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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반주자학자의 88세 고종명 : 실용(實用) - 정제두 (1649~1736)
정제두 , 실용 , 양명학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용기 있는 선비였다. 그는 주자학자로 살다가 34세 때, 홀연히 양명학자임을 밝혔다. 당연히 스승 박세채와 동료들에게 배척당했다. 하지만 행정능력이 탁월해 영조에게 중용되었다가 노년에 강화도 하곡에 은거하며 양명학을 연구한다. 강화학파가 그렇게 창시된다.

                                                                                                       그림 1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오직 주자의 설과 사상만이 전범이 될 뿐 그와 다른 설이나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대부분의 학자들을 주자주의자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조선의 유학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子)’자를 붙여서 송자(宋子)로 불린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대표적인 주자주의자였다. 그는 주자에 반하는 학설을 한 마디라도 제기하면, 즉시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다. 경전에 주자의 주석과 다른 자기 견해를 덧붙인 윤휴(1616~1680), 박세당(1629~1703) 등이 이단으로 몰렸다. 역사평론가 한정주는 이런 풍조를, 그리스 신화의 악당 프로크루테스(Prokrustes)의 침대에 비겼는데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경직된 사고를 예증하는 사례다. 나중에 18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북학파와 서학의 등장으로 주자학 일변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유교개혁을 제창한 한말의 유학자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1909년에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한다. 그는 인민사회에 대한 관심 부족, 구세주의(救世主義)의 부족, 그리고 주자학 숭상을 유교의 3대 문제로 들었다. 한 마디로 세상물정에 어두운 채 주자학만 붙든 게 병폐였다는 진단이다. 
  그런 면에서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용기 있는 선비였다. 그는 주자학자로 살다가 34세 때, 홀연히 양명학자임을 밝혔다. 당연히 스승 박세채와 동료들에게 배척당했다. 하지만 행정능력이 탁월해 영조에게 중용되었다가 노년에 강화도 하곡에 은거하며 양명학을 연구한다. 강화학파가 그렇게 창시된다.

 

 

                                                                      그림 2.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정제두의 묘.

그림 2.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정제두의 묘. 

 

  양명학이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됐던 걸까. 
  주자는 인간의 마음[心] 안에 성(性)과 정(情)이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 오직 성(性)만이 진리, 곧 이(理)가 되므로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그래서 성리학이다. 그런데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수인(1472~1528, 중국 명나라)은 그렇게 복잡하게 나눌 필요가 없이 심이 곧 진리라며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다. 따라서 수양론도 간단하다. 맹자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배우지 않고도 잘 알며 잘 할 수 있는 양지양능(良知良能)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걸 다하면 되지, 굳이 주자학처럼 어려운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의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과 흡사하다. 
  일찍이 퇴계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나 정자의 본지와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양명이 감히 제멋대로 선유(先儒)의 정론을 배척하고 함부로 비슷한 학설을 끌어다 견강부회하여 꺼림이 없으니, 그 학문의 어긋남과 마음의 병통을 알 수 있다.

 

 

-『퇴계집(退溪集)』,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 

 

  양명학도 주자학처럼 유학에서 나왔다. 주자학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여긴다면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정제두는 독선적인 성리학들처럼 그렇게 경직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 
 

 

다 같이 성인의 학문을 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후세에 배우는 이들은 그 근본을 잃어버렸으니 오늘날의 학설에 이르러서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가장하는 것이요, 주자를 가장할 뿐만이 아니라 바로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자기 뜻을 이루고 주자를 끼고 위엄을 만들어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루고자 한다.

 

 

-『하곡집(霞谷集)』, 「存言」

 

 

  주자의 권위에만 가탁하는 성리학자들의 병폐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정제두는 ‘벼슬에 나아가서는 영화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물러나서는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進不近榮 退不近名)’고 한다. 그래서 반주자학자로 88세까지 살면서 고종명할 수 있었다.

 

                                                                              그림 3. 『근묵』에 들은 정제두의 간찰. 진강(鎭江)의 민(民) 정제두가 성주(城主)에게 얼음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 3. 『근묵』에 들은 정제두의 간찰. 진강(鎭江)의 민(民) 정제두가 성주(城主)에게 얼음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혁명가 허균은 “소통하면 아프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면 아프다(通卽不痛하고 不通卽痛)”고 했다. 기득권 논리에 갇힌 조선 성리학자들은 좀처럼 다른 견해를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1622~1673)의 여러 혁신적인 제도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이 보다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면, 누차 지적하듯이 개화기 동서 문명교체기에 그처럼 무능하게 무너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성리학 자체적으로는 격동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름뿐인 실학도, 막연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도, 뒤늦은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도 근대 국민국가 형성에는 별 효력이 없었다.

 

 

관련콘텐츠

 

『하곡 정제두』

『박은식전서 세트』

『한국 철학사』

『허균 평전』

『한국철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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