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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차상찬은 누구인가?
개벽 , 천도교회월보 , 동광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사람이 있었다.『개벽』의 편집인이었던 차상찬(車相瓚)이었다.

블릿28. 편집인 차상찬은 누구인가?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사람이 있었다.『개벽』의 편집인이었던 차상찬(車相瓚)이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살아서 보았다. 그러나 차상찬은 해방의 감격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1946년 3월 24일 만 59세의 나이로 중풍과 영양실조가 겹쳐 세상을 떠났다.
차상찬은 자신의본명과 호(號) 이외에 30여 개에 이르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가회동인(嘉會洞人), 월명산인(月明山人), 삼각산인(三角山人), 강촌생(江村生), 사외사인(史外史人), 차천자(車賤者), 풍류랑(風流郞), 수춘산인(壽春山人), 차돌이, 각살이 등이 모두 그의 필명이었다. 차상찬은 한국 지성사의 보고라 일컫는 잡지『개벽』의 창간 동인이었으며, 후일 이돈화(李敦化), 김기전(金起田), 방정환(方定煥)의 뒤를 이어 1931년부터 개벽사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취임하였으며,『개벽』이 폐간되고 개벽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잡지 발행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1887년에 태어난 차상찬은 1910년 보성고보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1911년부터『천도교회월보』의 학술부를 담당하게 된다. 차상찬과 천도교의 인연은 깊었다. 그가 천도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04년이었다. 차상찬이 천도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차상찬의 셋째형인 차상학은 천도교 최초의 기관지인『만세보』의 기자였으며,『천도교회월보』의 초창기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차상찬은 천도교 입교를 계기로 애국계몽운동과 민족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이는 차상찬 가문의 가훈이자 가풍이었던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길은 오직 청빈과 절개로 사는 길이며, 그 길이 인생의 정도(正道)다.”의 실천이었다. 차상찬은『개벽』의 창간동인이자 편집인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리스트였다.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사가인 백철은 차상찬을 “저널리스트로서의 뛰어난 센스와 재능을” 타고 났으며, “요즘과 같은 시세를 만났다면 제1류의 저널리스트로 대우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차상찬은 잡지 편집인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리스트로서도 인정받았다.
1931년 8월호『동광』에는 김만(金萬)의 「잡지기자 만평」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당시 명망 높은 잡지 기자들인 방정환, 주요한, 김동환, 채만식, 이성환, 김규택, 이은상, 김동혁, 최상덕, 차상찬 등에 관한 인물평이었다. 김만의 눈에 비친 차상찬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청오(靑吾)니 관상자(觀相者)니 차천자(車賤者)니 하는 아호(雅號)의 익명으로 뾰족한 붓대를 도처에 휘두르는 씨야말로 잡지왕국 개벽사의 이채라 할 만 하외다. (중략) 대머리가 되어가는 도드라진 이마에다가 하탁이 뾰족 나온 것이 웃어도 파안대소하는 법이 없고 입술 근처만 움직이는 것이 씨의 얼굴이니 인물로 보더라도 도드라진 곳이 있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외다. 그의 붓끝이 가다가다 너무 날카로워서 하늘 눈을 울리는 때가 많은 것도 이 얼굴의 도드라진 일면이거니와 이와 같은 것은 차라리 방향(芳香) 많은 장미꽃의 가시라고 할 일이외다.

 

차상찬의 붓끝은 매서운 직필(直筆)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글을 썼으며, 바른 말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긴 진정한 기자였다. 차상찬이 가장 존경한 인물은 이순신이었다. 그가 이순신을 “가장 사모하고 열애”한 것은 “최후까지 철두철미하게 민족을 위하여 심혈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에게 장검이 있었다면 차상찬에게는 굳센 붓대가 있었던 것이다.
차상찬은 『개벽』에서 같이 활동하던 소파 방정환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이자,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22년 그는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날 제정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개벽』지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방정환과 그는 서대문 형무도세 끌려가 옥고를 치른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냉혹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던 차상찬은 글을 무기로 세상과 시대와 싸워나갔다. 그는 시, 소설, 수필, 칼럼, 만필(漫筆), 인물만평, 사회풍자, 설화, 소화(笑話)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개벽』,『조광』,『신여성』,『별건곤』,『혜성』,『어린이』,『월간야담』등에 발표된 그의 글은 약 410여 편에 이르렀다. 그만큼 차상찬에게 글은 곧 시대의 억압과 싸우는 중요한 무기였던 셈이다.
언론인이자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차상찬이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잡지의 발행이었을 것이다. 차상찬은『개벽』을 비롯하여『혜성』,『부인』,『어린이』,『신여성』,『학생』,『제일선』,『별건곤』등의 잡지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차상찬에게 잡지는 민족문화운동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꼿꼿하고 굳센 필봉을 꺾지 않았던 차상찬은 수필, 칼럼, 시 등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민속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차상찬은 자신이 주관한『개벽』에 조선의 민담, 풍속, 여속(女俗), 답사에 관련된 글을 54편이나 발표하였다. 그가 이토록 조선의 민속에 관심을 가진 것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해동염사(海東艶史)』와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와 같은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외에도『조선4천년비사(朝鮮四千年祕史)』, 『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와 같은 책 역시 그의 민속학에 관련된 저작물이다.
잡지 편집인 차상찬의 삶은 한국 근대 잡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평생 잡지와 함께 동고동락해 온 차상찬이 죽기 마지막 직전에 몸담았던 일은『개벽』의 편집 고문이었다.

 

* 출처: 
차상찬, 「선구자를 우러러, 위대한 사상(史上)의 큰 어른들」(설문),『삼천리』7권 3호, 1935.
김만, 「잡지기자 만평」,『동광』8월호, 1931.
박길수,『차상찬 평전』, 모시는사람들, 2012.
박종수, 「차상찬론」,『한국민속학』28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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