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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승리, 호남길목 정암진(鼎巖津) 전투
호남길목 , 정암진전투 , 임진왜란 , 난중잡록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선조 25) 6월 초순에 곽재우(郭再祐)의 의병부대가 남강을 건너려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 육지에서의 첫 승리, 정암진 전투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선조 25) 6월 초순에 곽재우(郭再祐)의 의병부대가 남강을 건너려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곽재우 의병 부대는 임진왜란 때 의병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이었고, 이 전투의 승리는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의 첫 승리였다.
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 연패하면서 바다를 통한 호남 진출에 실패한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호남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경상도 함안, 의령을 지나 전라도 운봉, 남원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는 것이 일본군의 호남진입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령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에서 곽재우 의병에 막히면서 경상도를 통해 호남에 진입하려던 시도는 실패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군사를 돌려 충남 금산을 거쳐 전주성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정암진에서 곽재우 부대의 승리는 육로로 호남에 들어가려던 일본군의 첫 시도를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어진 의병 창의의 도화선이 되었다. 곽재우 의병의 뒤를 이어 일어난 호남과 충청도 의병의 끈질긴 공격으로 일본군은 끝내 금산에서마저 철수하고 말았다. 정암진 전투는 임진왜란기에 호남을 지켜낸 긴 항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암진 전투 경과와 관련기록

 

임진왜란 개전 당시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의 양면으로 한반도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일본의 제6군이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는 원래 바다를 통해 전라도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연패하며 바닷길이 막히자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고바야카와는 휘하의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함안, 의령을 거쳐 호남을 향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이 육로를 통한 호남 진입 계획을 세우던 5월 초순 무렵 경상도의 상황은 복잡하였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세에 놀란 관군은 대부분 흩어져 버렸고, 이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는 토적으로 몰려 의병을 해체하고 지리산으로 피신해 있었다. 지방관이 도주하여 비어 있는 초계성(草溪城) 관청에 들어가 병기와 군량을 수습하고 의병의 군비로 충당하였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를 토적으로 보고하고 체포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로 부임하고서야 수습이 되었다. 김성일은 곽재우의 의병 창의를 크게 평가하고 활동 재개를 촉구하면서 의령의 관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맡겼다. 김성일의 빠른 조치로 곽재우는 일본군의 호남 진격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위기를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호남 진격을 시작한 안코쿠지의 부대는 5월 하순경 함안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인 의령으로 진격하였다. 6월 초순 안코쿠지의 2000여 명 병력은 남강을 건너는 나루인 정암진에 도착하였다. 안코쿠지는 지역 주민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었다. 이에 곽재우는 한밤중에 이 나무 푯말들을 늪지대로 옮겨두고 정암진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안코쿠지 부대의 선봉대는 푯말을 따라 늪지대로 들어갔다가 곽재우 의병부대에 전멸되었고, 겨우 남강을 건넌 안코쿠지의 본대 역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곽재우 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도주하였다.
이후에도 곽재우는 남강을 경계선으로 안코쿠지 부대와 마주 보고 대치하면서 소규모 전투들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된 곽재우 부대의 저지로 남강을 건너는 것이 여의치 않자 안코쿠지 부대는 결국 의령을 통한 호남 진입을 포기하고 성주(星州)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한양에서 내려와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카와의 본대와 합류하여 금산에서 재차 호남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곽재우를 따라 일어난 호남과 충청도의 의병들과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계속된 항쟁으로 일본군은 끝내 호남 진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전쟁 초기라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곽재우 스스로 전공을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않아 전투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에 정암진 전투의 구체적인 전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곽재우의 장인인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의병 창의 과정과 초기 의병활동 내용이 전해지며, 정유재란 때 곽재우의 서기였던 배대유가 쓴 전(傳)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 배대유가 쓴 전(傳)은 『망우당집(忘憂堂集)』 초간본 부록에 실려 있다. 곽재우와 가까운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긴 하지만, 이로와 배대우 모두 정암진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며 사건 순서 등에 조금씩 오류가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는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정암진을 거점으로 한 곽재우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사초(寄齋史草)』,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선조실록』 등에도 언급이 있으나 ‘정암진을 지킨 것은 곽재우의 공이다.’ 정도의 간단한 언급일 뿐이다.


