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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김성환 | 동아일보5213, 1970.11.21
전태일 , 근로기준법 , 노동문제 , 바보회
“올해는 가난하고 외로운 서민층에도 절망 아닌 희망의 빛을 고루고루 비쳐야겠다. 일을 원하는 젊은이에게는 일자리를, 일하는 젊은이에게는 먹고 살 수 있는 노임이 고루고루 제때에 배분되어 가난한 가정의 행복이 되어야겠다. 13억수출목표의 숨은 일꾼들이 제대로 존중되는 새해가 되어야겠다. 전태일군의 원혼이 미소 짓고 고이 눈감을 수 있는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해가 되어야겠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

국립중앙도서관│고바우현대사 2권 309p

내용

“올해는 가난하고 외로운 서민층에도 절망 아닌 희망의 빛을 고루고루 비쳐야겠다. 일을 원하는 젊은이에게는 일자리를, 일하는 젊은이에게는 먹고 살 수 있는 노임이 고루고루 제때에 배분되어 가난한 가정의 행복이 되어야겠다. 13억수출목표의 숨은 일꾼들이 제대로 존중되는 새해가 되어야겠다. 전태일군의 원혼이 미소 짓고 고이 눈감을 수 있는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해가 되어야겠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이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2시경,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재단사 청년이 스물 둘의 젊은 나이에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자신의 몸이 화염에 휩싸여있음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 다음날 그는 자기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다짐을 받은 후 명동 성모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전태일은 청계천 동화시장, 평화시장, 통일상가 등 400여 피복제조상의 작업환경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개선해 달라고 주장하며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태우며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에는 앞에서 소개한 기사 외에도 “6.25가 1950년대를 상징하고, 4.19가 1960년대를 상징하듯이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고 시대를 예측하기도 했다. 
 

김성환 화백의 전태일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서울대 법대 학생 100여명이 모임을 갖고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성모병원 연안실로 달려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를 만나 인수의 뜻을 밝히고 허락을 받았다. 당일 오후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 400여명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11월20일에는 서울 법대·문리대생과 이대생들이 법대 구내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갖고 기업주와 어용 노총, 지식인들을 고발하며 항의 시위에 나서자, 기동경찰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고대와 연대에서도 시위가 있었고, 이날을 기하여 서울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것은 모두 한 젊은이의 죽음이 가져온 여파가 대학가에 거세게 밀려온 때문이었다.img_근로조건 개선
 

전태일의 분신이전까지 학생운동권은 물론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 사회단체, 심지어는 언론에서까지 노동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적 과제 앞에 노동자들은 법률에 정한 자신들의 권리를 유린당했고, 법률에 의거한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행위마저도 봉쇄당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다. 여기에 경종을 울린 것이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처음 청계천 평화시장에 들어와 피복점 보조로 취업하였고 이듬해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가 되었다. 하지만 하루 15시간의 중노동 속에 폐병이 걸려가는 자신들의 동료가 해고당하는 것을 보고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 ‘바보회’라는 노동자들의 모임을 결성한다. 그러나 업주들은 그를 위험분자로 낙인찍어 해고시킨다. 물론 ‘바보회’도 와해된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에 돌아온 전태일은 ‘바보회’를 재정비하여 ‘삼동친묵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10월6일에 노동청장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진정서는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으나 요구조건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전태일씨가 선택한 길은 11월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으며, 화형식이 삼엄한 경비와 경찰의 몽둥이에 밀리던 중, 한 되 분량의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전태일씨는 국민은행 앞길로 달려가 외쳤던 것이다.
 

김 화백은 1970년 11월21일자 고바우영감에서 ‘근로조건 개선하라’라는 내용의 만화를 싣는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에도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학생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시위가 확대되어가는 상황이었다. 만화의 첫 장면은 대학생들이 ‘근로조건 개선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으며 먼발치에서 고바우가 이를 바라보고 있다. 두 번째 장에서는 몽둥이를 든 경찰들이 등장한다. 고바우는 몸이 아찔해진다. 세 번째 장에선 경찰들이 시위중인 학생을 몽둥이로 때리고 있으며 한 경찰관에게 고바우가 “아니 노동청서도 개선한다고 한건에 왜 때리는거요?”라고 묻는다. 마지막 장에서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정권의 시각이 노출된다. 그 경찰은 ‘개선한다. 알간?’이라고 적힌 몽둥이를 고바우에게 보여주며 “때린 게 아니라 이걸 보인 겁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고바우는 기절초풍을 할 지경에 이른다. 이것이 당시 대한민국이었다. 전태일씨는 노동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폭제로 작용하였고, 1995년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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