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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民(신민)
신민사, 1925년 5월
신민 , 종합잡지 , 사회교화
『신민 新民』은 1925년 5월 10일 자로 창간된 사회교화를 내세운 종합잡지이다. 『신민』의 전신은 1921년 2월에 창간된 유도진흥회 기관지인『유도 儒道』였는데, 이 잡지가 친일(親日)인사들의 글이 많다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되자, 1925년 1월 통권 48호로 자진 폐간했다. 이각종(李覺鐘)이 폐간된『유도』를 인수해, 신민사를 차리고 ‘신문지법’에 의한 허가를 얻어『신민』(1925~1933)을 내놓게 된 것이다.

1. 창간 서지

 

『신민 新民』은 1925년 5월 10일 자로 창간된 사회교화를 내세운 종합잡지이다. 『신민』의 전신은 1921년 2월에 창간된 유도진흥회 기관지인『유도 儒道』였는데, 이 잡지가 친일(親日)인사들의 글이 많다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되자, 1925년 1월 통권 48호로 자진 폐간했다. 이각종(李覺鐘)이 폐간된『유도』를 인수해, 신민사를 차리고 ‘신문지법’에 의한 허가를 얻어『신민』(1925~1933)을 내놓게 된 것이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이각종, 인쇄인 김중환(金重煥), 인쇄소 한성도서(주), 발행소 신민사(서울‧다동 98), A5판 162면, 정가 50전이다. 이 잡지는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를 받았으나, ‘정치논평이나 시사문제’보다는 국문학을 비롯한 국학 분야의 논문을 많이 게재했다.

발행인 이각종이 쓴 창간사 「신흥민족의 초발심(初發心)」을 통해 본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민족은 신흥민족이다. 비로소 현대 사조(思潮)에 눈떠서 신생명을 찾기 위하여 흥기(興起)하는 민족이다. 그리고 신흥민족의 전도는 우(右)도 아니고 좌(左)도 아니다. 우리는 벌써 회의(懷疑)도 없고 오뇌(懊惱)도 없다. 다만 우리의 능력껏 우리의 실생활에 편의(便宜)하도록 진리를 세우고 이상(理想)을 지어갈 뿐이다. 
세계는 변천 도중이요, 민족은 미성품(未成品)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며 변화적으로 보며 진보적으로 보고, 실제적 내용적 행위적으로 우리의 신생명 신인생 신생활을 우리의 무한한 노력으로써 창조하려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우리 민족을 본위로 하여 발달을 촉(促)하고 번영을 도(圖)할 것이니, 이곳에 우리의 장래가 있고 희망이 있고 광명이 보인다.

 

2. 이각종과 식민지 관제 매체 『신민』

 

『신민』의 편집 겸 발행인은 이각종은 일제의 강점 직후 총독부의 관리로 들어가 해방이 될 때까지 일관되게 총독부의 대역을 자임했고 제국주의 및 군국의 논리를 충실히 내면화한 대표적 친일 인물이다. 이각종은 『기호흥학회월보』에 「실리농방」을 연재하여 농정과 실업 분야에 일가견을 보여주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에 속(屬)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김포 군수를 지냈다. 1921년 내무부 사회과의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신민』을 창간했고, 『신민』의 발행 기간 동안 총독부 촉탁의 지위와 역할을 유지하다가, 31년부터 재임명되지 않았고 33년 『신민』도 발간하지 않는다. 『신민』의 종간 이후 37년부터 다시 학무국 사회교육과 및 보호관찰소에 촉탁과 촉탁보호사로 임명되어 중앙진흥회, 백악회, 대동민우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총독부의 외곽단체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전향 유도 및 전향자 관리, 국민 동원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악명 높은「皇國臣民丿誓詞」의 문안을 이각종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 반민 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정신 이상으로 판정되어 풀려났다. 이각종의 행보로만 보더라도, 『신민』은 조선총독부의 선전지였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기 식민지의 유력한 공론지 『개벽』이 조선총독부에 대항하는 언론이었고,『신생활』,『조선지광』이 좌파적 경향을 내세우는 잡지, 그리고『동광』이 서구적 자유주의에 경도되었던 민족주의적 잡지였음에 비해,『신민』은 그 어떤 잡지보다도 친일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런 친일 경향에 대해서는 잡지가 발간되던 당시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新民』一觀 230餘페지의 壯觀을 示한 新民新年號는 30페지를 읽기전에 啞然히 책을 놋코 散亂한 心懷를 억제하지 못하엿다. 그때에 筆者는 비로소 깨다럿다. 「참말노 新民이다. 과거에도 업섯고 현재에도 업고 미래에도 업겟스나 그러한 新民들이 잇슬 순간에만 머물러 잇슬 新民이로구나!」하는 말이 저절노 나오게 된다. 新民 全卷을 시대 혹은 민중이라는 저울에다가 달어볼 때에 필자는 憤然한 목소리로 「怪物아 물러가거라」하고 떠들엇다. 그것은 괴물이란 耳目口鼻가 確然히 보이지 안코 脊柱의 存在가 보이지 안는 한 暗暗한 사이비적 물건인 까닭이다. ”

‘총독부 공문(公文)’ ‘총독부 기관지’. ‘어용 잡지’, ‘사술’, ‘사이비’ 등으로 낙인찍고 비판했지만, 신생 잡지 『신민』의 영향력이 ‘지방’에서 급격히 커지고 있었고, 1925~6년 조선의 언론으로 3대 신문과 함께 『개벽』과 『신민』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점 또한 무시 못 할 사실이기도 하다.

