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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文氣)를 지닌 성웅의 호연지기: 구국(救國) - 충무공 이순신 (1545∼1598)
충무공 , 이순신 , 임진왜란 , 거북선
이순신 장군은 선비였다. 자칫 선비가 문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일본 로주(老中)처럼 무인가운데도 얼마든지 선비가 있을 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중국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때는 사(士)가 곧 무사(武士)를 의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비의 유래는 소도(蘇塗)를 지키는 무사 집단(신채호)이었으며 화랑도가 그랬던 것처럼 심신단련과 무술연마를 글공부와 병행했다. 그랬다가 전쟁이 나면 앞 다퉈 출전했다.


그림 1. 1953년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현충사에 봉안된 이충무공 영정은 1973년 10월 30일에 이충무공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그림 1. 1953년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현충사에 봉안된 이충무공 영정은 1973년 10월 30일에 이충무공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그림 2. 거북선


 

  이순신 장군은 선비였다. 자칫 선비가 문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일본 로주(老中)처럼 무인가운데도 얼마든지 선비가 있을 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중국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때는 사(士)가 곧 무사(武士)를 의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비의 유래는 소도(蘇塗)를 지키는 무사 집단(신채호)이었으며 화랑도가 그랬던 것처럼 심신단련과 무술연마를 글공부와 병행했다. 그랬다가 전쟁이 나면 앞 다퉈 출전했다. 
역사인물 가운데 문무를 겸한 선비들이 많다. 강감찬, 이천, 김종서, 이제마 등이 그랬다. 특히 강감찬과 김종서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전형으로 전장에 나가면 장수요,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이었다. 

  이순신은 무인이기에 앞서 독서인이었다. 서울(중구 명보극장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배워 시를 잘 지었으며 산문에도 뛰어났다. 그가 진중(陣中)에서 쓴 일기들인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국보(제76호)이자 2013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자산이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그림 3. 『임진장초(壬辰狀草)』, 국보 제76호.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일기로, 모두 7책 205장 분량이고 초서체로 쓰였다. 본래 충무공은 자신의 일기를 임진일기·병신일기·정유일기 등으로 구분해 표제를 붙였다. 후세에 ‘난중일기’란 이름이 붙여졌다.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물인 점을 들어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顯忠祠) 소장.            

그림 3. 『임진장초(壬辰狀草)』, 국보 제76호.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일기로, 모두 7책 205장 분량이고 초서체로 쓰였다. 본래 충무공은 자신의 일기를 임진일기·병신일기·정유일기 등으로 구분해 표제를 붙였다. 후세에 ‘난중일기’란 이름이 붙여졌다.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물인 점을 들어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顯忠祠) 소장. 
 

 

  을미년 한양 옥방에서 출옥하자마자 백의종군 기간(4월1일~8월2일) 초에 당한 어머니의 상사(喪事) 기록은 독자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4월 16일 아산 집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튿날 금오랑의 서리가 들이닥쳐 전장으로 갈 길을 재촉한다. 다 다음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어머니 영전에 하직하고 길을 떠나야 했다. 장군은 그때의 심정을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썼다.

 

 

○전라우수사와 경상우수사가 함께 와서 이별주를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선거이 수사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북방에 갔을 때 같이 힘써 일했더니北去同勤苦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南來共死生
오늘 밤 달빛 아래 술 한잔 나누고 나면一杯今夜月
내일은 별리의 슬픈 정만 남으리明日別離情 

 

 

이 시를 비단에 적었다. -을미(1595)년 9월 14일

 

그림 4.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충무공의 시, 장계, 일기, 비문, 기문, 제문 등 충무공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주제별로 분류해 엮은 책. 충무공이 순국한지 194년이 지난 1792년에 충무공의 충성을 숭상하고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정조正祖의 어명으로 3년에 걸쳐 작업해 1795년(정조19) 14권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편찬자가 전란 중의 일기를 모은 제5~8권은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그림 4.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충무공의 시, 장계, 일기, 비문, 기문, 제문 등 충무공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주제별로 분류해 엮은 책.

충무공이 순국한지 194년이 지난 1792년에 충무공의 충성을 숭상하고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정조正祖의 어명으로 3년에 걸쳐 작업해 1795년(정조19) 14권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편찬자가 전란 중의 일기를 모은 제5~8권은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경(四更:새벽1~3시)에 꿈을 꿨다.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다.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葂)(1577~1597)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둘째 아들)이 쓴 편지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二更:9~11시)에 비가 내렸다. -정유(1597)년 10월 14일

 

 

그림 5.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1948년에 쓴 『이순신』이라는 소설 형식의 책,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한 469페이지 단행본(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그림 5.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1948년에 쓴 『이순신』이라는 소설 형식의 책,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한 469페이지 단행본(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진중에서 동료 무인들과 술잔을 나누고 시정(詩情)을 담았는가 하면, 아끼던 막내아들 면의 전사소식을 듣고 비통한 심정을 절절히 표현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 전사했다지만 수군통제사가 그 많은 부하들 앞에서 울부짖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쩌라는 것인가.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정리인가. 그 건장한 장군의 기상 안에는 이처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여린 마음이 들어있었다. 평소 노모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도 간절했다. 이 여린 마음이 바로 인(仁)이다. 봄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한없이 여린 그 마음, 그 생명사랑의 내면세계가 ‘옳을 의(義)자’와 만나, 밖으로 표출되면 천지를 뒤덮는 파괴력을 지닌다. 그 여린 마음을 짓밟는 왜놈들의 불의한 침략과 살생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석 자 칼을 들고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장군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진 구절이다.

