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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사건
김성환 | 동아일보7705, 1979.08.13
YH사건 , 김영삼 , 국가모독죄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노동자 1명이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8월9일부터 11일까지 벌어졌던 YH사건이 그것이다. 역사에는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여는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이 김영삼 의원의 제명파동으로 이어졌고 또 제명파동은 부마민중항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에 오르면서 대한민국 최대의 가발수...

국립중앙도서관│고바우현대사 3권 312p

내용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노동자 1명이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8월9일부터 11일까지 벌어졌던 YH사건이 그것이다. 역사에는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여는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이 김영삼 의원의 제명파동으로 이어졌고 또 제명파동은 부마민중항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img_YH무역사건
 

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에 오르면서 대한민국 최대의 가발수출업체로 부상하였던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 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는다. 1975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회사는 1979년 3월 자진 폐업을 공고한다. 이에 노조는 회사 정상화 방안을 채택하여 YH무역을 회생시키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나 회사 측과 정부 당국의 무관심 및 무성의한 태도로 노조는 그해 4월13일부터 장기농성에 들어간다.
노동자 172명은 8월9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한다.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킨다.
 

경찰은 이틀 동안 대치하다가 새벽 2시경 1천여 명의 무술경관을 신민당사에 투입하여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강제로 연행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당원, 기자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10여명의 여성 노동자와, 30여명의 신민당원, 12명의 취재기자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같은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당시 신민당은 여러 차례 보사부 장관 등 당국에 성의 있는 해결책 제시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강제진압을 결정한다. 노동자들이 창틀에 매달려 항의하는 것을 김영삼 신민당 총재 등 국회의원들이 진정시키고 대책을 논의하던 중 무장 기동경찰이 당사에 돌입하여 울부짖는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101호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경찰의 강제 해산작전은 무자비한 폭력 사용으로 사회에 큰 물의를 빚었으며 결국 정국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경찰은 그해 8월17일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 이 회사 노조간부를 구속하고 배후조정자로 도시산업선교회 소속의 인명진 목사 등 7명을 구속한다. 사건 직후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가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반유신투쟁에 나서게 된다. 
 

img_YH무역사건2김성환 화백은 1979년8월13일자 고바우영감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을 강한 톤으로 비판한다. 첫 번째 칸에서 그는 여성노동자들이 ‘민생고’라고 적힌 카드를 들고 “민생고 해결”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그린다. 두 번째 칸에서는 “우리도 고생이다”라고 말하는 투구까지 쓴 경찰이 몽둥이에 글을 쓰고 있다. 세 번째 장은 그림이 없다. 그저 “뚝딱”이라는 단어가 굵은 글씨로 칸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글씨로 11일 새벽에 발생한 폭력적인 진압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선 ‘민생고’라고 적힌 카드가 부셔져 있고 그 위해 경찰봉이 하나 놓여 있다. 경찰봉에는 ‘경찰고(警察苦)’라고 적혀 있다. 고바우는 그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김 화백은 며칠 뒤 고바우영감에 다시 YH사건을 등장시킨다. 기자 몇사람이 “기자폭행경관 색출하라”고 경찰에게 항의를 한다. 그러나 경찰의 반응은 없다. 경찰 고위간부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칸막이를 드러내자 의자에는 몽둥이 하나가 놓여있다. 기자들 또한 망연자실한다. 
 

한편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YH사건을 두고 농성을 벌이는 와중에 신민당의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김영삼 총재의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한다. 전당대회에서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김영삼 총재 대신 당시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일이 발생, 신민당이 혼란에 빠진다. 당시 이 사태의 본질은 ‘선명’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 총재에 골머리를 앓던 여권의 고민과 이철승 등의 비주류의 시샘이 결합되어 빚어진 정치사건이라는 것이다. 정국이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은 법원 결정 이후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을 여당인 공화당이 문제 삼으면서부터이다. 공화당측은 뉴욕타임즈지와의 회견에서 김 총재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의사를 밝힌 것을 두고 사대주의적 발언을 했다고 하여 국가모독죄로써 형사처벌을 하려했다. 그러나 미 국무성은 김 총재를 구속하지 말 것을 성명으로 발표하였고, 결국 그해 9월22일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160명 전원의 이름으로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이 제출되고 10월4일 의원직 박탈을 의결한다. 이 과정 또한 놀랍도록 신속하게 처리된다. 신민당 의원들의 국회 본회의장 점거에도 불구하고 백두진 당시 국회의장은 구두로 법제사법위원회에 징계동의안을 회부하고, 이후 3분 후에 소집된 법제사업위원회에서 야당의원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40초 만에 전격적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김영삼 총재가 의원직 제명되자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집단사퇴서를 제출하게 되고 부산과 마산지역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결국 10월16일과 20일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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