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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新文館, 1914년
청춘 , 세계일주가
월간 종합잡지로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를 위해 서양의 신사조 및 신문물과 한국의 고전을 소개하는데 치중.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잡지가 폐간되는 가운데 발행된 잡지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서양의 명작들을 소개함으로 한국 근대문학 형성에 기여했다.

아무라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욱 배워야 하며 더 배워야 합니다. (중략) 빈말 맙시다. 헛노릇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걱정 맙시다. 근심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온 힘을 배움에 들입시다. 우리는 여러분과 더불어 배움의 동무가 되려 합니다. 다 같이 배웁시다. 더욱 배우며 더 배웁시다.(「권두언」, 『청춘』 1호, 1914)

1910년대 육당 최남선은 조선 소년과 청년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고 간청하였다. 배우기만 하자는 것.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말고 그저 배우기만 하자는 것. 모든 열정을 배움에 쏟자는 것. 배움이야말로 지고지선한 일이자 식민지 조선인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것. 그 배움의 동무가 되겠다는 것. 우리 모두 함께 배움의 큰길로 나가자는 것.『청춘』의 사명이자 잡지 발간의 목적이었다. 이때의 배움이란 서구 문명을 통한 계몽을 뜻했다.『청춘』은 배우고 또 배워 더욱더 강한 민족으로 거듭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해서 배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선 민중의 계몽사업도 멈출 수 없었다. 최남선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잡지로 평가받는 『소년』을 폐간한 이후에도 잡지에 대한 열망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잡지를 통한 민중 계몽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1914년 10월 월간 종합잡지인 『청춘』을 발행하였다. 물론 편집 겸 발행인은 최창선(崔昌善)이었으며, 인쇄소는 신문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잡지를 주재한 것은 최남선이었다. 최창선은 최남선의 형이다.
『청춘』은 종합 월간지답게 다양한 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과학, 역사, 소설, 세계문학, 시조, 한시, 소화(笑話), 화보(畵報), 해외토픽 등 가히 박람회의 도록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종합잡지였다. 하지만 『청춘』에는 반복되는 글이 몇 편 있다. 과학 분야에서는 「세계의 창조」, 문학 분야에서는 「세계문학개관」, 잡문으로 「태서소림(泰西笑林)」 즉 서구의 우스운 이야기, 화보에는 「세계대도회 화보」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런 구성이야말로 세계를 통해 식민지 조선을 상대화하려는 『청춘』의 전략인 셈이었다.
세계를 알아야 식민지 조선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청춘』이 지향하는 바였다. 이런 『청춘』의 지향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글은 최남선이 쓴 「세계일주가」였다. 「세계일주가」는 『청춘』 창간호 부록으로 실린 7.5조의 4행 2연을 한 매듭으로 한 운문 가사였다. 「세계일주가」는 최남선의 상상의 세계일주였는데, 실제 세계 여행의 코스와 거의 흡사하게 짜인 여정은 크게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서울(한양)→평양→중국→러시아→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스위스→그리스→프랑스→벨기에→영국→스코틀랜드→아일랜드→미국→일본→서울(한양). 그야말로 5대양 6대주의 횡단이었다.
그렇다면 최남선은 장장 63면 분량의 「세계일주가」를 왜 썼던 것일까. 최남선은 “세계 지리 역사 상에 요긴한 지식을 얻으며 아울러 조선이 세계 교통 상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할” 의도로 「세계일주가」를 썼다고 말한다. 동북아시아의 변방에 지나지 않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세계 지리의 중요한 거점으로 재정립하려는 기획의 산물이 「세계일주가」였다. 물론 운문 가사와 삽화(사진)를 덧붙여 운문 가사를 통한 암송식 세계지리교육은 최남선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었다. 이미 일본의 계화사상사였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1869년 집필한 세계지리 교과서『세계국진(世界國盡)』에서 시도된 바가 있었으며, 서구에서도 널리 유행한 방식이었다.
또한 『청춘』은 당시 조선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문학작품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세계문학개관」의 첫 회에 번역된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었다. 물론 축약 번역이었고, 제목도 「너 참 불상타」로 바뀌었다. 이후 톨스토이의 『부활』(「갱생」),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돈기호전기(頓基浩伝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캔터베리記」) 등이 축약 번역되어 실렸다. 또한 『청춘』에는 많은 양의 서적 광고가 실렸다. 『수호전』, 『옥루동』을 비롯해서 『플랑드르의 개』의 번안인 『불쌍한 동무』와 『톰아저씨의 오두막 집』의 번안인 『검둥이 설움』의 광고가 실렸으며, 이광수의 『무정』은 몇 차례에 걸쳐 실렸다.
『소년』이 최남선 기획의 1인 잡지였다면, 『청춘』은 일종의 ‘청춘 그룹’이 이끌어간 잡지였다. 최남선은『청춘』에 이르러 당대의 뛰어난 문인과 사상가들을 새로운 필진으로 초빙하였다. 가장 먼저 이광수와 홍명희가 ‘청춘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후에 현상윤, 진학문, 김여제 등이 ‘청춘 그룹’에 합류하였다. 이 중에서 최남선, 이광수, 현상윤 세 사람이 『청춘』을 이끌어 가는 핵심 멤버였다. 현상윤의 「박명」과 「핍박」,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 「소년의 비애」, 「윤광호」 등이 『청춘』의 조선 문학 코너에 자리를 잡았다.
1914년 창간된 『청춘』은 1915년 제6호에 이르러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국시(國是) 위반이란 구실을 들어 『청춘』을 정간시켰으며 뒤이어 허가를 취소하였다. 이로부터 2년간 『청춘』은 휴간을 한다. 그리고 1917년 5월에 제7호인 속간호를 낸다. 이때부터 『청춘』에는 현상문예 광고가 실리게 된다. 『청춘』의 현상문예제도는 일차적으로 『청춘』을 구독하는 독자층의 확대를 꾀하는 일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목적은 『청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선 근대 문학을 이끌어갈 ‘문단’을 제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청춘』의 꿈은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인해 1918년 9월 16일자로 그 꿈을 접고 만다. 하지만 『청춘』을 통해 등단한 방정환, 이상춘, 강용흘, 최서해, 주요한, 방인근 등은 훗날 식민지 조선의 근대 문학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작가로 거듭났다.
『청춘』이 서구 문학을 전범으로 한 조선 근대 문학의 창출에 힘을 썼던 이유는 1910년대라는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근대적 열정, 정치적·사회적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다. 문학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지식인들의 숨죽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의 통로였던 셈이었다. 바로 그 통로의 입구에 『청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조남현 지음, 『한국문학잡지사상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최덕교 엮음, 『한국잡지백년』, 현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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