 

 

그림 6.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이충무공의 장검. 1593년(선조 27) 4월에 한산도 진중에서 칼 만드는 이름난 장인 태구련과 이무생이 제작했다는 쌍수도다. 길이가 185cm에 이르기에 실제 전장에 사용하지는 않았고, 이충무공이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 6.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이충무공의 장검. 1593년(선조 27) 4월에 한산도 진중에서 칼 만드는 이름난 장인 태구련과 이무생이 제작했다는 쌍수도다. 길이가 185cm에 이르기에 실제 전장에 사용하지는 않았고, 이충무공이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 7. 이순신 장군이 실제 전투에서 사용한 쌍룡검(원융검). 1910년 2월에 발행된 사진집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사진이다. 이 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권업신문’(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가 만든 신문) 1912년 5월 26일자로, 기사에 의하면 1910년까지 조선왕실 궁내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한다. 쌍용검과 함께 전시되었던 ‘철추’가 영국 장군을 통해 일본군 사령부로 전해진 사실로 볼 때, 이 쌍용검도 현재 일본에 있을 확률 높다고 추정된다. (2013년 9월 「주간경향」 참조)
그림 7. 이순신 장군이 실제 전투에서 사용한 쌍룡검(원융검).

1910년 2월에 발행된 사진집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사진이다.
이 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권업신문’(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가 만든 신문) 1912년 5월 26일자로, 기사에 의하면 1910년까지 조선왕실 궁내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한다. 쌍용검과 함께 전시되었던 ‘철추’가 영국 장군을 통해 일본군 사령부로 전해진 사실로 볼 때, 이 쌍용검도 현재 일본에 있을 확률 높다고 추정된다. (2013년 9월 「주간경향」 참조)


 

  이순신에게는 맹자(孟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었다. 호연지기는 왕성하게 뻗치는 기운으로, 내면의 떳떳함에서 나오는 육체적 용기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했다. 인간 심성의 꽃이 문(文)이라면 그걸 지키는 수문장이 바로 무(武)다. 흉중의 한없이 여린 마음이 밖으로 뻗쳐 나와 세계전사에 빛나는 무공을 세울 수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정면공격과 기습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몇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에서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 한국의 이순신,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08년 일본해군대학 교과서 『제국국방사론(帝國國防史論)』을 쓴, 일본해전사의 권위자 사토 테츠타로(佐藤鐵太郞)의 평이다.

 

 

그림 8. (왼쪽)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 1세(Napoleon Bonaparte, 1769~1821). (가운데) 조선 구국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오른쪽)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완승 직전에 프랑스군의 저격을 받아,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전사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

그림 8. (왼쪽)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 1세(Napoleon Bonaparte, 1769~1821). (가운데) 조선 구국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오른쪽)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완승 직전에 프랑스군의 저격을 받아,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전사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 
 

 

그림 9. 명량에 나가기 직전에 이순신이 쓴 휘호.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그림 9. 명량에 나가기 직전에 이순신이 쓴 휘호.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은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남겼다. 나폴레옹의 명언대로 전쟁은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 이순신, 그가 있었기에 한겨레는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이 땅 사람들의 복이다. 이순신은 희망과 불멸의 아이콘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승리를 거듭했지만 되레 모함을 받고 조정에 불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굴욕적인 백의종군을 할 때도 그는 한탄하지 않았다. 그가 공들여 육성한 조선 수군을 원균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고 12척의 배만 남겼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희망을 건져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명량 해전에 앞서 그가 올린 장계는 콧날을 시큰하게 만든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전투에 나가기 전에 쓴 휘호다. 전투를 개시하면서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가 비장해졌다. 그는 어쩌다 한 척이 더 늘어난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을 괴멸시켰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죽음 곁에서는 불가능이라는 게 없었다. 이순신은 그걸 알았고 부하들과의 공감능력이 탁월했다.   이순신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노량에서 왜군들과 마지막 대전을 치른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주소서!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다. 왜군 전선 500여 척 가운데서 450여 척이 침몰되고 겨우 50여 척만이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죽음이, 그날은 그를 데리고 갔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마지막까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림 10
 

 

  그는 그렇게 나라를 구하고 한 번 죽어 청사에 영원히 빛나는 성웅이 되었다. 
  가족과 부하들, 백성을 한없이 사랑한 이 불세출의 문무겸장은 제갈량처럼 심령까지 통했다. 『주역』에 밝아서 미리 앞을 내다보는 예지가 있었고 그것을 전장에서 잘 활용했다. 『난중일기』읽어보면 적중률이 아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엄정한 군율, 철저한 현장조사와 정세분석, 거북선과 화포를 활용한 과학적인 전투는 기본기였다. 
  이순신은 구국의 상징이다. 이순신 리더십에서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미덕은 인仁과 의義, 예지와 공감능력, 그리고 과학의 힘이 아닐까.

 

 

그림 11. 1854년 발행된 일본의 「조선 정벌기」라는 책에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충무공 삽화.

그림 11. 1854년 발행된 일본의 「조선 정벌기」라는 책에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충무공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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