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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소년이 만든 『소년』과 '소년'의 문명사적 의미
신문관 , 경부철도노래 , 한양노래
저 바다 건너는 어떤 세계일까.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도쿄, 그곳은 제국의 심장이자, 서구 문명을 압축한 신세계이자, 조선이 따라잡아야 할 근대화의 모델이었다.

블릿18세 소년이 만든『소년』과 ‘소년’의 문명사적 의미

 

저 바다 건너는 어떤 세계일까.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도쿄, 그곳은 제국의 심장이자, 서구 문명을 압축한 신세계이자, 조선이 따라잡아야 할 근대화의 모델이었다. 1906년 청년은 와세다 대학 고등 사범부(師範部) 역사지리과에 입학했다. 당시 17세였던 청년은 도쿄의 거리에서 문명의 찬란함을, 서구 근대 문명의 위대함을 보았다. 청년은 꿈을 키웠다. 조선도 강해져야 한다, 서구처럼, 일본처럼 문명국가가 되어야 한다.
청년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조선의 근대화,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신문과 잡지 탐독에 광적으로 빠져있었던 청년은 잡지에 주목했다. 청년은 굳게 믿었다. 세상의 온갖 지식이 총집결한 잡지야말로 무지한 인민을 계몽하고, 헐벗은 조선을 문명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청년에게 잡지는 ‘지식의 보고(寶庫)’이자 ‘국민의 나침반’이었다.
청년은 도쿄의 거리를 활보하며 조선의 문명화를 꿈꿨다. 하지만 도쿄에서 연신 뿜어내는 문명의 찬란함에 매혹되었던 청년은 조선통감부 치하의 조선인, 한낱 망국의 길로 접어든 나라의 초라한 유학생일 따름이었다. 1907년의 일이었다. 때마침 와세다 대학에서 모의국회가 열렸다. 모의국회의 의제는 ‘식민 정책에 관한 건의’였다. 대한제국의 국민과 황실을 모욕하는 의제였다. 청년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조선유학생대표 자격으로 조선유학생의 동맹퇴학을 주도했다. 문제가 커지자 학교 당국과 경찰이 개입했으며, 사건은 의제를 내건 일본인 학생을 출학시키는 것으로 신속하게 종결됐다. 그렇지만 청년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던 청년은 1908년 4월 다시 부푼 꿈을 안고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청년은 일본에서 최신식 인쇄기계를 구입했다. 인쇄 기술자도 구했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귀국한다. 서울로 돌아온 청년은 아버지의 자택 맞은편 건물에 새 간판을 달았다. 인쇄소 겸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이었다. 신문관, 이름 그대로 ‘새로운 글을 짓는 곳’이었다. 청년에게 새로운 글이란 다름 아닌 신문명을 담아내는 글이었다. 물론 19세의 청년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인쇄기계를 사고 출판사를 설립했겠는가. 청년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꿈을 철석같이 믿고 ‘30만 환’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다. 지금 돈으로 치면 60~70억 원과 맞먹는 가치였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출판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경부 철도 노래』와『한양 노래』를 펴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청년은 드디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세상에 보란 듯이 내보였다. 흑색, 홍색, 녹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한 권의 잡지였다. 1908년 11월 1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잡지’이자 청년 최남선의 ‘1인 잡지’였던『소년』이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린 것이다.
최남선은 자신의 온갖 열정과 꿈과 희망을 담아 만든 잡지의 이름을『소년』이라 지었다.『소년』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미성숙한 ‘조선’의 또 다른 이름이자, 새롭게 태어날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남선은 자신의 굳은 신념을 담은 시 한 편을 창간호 맨 앞머리에 놓는다. 한국 최초의 신체시라 불리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였다.

 

텨……ㄹ썩,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태산(泰山) 갓흔 놉흔 뫼, 집채 갓흔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해에게서 소년에게」(부분),『소년』, 1908.1



 