 

3. 『신민』의 구성과 내용

 

이각종은 창간사격인 『新興民族의 初發心』을 통해 『신민』의 발행 취지를 ‘민중교화’임이 명백하다. 그는 ‘신흥민족’인 조선인에게 시급한 현안으로 ‘실제생활개선’을 지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교화’와 ‘민중문화’ 보급에 적극 나서 ‘민중정치’의 기초를 다지면서, ‘지방 개량’과 ‘농촌 진흥’을 통해 ‘견고한 산업’을 일으켜 ‘이상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의 生活을 더 좀 向上식히고 더 좀 自由롭게 하기 위하야 現象社會를 改造하여야 한다. 感情的 革命과 破壞的 突進만이, 반드시 成功의 捷徑이 안일 것이다. 이 우리는 爲先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우리의 能力대로 나 改造하여 보자 生活을 改善하야 合理的 經濟的 되게 하자 社會敎化를 盛히 하야야 民衆文化를 普及케 하자 地方을 改良하야 民衆政治의 基本을 確立하자 農村을 振興하야 産業의 根蓄을 堅固히 하자 그리하야 不斷의 努力으로써 現實社會의 모든 病弊를 革新하야 步一步로 現想社會의 建設에 向하야 前進하자 이로써 緩慢타 하며 姑息的이라 하는가? 千里의 鵬程도 初發心에서.

창간 초기 『신민』의 편집체제는 이전의『개벽』과 유사했다. 첫 기사로 권두언 혹은 사설이나 그에 준하는 시사논평을 게재하고, 사회적 현안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다수의 논설이 뒤를 잇는다. 다음으로 학술/조사/소식 등 정책 이해에 방점을 둔 기사들과, 감상/수필/만평 등의 비교적 대중적인 읽을거리들이 제공되고, 마지막으로 문예/창작란을 두었다. 논설/시사, 소식/잡문, 문예 등 3단계로 구성해, 『개벽』을 비롯해 3․1운동 직후 발행되기 시작한 시사잡지들의 전형적 구도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논설과 해설 중심의 편집 체제는 1926년을 경과하면서 변화를 보이는데 이것은 설문 조사, 인터뷰 중심의 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개벽』이 폐간되고, 뒤이어 나온『별건곤』 그리고 이전부터 개벽사에서 간행되던『신여성』에서 이미 선을 보인 편집방식이다. 즉 기사가 계몽과 해설이 아니라, 다양한 취재원들의 의견을 듣고 나열하는 체제를 취하면서, 현실세계의 다양성, 리얼리티, 생생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효과를 얻으려는 편집 방식이다.『별건곤』과 『신여성』의 편집방식을『신민』이 이어받고 있는데, 이는 1929년 창간된『삼천리』에서 전면화된 방식이다. 
‘天道敎會의 紛糾에 就하야’와 ‘衡平社員對農民 衝突에 就하야’(5호, 1925. 9.)을 시작으로 ‘情死問題批判’(17호, 1926. 9.)을 주제로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 사건을 기사화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 기사에 참여한 인물은 안재홍, 홍승구, 이광수, 민태원, 권덕규, 김동성, 김미리사, 이종린, 최원순, 조동식, 이갑성, 허영호, 설의식, 황신덕, 이능선, 최상덕 등이다. 인물들의 면면을 볼 때, 민족주의 우파라 평가받는 인물들이 다수를 이루고 소수의 민족주의 좌파가 섞여 있는 모양새이다. 이외에도, ‘卒業生의 就業問題’(23호, 1927. 3.), ‘時調는 復興할 것이냐?’(23호, 1927. 3.), ‘中華民國 時局問題’(24호, 1927. 4.), ‘中國은 共産化할 것이냐?’(24호, 1927. 4.), ‘學生 盟休問題 批判’(28호, 1927. 8.), ‘當面한 모든 主張’(33호, 1928. 1.), ‘小作慣行 改善運動’(43호, 1928. 11.), ‘産業振興의 一方策’(45호, 1929. 1.), ‘우리 靑年의 進路’(45호, 1929. 1.), ‘農村指導에 關한 問題’(50호, 1929. 6.), ‘朝鮮人으로서 본 朝鮮博覽會’(53호, 1929. 11.) 등은 1930년 이전의 『신민』에 게재된 ‘설문’형식의 기사들이다. 이런 ‘설문’기사에는 5명에서 10여 명의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정사 문제 비판’과 같이 우파적 경향의 인물들이 중심을 이뤘다.

 

4. 창간의 시대적 배경

 

『신민』의 창간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상범을 양산하기 시작한 대표적 법률인 치안유지법의 발효, 국내외적으로 사회주의의 부상,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 결성이 이루어진 급격한 역사적 변동의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역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소일조약(蘇日條約) 체결, 사회주의의 부상과 민족통일전선의 움직임, 6ㆍ10만세운동, 이에 대응하는 치안유지법과 함께, 고등경찰제 및 사상 판검사제 등 사상 통제 정책의 실시, 그리고 연이은 조선공산당사건과 『개벽』의 강제 폐간 등은 『신민』창간 전후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즉 식민지 치하의 총독부 어용매체『신민』은, 3ㆍ1운동 이후 열려진 문화정치의 공간에 1925~6년을 경과하며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 그리고 이 변화에 총독부가 대응하는 방식과 그동안 식민지 주민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몽 및 문화주의적 전망과 가능성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조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보인 ‘설문’의 편집 방식, 특히『신민』에 국한되지 않고『별건곤』, 『신여성』, 『삼천리』, 『조광』까지 대중잡지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이 방식은 근대 잡지의 한 측면, 즉 말 그대로 창고 같은 매거진으로서의 잡식성과 그것을 여론으로 포장하면서 다양성, 상대성을 통해 현실에 순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신민 잡지 내 일부 삽화 사진-


img_신민 잡지 내 일부 삽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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