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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칼날을 휘두른 일본군에 참패한, 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
2차 진주성전투 , 임진왜란 , 진주성 , 난중잡록
2차 진주성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이 6만여 명의 성 안의 주민과 함께 많은 수의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1)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2차 진주성전투

 

2차 진주성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이 6만여 명의 성 안의 주민과 함께 많은 수의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하여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을 비롯하여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 대부분의 지도부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1592년 음력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이 진주성에서 제1차로 전투를 벌인 결과 조선군이 일본군을 대패시킨 이후 일본군은 이를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1593년 음력 6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총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조선군은 물론이고 성 안의 주민과 살아있는 동물까지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심한 손실을 보아서 전라도로의 진출은 좌절되었고, 조선군이 부산으로 이동하자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2) 2차 진주성전투의 결과와 관련 문헌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과 일본은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다. 1593년 음력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수복에 성공하여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한양까지 밀려나게 되고 강화교섭을 통해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1592년 음력 10월에 치른 1차 진주성전투의 패배 만회를 위해 남하와 함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격을 계획하였다. 1593년 음력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일본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여 20일에는 일본군의 선봉이 마현(馬峴)으로 진출하였고, 21일에는 본대가 마현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이 알려지자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군을 접대하기 위해 상주에 머물고 있다가 진주성으로 복귀하였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이 발분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또한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먼저 와 있었고, 이어 의병장 강희열(姜希悅)이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에는 3천여 명의 군사와 6만여 명의 주민들이 수성하기 위해 집결하였으나,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조선군과 일본군의 진주성을 둘러싼 9일간의 전투는 시작되었다. 
음력 6월 21일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였고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투를 전개하였는데, 성안에서는 부대를 편성해 구역을 나누어 성을 지켰다. 황진, 이종인, 장윤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응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날 일본군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23일 일본군은 낮에 3회, 밤에 4회 공격을 가하였는데, 명군은 거창·남원 등지에 있었음에도 진주성의 위기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24일 일본군은 진주성의 동서로 진을 쳐서 성을 가까이서 포위하였다.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토산(土山)을 만들고 망루(望樓)에서 성을 내려다보면서 탄환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성안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해 토산을 쌓아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일본군에게 항전하였다. 26일 일본군은 나무궤짝에 생피(生皮)를 둘러 이것으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子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큰 돌을 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다.
음력 6월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언덕을 축조하여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조선군에게 사격을 가하였고, 이날부터 귀갑차(龜甲車)로 성벽 밑까지 육박한 뒤 성문을 뚫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종인이 뛰어난 완력으로 연달아 일본군을 죽이고 조선군이 기름과 횃불을 던져 일본군에 맞서자 일본군은 잠시 물러갔다. 28일에는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밤에 일본군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는 것을 방어하였으나 황진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투의 마지막 날인 29일 일본은 귀갑차(龜甲車)를 앞세워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장수들과 조선군들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무기를 남강에 버리고 자결을 하였다. 3천여 명의 군사와 6만여 명의 주민들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멸되고 말았다.
2차 진주성전투와 관련된 문헌은 『선조실록(宣祖實錄)』, 『징비록(懲毖錄)』, 『난중잡록(亂中雜錄)』 등이 있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동안 조정에서의 전쟁과 관련된 여러 논의와 전장에서 한 보고들이 기록되어 있다. 『징비록』은 유성룡(柳成龍)이 전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한 것으로 7년에 걸쳤던 임진왜란의 원인 · 전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일기 형식으로 쓴 것으로 임진왜란 · 정유재란 동안의 국내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3)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나타난 2차 진주성전투

 

『난중잡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13세 때인 1582년(선조 15) 12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까지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부분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졌으며, 이 밖에도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중요 전란과 당시의 풍속 및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잡록』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후반 5권을 『속잡록』으로 구분하고 있다. 『난중잡록』은 조선시대 전쟁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난중잡록』에 2차 진주성전투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다음의 인용문은 많은 수의 일본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적은 수의 조선군의 모습과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성안의 주민들과 장수와 조선군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先鋒之賊數百騎 直到馬峴峰上 耀兵馳突 翌日大賊長驅而進 數不可量 勢如風火 一時圍城 侵攻甚急 城中應戰殺退 日日如是 見下 受圍累日 賊勢益熾 蟻子不通 消息永隔 將士疲困 食息無暇 夜夜更更 賊衆吹角相應 高聲大呼 一時放丸亂落城中 有似轟雷雨雹 聲震天地 移時而止 及朝視之 我軍死者相枕 一日慶會千鎰登樓瞻望曰 援兵大至矣 諸將大喜 卽鳴大鍾 爭望遠近 百里簇擁者 皆妖鋒矣

(『난중잡록(亂中雜錄)』 2 계사년 상 만력 21년 선조 26년 6월 21일)
『난중잡록』 vol.1 古2153-7 348쪽 

 

적의 선봉에 있던 기병(騎兵) 수백 명이 바로 마현(馬峴)의 봉우리 위에 이르러 병장기를 번뜩이며 말을 달려오더니, 이튿날에 많은 적이 길게 행렬을 지어 오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형세가 바람 앞의 불꽃 같았다. 일시에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기를 심히 급하게 하니, 성중에서 응전하여 물리쳐서 날마다 이렇게 하였다.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에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니, 개미 새끼도 통할 수 없어 소식이 아주 막히고 장수와 군사는 피곤하여 밥 먹고 쉴 겨를이 없다. 매일 밤 시각마다 적들이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고 높은 소리로 크게 외치며 일시에 총을 쏘매 성중에 어지러이 떨어지니 뇌성과 우박 같고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한참 만에 그쳤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가 쌓여 있었다. 하루는 경회와 천일이 누각에 올라 바라보고 말하기를, “구원병이 많이 온다.” 하니,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큰 종을 울리며 앞다투어 바라본즉, 멀고 가까운 1백 리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적병이었다.



 

賊兵陷晉州 倡義使金千鎰……知州徐禮元等 皆死之 賊連日屠戮不能盡 詐曰 避入司倉大庫者免死云云 愚民被迫 競入庫舍 賊一炬燒之 南原人從諸義兵 入晉城者 三百餘名 自南江泳出生還者 鄭麒壽等數人而已 賊盡毀城濠 方賊入城 崔慶會金千鎰走保矗石樓上 將士咸集 賊兵厮殺以進 李潛金俊民等弓矢已盡 直以竹槍相對搏戰 賊兵暫不能近 竟力詘而死 千鎰等相抱投江溺死云

(『난중잡록(亂中雜錄)』 2 계사년 상 만력 21년 선조 26년 6월 29일)
『난중잡록』 vol.1 古2153-7 349쪽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진주 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었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란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 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으로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 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매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 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매,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었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난중잡록(亂中雜錄)』 
『징비록(懲毖錄)』 
조원래(2010).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 국립진주박물관. 
지승종(2011). 『진주성 전투』. 문화고을.


 

 

관련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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