태산 같이 높은 산도, 집채 같은 바윗돌도, 나폴레옹도, 진시황도 모두 저토록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 앞에 굴복하고 만다. 최남선에게 바다는 야만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는 문명의 상징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힘은 곧 바다를 정복하는 데서 나왔다고 최남선은 믿었다. 바다는 문명의 거센 파도를 의미했다. 대한의 ‘소년들’이 그 바다와 굳건하게 맞서 싸우기를 최남선은 간절히 바랐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터이다. ‘미성숙’한 대한의 소년들이여, 문명의 파고에 맞서 당당하게 싸워라! 담대한 기상을 품어라! 그리하여 신문명을 건설하라!
최남선은 바다를 경영하는 자가 곧 세계를 경영한다고 진정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바다는 그 자체로 문명 세계였다. 그는 대한의 소년들이 문명 세계로 과감히 떠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를 바랐다. 그래서 「쾌소년 세계주유 시보」(快少年世界周遊時報)와 「봉길이 지리공부」(鳳吉伊地理工夫)라는 글을 통해 대한의 소년들을 독려하며 이렇게 다시 말한다. 대한은 결코 나약한 민족이 아니다. 중국 대륙만을 바라보는 조선 반도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고대 우리 민족은 흥민족(興民族)”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모험을 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이를 애써 외면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 대한 소년들은 “콜럼버스 같이 신대륙을 찾아내고 마젤란 같이 세계일주”를 감행할 사람들로 거듭나야 한다. 대한의 소년들은 “맹호(猛虎)가 발을 들고” “동아대륙(東亞大陸)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기 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조선 반도의 자식들이니 결코 담대한 기상을 잃지 말라!
그렇다면 어떻게 대한의 소년들이 담대한 기상을 키울 수 있을까. 최남선은 ‘여행’을 제시했다. 그는 여행이야말로 “지식의 근원”이자 진취적 기상과 모험심을 키울 수 있는 실천행위라고 믿었다. 최남선에게 ‘흥하는 민족’과 ‘흥하는 국민’이 꼭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은 바로 진취적 기상과 모험심이었다.
또한 최남선은『소년』을 통해 대한 소년들의 기상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의 피 토하는 설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한 소년들에게 롤모델을 제시해야만 했다. 최남선은 고민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열악했으나 담대한 기상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영웅이 된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최남선은 가장 먼저 나폴레옹을 대한 소년들의 롤모델로 제시했다. 최남선은 나폴레옹의 전기를 창간호부터 제18호(1910.6)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신시대 청년의 신호흡」이란 코너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하여 워싱턴, 프랭클린, 톨스토이, 페스탈로치, 스마일스, 이율곡 등의 좌우명이 소개되어 있다.
『소년』의 사명은 당연히 대한의 소년들을 계몽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좌우명은 대한의 소년들이 나아가야할 일종의 좌표였다. 그러나 그 좌표가 너무 무겁고 딱딱하면 곤란했다. 적절한 조화가 필요했다.『소년』에는 최신 서구의 지식과 함께 재미난 이야기가 함께 실렸다. 물론 재미난 이야기 역시 교훈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세계 명작’이『소년』에 번역되어 실렸다.『로빈슨 크루소』,『걸리버 여행기』,『이솝우화』가 바로 그 작품이었다. 그러나 최남선은 문명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너무나 큰 나머지『로빈슨 크루소』에 잠재되어 있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소년』은 최남선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낸 한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였다.『소년』은 기존의 학회지와는 달랐다.『소년』은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전달했다. 일종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살포라 불러도 좋았다. 최남선의 입장에서 백과사전적 지식은 곧 일반적 지식을 뜻했으며, 이때 일반적 지식이란 ‘세계적 지식’이었다. 최남선은 조선 반도라는 협소한 지역으로 ‘세계’를 끌어들였던 셈이었다. 더 나아가『소년』은 재미와 교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많은 양의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했다. 읽은 잡지와 보는 잡지를 동시에 추구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피터대제, 충정공 민영환, 탐험가 피어리 등과 같은 위인들의 사진, 나이아가라 폭포, 에펠탑, 파리, 이탈리아 교황청, 워싱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뉴욕, 부다페스트, 런던 등의 풍경 사진이『소년』에 실렸다.『소년』은 애국과 근대 계몽을 주장했지만 기존의 학회지들처럼 정치적 계몽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지는 않았다.『소년』은 문명과 문화를 중심으로 애국과 계몽을 역설했다.
재미와 교양, 읽는 것과 보는 것의 공존, 서구 미디어와의 동시대성을 추구했던 근대식 잡지『소년』과 그『소년』의 창조자였던 최남선은 모든 면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최남선과『소년』의 열망은 결국 새로운 ‘소년=근대인’, 더 나아가 ‘새로운 국민’의 창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아마도 최남선이,『소년』이 갈망했던 ‘20세기 신국민’이란 「국민의 외형과 국세의 성쇠」에 주장된 것처럼 “혈관을 수세미질 하고 얼굴을 장도리질” 하여 번듯하게 거듭난 사람,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뜨거운 피로 가득한 사람이었을 터이다.

 

우리의 혈관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통장작 지핀 가마 불 보다도 더 뜨거운 피.
우리의 흉우(胸宇)에 가득한 것은 한없는 동력으로 거칠 것 없이 나가는 기차와 같은 전진심이로다.
(중략)
피는 선동(煽動), 마음은 조세(助勢), 그리하여 두 팔이 들먹들먹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거대한 세계는 작은 나를 위하여 있도다.
-「뜨거운 피」(부분),『소년』, 1910.3.



1911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소년』은 작별을 고했지만, 1914년 10월『청춘』이란 잡지가 또다시 최남선의 노력으로 세상이 나온다. ‘소년’은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출처: 
권보드래 외,『『소년』과『청춘』의 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박영진, 「창립 무렵의 신문관」,『사이間SAI』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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