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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과 『신생활』 그리고 염상섭의 『만세전』
신생활 , 만세전 , 염상섭
염상섭의 중편소설『만세전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빼어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당시 청년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검열과『신생활』그리고 염상섭의『만세전』



염상섭의 중편소설『만세전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빼어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당시 청년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잠시 줄거리를 살펴보면,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길에 오른다. 도쿄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는 이인화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마주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억압과 수탈을 직시한 이인화는 현실 변혁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불태우기보다는 구질구질하고 갑갑한 현실, 즉 ‘공동묘지’와 같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뒤로한 채 다시 도쿄로 도피하고 만다.
당시 식민지 조선 청년의 삶을 냉혹한 현실에 입각해서 그린『만세전』의 원래 제목은 「묘지」이다. 우리가 교과서나 서점에서 흔히 접해왔던『만세전』은 개작을 거친『만세전』이다. 염상섭의 「묘지」는 1922년 7월부터 9월까지 잡지『신생활』에 연재되었다가『신생활』의 폐간과 함께 3회 연재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잡지『신생활』은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합작으로 탄생한 한국 최초의 좌파잡지였다. 염상섭의 「묘지」는『신생활』7월호와 8월호에 2회 연재된 후 3회는 전문이 검열에 의해 삭제 당했다.
이후 염상섭은『시대일보』로 옮겨 「묘지」를 다시 연재하면서『만세전󰡕으로 제목을 변경하였다. 1924년 6월 1일까지 총 59회로 완결된『만세전』은 같은 해 8월 고려공사(高麗公司)에서 저작자명을 양규룡(梁奎龍)으로 하여 개작을 거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48년 2월에 다시 개작되어 수선사(首善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잡지『신생활』은 사회주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총독부의 집중적인 검열을 받았으며, 여기에 더해 염상섭의 「묘지」의 발표로 인해 더욱 혹독한 검열을 당해야만 했다. 그렇다면『신생활』9월호에 연재된 「묘지」 3회분의 어떤 부분 때문에 작품이 전면 삭제되고 말았던 것일까.
1922년 8월 1일『동아일보』는 일본의 ‘신석현(新潟縣)’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삶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의 내용은 정말 끔찍했다. 얼마나 끔찍한 기사였으면 조선총독부는『동아일보』 8월 1일자 신문을 발매금지함과 동시에 압수조치를 내렸다. 조선총독부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염상섭은 일본의 신석현 사건을 알게 되었으며, 「묘지」 3회분을 쓰면서 동시에 한편의 시평(時評)을 준비했다. 염상섭의 시평은 잡지『동명』1922년 9월 창간호에 발표할 글이었다. 시평의 제목은 「신석현 사건에 감(鑑)하야―이출노동자에 대한 응급책」이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한 번에 수 백 명씩 모집되어 단체로 이출(移出)되는 노동자는, 그 대다수가 일정한 기술의 훈련이 없는 농민이었다. (중략) 방직회사나 면사공장(綿絲工場)에 연기(年期)로 계약하고, 마치 창기와 같이 전차(前借)까지 하여 도망하는 자가 있음이다. 이것은 나도 실제로 목도하고 구원한 일이 있었다. (중략) 신문에 보도되었거니와, 그들은(노동자 모집원-필자) 노동자 모집의 보수(報酬)는 물론이요, 그 중에도 전후 협잡으로 당연히 노동자에게 지급될 대금의 일부가 그들의 수중으로 몰수되고, 물품을 법외의 고가로 강매케하는 등 사실은 창기의 포주 이상으로 악독한 모양이다.

 

염상섭은 일본의 신석현에 근무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마치 악독한 포주에게 시달리고 착취당하는 창기와 같다고 표현하였다. 일본인 노동자 모집원들의 악독한 만행의 실체는 당시 조선인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모집원으로부터 40원의 선급과 월 80원의 임금을 약속받고 신석현(新潟縣)의 발전소 공사 현장으로 이주 노동을 떠났다. 그러나 모집원들의 약속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신석현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17시간의 강제 노동과 학대에 내몰렸으며, 모집원들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복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장을 탈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이 살해당하고 만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현지에서 조선인 노동자 살해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 제2의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염상섭은 이러한 신석현 사건을 「묘지」 3회분의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묘지」 3회는 이인화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식민지 조선으로 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인화는 관부연락선을 타기 전에 단지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검문과 감시를 당하는 등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연락선의 목욕탕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송출하는 일본인 노동자 모집원을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가련한 조선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그러는구나하는 생각을 할 때 나는 다시한번 그 자의 상판닥지를 치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묘지」 3회,『신생활』9호, 1922)

 

* 출처: 
최태원, 「<묘지>와 <만세전>의 거리―‘묘지’와 ‘신석현 사건’을 중심으로」,『한국학보』1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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