 1978년의 개발붐 시기에 주택의 부실시공, 주택규모나 시설에 대한 과장광고 등 일부 주택업자들의 파행적 행태가 사회적물의를 야기했는데 업체등록제도는 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개발업체는 등록을 하기 위해서 자본의 규모, 자격 있는 기술자 확보, 연간 건설량 등에 있어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 등록업체 중에서 다시 자본, 기술, 연간 건설량 등이 상위 수준에 있는 업체들은 지정업체로 지정되었다. 일정수준 이상의 자격을 갖춘 지정업체들에게는 토지수용법의 준용 또는 아파트 지구제도 등의 개발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지원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이들에게는 세제와 금융 면에서도 인센티브를 주게 되는데, 건설업체가 이러한 인센티브를 받는 대신에 건설하는 주택의 일정부분을 임대주택이나 소형주택으로 짓도록 의무화하는 등 정부 정책의 일정부문을 수행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75년 5월 최초로 46개의 업체가 지정업체로 지정되었다.

 

주택건설촉진법 제정 이후 공공주택은 그 사용자금의 출처에 따라 국민주택과 민영주택으로 나누어진다. 공공주택자금은 국민주택자금과 민영주택자금으로 나누어지는데, 국민주택자금은 건설부의 직접 관장 아래 공공개발기관과 일정한 자격을 갖춘 민간개발자에게 최장 20년 간 유리한 이자율로 제공되었다. 민영주택자금은 주택은행이 관장하여 주로 민간개발업체들에게 융자되었다.

 

국민주택자금을 사용한 주택은 국민주택, 민영주택자금으로 건설된 주택은 민영주택으로 불리며 모두 공공주택에 속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공공주택은 그 계획, 시공, 분양에 있어서 주택촉진법이 정하는 규정에 따르도록 되었다. 또 한 사업지구에 50호 이상 (1982년 이후는 20호) 건설하는 민간개발의 경우에도 같은 규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민간자금에 의존하면서도 행정규제를 통해 주택이 저소득층으로 배분되도록 하려는 공급체제가 확고하게 구축되는데, 1961년 5월의 군사혁명 후부터 정부가 자원을 공업개발에 집중시키기 위해 취한 통제금융정책은 이 민간부문 주도의 주택시장에 다음과 같이 다중적 파급효과를 미치게 된다.

 

첫째, 정부재정은 물론, 제도권 금융으로부터의 주택자금 융자가 제한되고, 둘째, 통제금융의 강화로 가계에 대해서는 낮은 예금 금리와 높은 대출 금리를 적용하는 대신 산업자금에 대해서는 낮은 대출 금리를 적용하는 금리의 이중구조가 형성되어 여유자금이나 가계자금이 사 금융시장(私金融市場)으로 유입되도록 했으며, 사채시장의 팽창을 가져오게 된다. 사람들의 저축은 은행이나 기타 정부통제하의 금융기관들이 제공하는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주는 이 사 금융시장으로 몰렸다. 정부의 관리권 밖에서 사 금융시장, 부동산시장 및 증권시장을 떠도는 이 화폐자본이 이른바 ‘부동자금’이다. 셋째, 주택개발은 장기저리 융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체자금조달 방식, 즉 자체 개발이익으로 개발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의 시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넷째, 정부통제 하의제도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자체자금조달’이라는 것은 주택개발이 결국 일반 가계저축이나 사채시장의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됨을 뜻했다. 즉 주택개발이 경기변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투기자금의 유통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는 투기성자금의 유입을 억제하거나 완화함으로써 주택건설을 촉진하거나 억제하게 되고, 따라서 주택공급정책은 경기대책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게 된다.

 

한편 1962년 군사정부가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했을 때, 주택공사와 정부의 관련 공무원들 사이에는 ‘저렴한 대량생산기술에 의한 주택공급의 확대’가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아파트는 토지비용을 줄일 수 있고, 또 표준화, 기계화된 건축기술을 적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주택유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주택공사는 아파트 건설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시도 1960년대 말부터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기 시작했는데, 특히 도심 재개발에 따른 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말까지 건설된 아파트는 호화아파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9년 전국적으로 아파트는 750동, 34,331호가 있었다. 이 중에서 480동은 서울시가, 68동은 주택공사가, 44동은 내무부가 각각 지은 것이었다. 시민 아파트는 규모가 작았고 질적 수준도 낮았다. 서울시는 골조와 주요설비만 공급하고 내부 마감은 입주자들이 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호당 면적은 8평이었고 창고와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택공사가 지은 저소득층 아파트는 규모 면이나 시설면에서 이보다 약간 나았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아파트에 대해서는 한 때 ‘저소득층 주택’ 또는 ‘질낮은 주택’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960대 말 공공개발기관들이 늘어나고 있는 신(新)중간층의 주택수요에 부응하여 더 크고 품질도 나은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아파트개발 패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중·고소득층 가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아파트는 저소득층 주택이라는 이미지가 불식되고 이 회사들이 지은 아파트 단지는 신 중간층이 선망하는 주택지로 등장했다.

 

1970년대에 공공부문의 주택투자와 주택건설은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공공부문 주택투자는1960년대 전반에는 전체 주택투자의 10% 미만 수준에 머물었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20~30%까지 증가했다. 대한주택공사도 자본금이 늘어나면서 연간 건설량을 대폭 증가시켰다. 주택공사의 연간 건설량은 1972년의 2,286호에서 1978년에는 27,840호로 10배 이상으로 급증되었다.

 


 

참고문헌

공동주택연구회. 1999.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 세진사.
구본호·이규억. 1991. 「한국경제의 역사적 조명」. 한국개발연구원.
권영덕. 1999.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대한 평가분석과 개선방안」.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국토개발연구원. 1981a. 「주택자료편람」. 국토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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