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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던 바보, 임금의 총애를 받다 : 독서(讀書) - 이덕무(1741~1793)
이덕무 , 정조 , 청장관전서
이덕무(李德懋)는 정조 때 서자 출신 규장각 4검서관(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이수)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다. 그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소년시절부터 간서치(看書痴)라는 호를 썼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었다. 오죽 책벌레였으면 그런 호를 지었겠나 싶다. 이덕무는 남루한 삶을 살았다. 저녁때거리가 없어 굶은 적도 있고 한 겨울에 방구들을 덥히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도 어김없이 책을 읽었다.

그림 1. 규장각 4검서관의 시들이 실린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1777년 청나라에서 간행되어 이덕무의 이름을 중국 시단에까지 알리게 되었다.

그림 1. 규장각 4검서관의 시들이 실린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1777년 청나라에서 간행되어 이덕무의 이름을 중국 시단에까지 알리게 되었다.


 

  선비는 독서인이다. 독서는 선비의 기본 덕목이 된다. 따라서 독서하지 않는 선비는 있을 수 없다. 선비의 방에는 으레 책이 놓인 책상이 있고 책을 쌓아두는 책갑과 문방사우가 있다. 책은 선비들이 제일로 아끼는 귀중품이다. 책 속에 성현의 길이 있고 벼슬길도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정조 때 서자 출신 규장각 4검서관(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이수)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다. 그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소년시절부터 간서치(看書痴)라는 호를 썼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었다. 오죽 책벌레였으면 그런 호를 지었겠나 싶다. 이덕무는 남루한 삶을 살았다. 저녁때거리가 없어 굶은 적도 있고 한 겨울에 방구들을 덥히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도 어김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독서의 네 가지 유익한 점을 글로 짓는다.

 

 

첫째, 배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두 배는 낭랑해져서,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흐르고 돌아 몸속이 편안해지니 추위를 잊기에 충분하다. 셋째, 이런저런 근심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이 글자에만 쏠려 마음이 이치와 하나가 된다. 넷째, 병으로 기침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시원스레 통해 아무 걸림이 없어져서 기침소리도 문득 멎는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그림 2. 이덕무가 저술한 모든 글을 모은 총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림 2. 이덕무가 저술한 모든 글을 모은 총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서자 출신에다 가난하기까지 한 그가 배고픔을 이겨낼 길은 오직 독서뿐이었다. 눈물겨운 가난이자 글공부다. 그에게 책은 밥이었다. 난로였고 신경안정제였으며 기침약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지만 그 시절엔 그런 일자리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마흔한 살에 그를 알아보는 임금을 만났다. 바로 정조였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탐독(耽讀) 덕분이었다. 책을 많이 읽은 이덕무는 글도 잘 지었다. 일찍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하고 활동했다. 백탑은 원각사 10층 석탑으로 지금은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 있다. 그들이 백탑 주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덕무는 정조임금이 마련한 시회에서 두 번이나 장원을 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에 어필로 ‘아(雅)’ 자를 썼다. 이덕무는 이 영광스런 임금님의 호평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호를 아정(雅亭)으로 고쳤다. 이쯤 되면 북송(北宋) 때 진종(眞宗, 968~1022) 황제는 권학문(勸學文)이 생각난다. 진종황제는 독서를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예찬했다. 
 

 

집을 부유하게하려고 좋은 밭을 사는 건 소용없다. 
책 속에 큰 재물이 있다. 
편하게 살려고 큰 집을 짓지 마라. 
책 속에 금으로 장식한 집이 있다. 
문을 나설 때 따르는 사람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 속에 수레와 말이 떼 지어 있다. 
장가들 때 좋은 중매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 속에 옥 같이 고운 미인이 있다.

 

 

  이 권학문에서 책은 더 이상 글씨 써진 종이 묶음이 아니다. 로또요 도깨비방망이다. 책만 펼치면 돈이고 아파트고 자동차고 미인이고 다 쏟아져 나온다. 학창시절 『고문진보(古文眞寶)』 앞장에 나온 이 시를 접하고 가슴이 설렌 경험이 있을 것이다. 워낙 많이 읽히는 이 시문에 독서의 실용적인 효과를 과장해놓고 있어서 순수 인문학 공부보다 고시공부에 더 매달리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 3. 정조 때 규장각의 첫 검서관이었던 이덕무는 오늘날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다. 왼쪽 사진은 규장각 내부 전경이다. 이덕무를 비롯한 ‘4검서관’은 이곳을 드나들며 책을 정리하고 읽었을 것이다. 오른쪽은 김홍도의 1776년 「규장각도」 중 일부.

그림 3. 정조 때 규장각의 첫 검서관이었던 이덕무는 오늘날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다.
왼쪽 사진은 규장각 내부 전경이다. 이덕무를 비롯한 ‘4검서관’은 이곳을 드나들며 책을 정리하고 읽었을 것이다.
오른쪽은 김홍도의 1776년 「규장각도」 중 일부.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임금의 총애를 받지만 이덕무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 결코 미덕일 수는 없지만 이덕무의 가난에는 남다른 철학이 있다. 