 

3)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나타난 정암진 전투

 

『난중잡록(亂中雜錄)』은 남원 출신 조경남(趙慶男)이 쓴 기록으로, 1582년(선조 15) 12월부터 1610년(광해군 2)까지 중요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저자인 조경남은 임진왜란 5~6년간 남원부의 서기직으로 근무했고, 정유재란 때는 부대를 이끌고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이유로 임진왜란기에 남원부에 전해져 오는 각종 전황 등을 상세히 살피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8년(광해군 10) 년 기록을 정리하여 『난중잡록』이라 하고 자찬 서문을 썼다. 이후 인조대 정묘, 병자 호란기의 내용을 써서 『속잡록(續雜錄)』이라 칭했다.
『난중잡록』은 시문(詩文)이나 서간문 등이 포함된 문집이 아니며, 임진왜란기 전황을 중심으로 국가적이거나 공적인 사건만을 연월일에 따라 기록하고 있다. 『난중잡록』에는 의병의 창의록 등의 자료는 물론이고 의병의 조직, 군대 수, 의병 상호 간 관계, 군량과 병기 문제 등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난중잡록』에는 관군의 전투상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남원이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이면서 또한 경상도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서 중앙정부와 경상도 사이의 공문들 중 상당수가 남원을 거쳐 갔기 때문이다. 정유재란기 남원성 전투의 경우에는 『난중잡록』에만 유일하게 그 기록이 전한다. 이 때문에 『난중잡록』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 참고자료로 이용되었으며, 현재에도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난중잡록』에는 정암진 전투의 구체적 전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다음 기록들을 통해 곽재우가 처음의 정암진 전투 이후에도 계속 남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안코쿠지 부대의 남강 도하를 막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倭船十八艘 自雙山驛 在玄風北十五里 上來 自稱政丞安國寺行次…至鼎津爲郭再祐所却退 由靈山 昌寧將渡歧江 因稱全羅監司向湖南 又送先文迎待云 草溪宜寧等士民恐惧 或竄山不出 愚者或有迎候之語 郭再祐又馳到賊頭 引出士民 諭以義理 發帑餉士 嚴兵設備 賊見郭兵部伍嚴整 惧曰 此必鼎津紅衣將軍 無復可渡 退由雙山 向星州

(『난중잡록』권 1 임진 상 6월 5일)
난중잡록(趙慶男 撰, 1964, 趙台熙方 발행, 古2153-7), vol 1, 114쪽.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가 올라와 정승(政丞) 안코쿠지(安國寺)의 행차라고 스스로 부르며…정암진에 이르러 곽재우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 의령 등지의 사민(士民)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대오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郭再祐與賊倭安國寺 自鼎津隔江相距 賊不得渡 沿江上去 再祐亦相望追趕 及至星州安彥驛路 率精兵 竊發交戰 彼衆我寡僅獲數級而退

(『난중잡록』권 1 임진 상 6월 19일)
난중잡록(趙慶男 撰, 1964, 趙台熙方 발행, 古2153-7), vol 1, 121쪽. 

 

곽재우가 왜적 안코쿠지와 정암진에서 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난중잡록(亂中雜錄)』(조경남)
『용사일기(龍蛇日記)』(이로)
『망우당집(忘憂堂集)』(곽재우)
『기재사초(寄齋史草)』(박동량)
『징비록(懲毖錄)』(유성룡)
김강식(2001), 16세기 남명학파의 의리인식과 곽재우의 의병활동, 『부산사학』,제40·41합집.
최효식(2004), 임란기 망우당 곽재우의 의병항전, 『신라문화』,24.
김성우(2011), 忘憂堂 郭再祐에 관한 ‘불편한 진실’과 임진 의병 활동에 대한 재평가, 『한국사학보』, 42.

 


 

관련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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