 

최상급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하급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겨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급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 죽어간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원망하고 한탄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만일 가난을 잊어버리거나 편안히 여기며 살 수 있다면 그는 도인이다. 아니,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고 그의 가족들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다. 집에서 바가지를 안 긁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의 경우는 다르다. 그에게는 행복한 책읽기가 있다. 밥도 되고 난로도 되고 약도 되는 책이 있다. 실제로 그는 책 읽기로 죽을 때까지 벼슬살이를 했다. 덕분에 출사한 마흔한 살 이후로는 밥은 굶지 않게 됐다. 뿐인가. 고관대작들처럼 별장 같은 없었지만 여행할 때, 마부 딸린 말쯤은 타고 다닐 수 있었다.

 

 

비낀 달은 처마 밑으로 제비집을 기웃기웃
마구간 얼룩말은 꼴 먹느라 어적어적
선잠 깬 마부 녀석은 너무 이르다며 투덜투덜
임진강에 이르면 해가 열댓 발은 올랐을 거라나.

 

斜月來窺燕子巢
虛牕秣馬聽蕭蕭
僕夫睡罷朦朧語
也到臨津紅日高

 

-「이른 새벽에 파주를 떠나려니早發坡州」


 

그림 4. 「나귀를 탄 선비(停驂問畫圖)」, 송민고(宋民古, 15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4. 「나귀를 탄 선비(停驂問畫圖)」,
송민고(宋民古, 15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음 편한 선비의 여행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이덕무는 의식적으로 청빈(淸貧)을 즐긴 게 아니라 진심으로 청빈을 즐겼던 듯하다. 할 수만 있다면 청빈보다야 청부(淸富)가 낫겠지만 애초 책에 빠져 사는 맑은 사람이 부를 축적하기란 불가능하다. 검서관의 녹봉은 그저 식구들 건사하는 정도지 부자가 될 만큼은 안 됐다.


 

그림 5.『사소절(士小節)』, 1675년(숙종 1) 이덕무가 저술한 수신서. 선비·부녀자·아동교육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면서 당시의 풍속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림 5. 『사소절(士小節)』, 1675년(숙종 1) 이덕무가 저술한 수신서. 선비·부녀자·아동교육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면서 당시의 풍속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덕무는 서얼출신 실학자다. 그의 『사소절(士小節)』은 우리나라 교육현실에 맞게 쓴 수신서(修身書)다. 인도주의·평등주의·실질주의가 전편에 녹아있다. 하지만 부인들의 교육지침인 「부의(婦議)」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논어』『시경』『소학』과 여사서(女四書)를 대강 읽어서 그 뜻을 통하고, 여러 집안의 성씨, 조상의 계보, 역대의 나라 이름, 성현의 이름자 등을 알아둘 뿐이요, 허랑하게 시詩와 사詞를 지어 외간에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도 서얼출신이면서 여성차별을 하고 있다. 부인은 시나 논설을 지어서 밖으로 퍼뜨리면 안 된다니.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검서관이, 여성은 활발히 글을 쓰지도 말고, 책 발간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한계를 이덕무 같은 서얼출신 지성에게서 보는 일은 불편하다. 하긴 그 당시 실학자들은 정조가 노비혁파를 하려고 했을 때,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그들은 노비의 인권은커녕 농민과 장인, 장사꾼의 인권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았다. 오직 사대부만의 인권을 누리기에 바빴다. 조선선비들의 한계지만 그것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게 아쉽기만 하다. 조선은 어쩔 수 없는 양반들의 나라였다.


 

그림 6.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에 실린 이덕무의 편지글.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그림 6.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에 실린 이덕무의 편지글.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그림 7. (왼쪽)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 사신단 수행원으로 갔을 때 현지에서 중국 학자 엄성과 나눈 대화를 홍대용·이덕무가 공동으로 엮은 『철교화(鐵橋話)』. (오른쪽) 이덕무가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홍대용 종손가 소장)

그림 7. (왼쪽)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 사신단 수행원으로 갔을 때 현지에서
중국 학자 엄성과 나눈 대화를 홍대용·이덕무가 공동으로 엮은 『철교화(鐵橋話)』.
(오른쪽) 이덕무가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홍대용 종손가 소장) 


 

  우리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된 인문서들은 잘 읽히지도,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출판시장에서 500권도 안 팔리는 본격 인문서적이 많다. 고전 번역본 같은 원전들도 마찬가지다. 대신 무늬만 인문학인 가볍고 얄팍한 책들이 팔리고 읽힐 뿐이다. 그렇게라도 책을 읽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리 달갑지 않은 주장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위한 성찰의 인문학이 액세서리가 된 셈이다. 그래서 인문학 페티시즘(fetishism)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중의 욕망과 우리사회의 병리적 현상이 결합해서 인문학 열풍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학에는 취업하기 위해 암기하는 인문학도 진풍경이다. 면접 때 5분만 얘기해보거나 토론해보면 금방 밑천이 드러날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과정과 토론을 중시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그게 통하는 우리사회는 아직 지성의 후진국이다. 
  책 읽기는 노동이다. 눈이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다. 깊은 사유를 하자면 골치도 아플 수 있다. 그걸 감수하고 근육질의 책을 독파하고 관련서적을 추가로 읽어가야 나뭇가지 형태의 ‘지식의 지도’가 그려진다. 그 지도가 우리를 현란한 교양의 숲으로 안내하고 지성의 바다를 유영하게 한다. 그러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든다. 일찍이 간서치 이덕무가 빠져 들어갔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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