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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수복의 발판 행주대첩
행주대첩 , 임진왜란 ,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음력)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1) 일본군을 한성에 가두다,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음력)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1월 말에 평양성을 수복한 조명연합군이 한성을 향해 남하하자 한성 주변의 조선군 역시 한성을 향해 전진하였고, 수원 독산성에 주둔 중이던 권율의 부대도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하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하고 개성으로 물러나자, 일본군은 기세를 몰아 한성과 가까운 행주산성의 권율 부대를 공격하였다. 권율의 부대는 4천의 병력으로 3만 일본 대군을 맞아 혈투를 벌였다. 전투는 새벽 6시 무렵부터 저녁 6시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은 끝내 행주산성을 점령할 수 없었다.
이 전투는 벽제관 전투로 올랐던 일본군의 사기를 다시 꺾어 내렸고, 이후 일본군은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한성 안에 고립된 채 머물렀으며 군량 부족 등으로 심한 곤란을 겪었다. 결국 두 달 후에 일본군은 한성을 버리고 철수하였다.

 

2) 행주대첩 전투 경과와 관련기록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의 수군에 막혀 호남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한 후 다시 군사를 돌려 육로로 호남을 재차 공략하였다. 그러나 곳곳에서 봉기한 의병과 전열을 가다듬은 호남의 관군 등에 막혀 끝내 호남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경상도와 한성방면으로 물러났다. 호남 방어의 일등 공신이었던 권율(權慄)은 일본군이 물러간 뒤를 쫓아 호남의 군사들을 이끌고 전진하여 충청도 직산을 거쳐 경기도의 독산성(禿山城)에 주둔하였다.
이후 평양성을 수복한 조명연합군이 한성을 향하여 남진하자, 한성 근처의 조선군들도 이에 호응하여 전진하였다.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의 부대 역시 이때 한성 서북쪽의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남하하던 명군이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한 후 개성으로 되돌아가 버림으로써, 상황은 급변하였다. 수세에 몰려 있던 일본군은 다시 사기가 올랐고, 기세를 몰아 한성 주변에 포진한 조선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대상이 바로 권율이 주둔한 행주산성이었다. 
일본군은 총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비롯하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 일본군 지휘관의 대다수가 행주산성 공격에 참가하였고, 한성에 주둔한 전체 병력 5만 중 3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에 비해 당시 행주산성을 지키던 조선군의 병력은 관군과 승군(僧軍), 의병, 그리고 주변 백성까지 포함하여 대략 4천 명을 조금 넘는 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에 있던 명군의 병력마저 평양을 향해 회군하고 있던 상황에서, 행주산성의 권율 휘하 군사들은 오로지 자력으로 3만의 대군과 싸워야만 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7개의 부대를 3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서로 번갈아 공격해 왔는데, 새벽 6시경 고니시가 이끄는 제1대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다. 고니시의 1대에 이어 제2대와 3대가 연이어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큰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에 총대장 우키다가 직접 제4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는데, 이 때 외부의 제1성책이 무너지고 적이 제2성책까지 접근하여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권율의 독려로 우키다를 집중 공격하여 우키다가 부상을 입었고, 제2대 대장 이시다도 부상을 입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연이어 제5, 6, 7대가 공격해 왔고, 서북쪽 자성(子城)의 승군쪽을 뚫고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부대가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권율이 직접 나서 총공격을 명하면서 전투는 백병전이 되었고, 성의 다른 쪽에서도 화살이 다해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라다 주는 돌을 화살대신 던지며 싸우고 있었다. 새벽부터 이어진 전투로 미리 대비해 두었던 방어선이 무너졌고, 성내의 무기도 다하였으며 군사들도 지쳐 있어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선조는 나중에 권율의 수하 신경희(申景禧)로부터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이때의 위급함에 대해 “네가 거의 죽을 뻔했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때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한강을 따라 배 두 척을 몰고 와 화살과 무기를 보충해 주었다. 무기가 보충되는 것을 본 일본군은 원병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일본군은 행주산성 주변에 진을 치지 않고 바로 한성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는 한성 주변에 주둔해 있는 조선군들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실록에서는 “여러 장수들이 구원하지는 않았으나 장수들의 성세가 서로 의지가 되었기 때문에 명군이 물러갔음에도 일본이 인지하지 못하여 이튿날 다시 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당시 조선군의 병력은 한성의 일본군을 스스로 몰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사력을 다해 행주산성 공격을 막아낸 권율의 부대는 재침을 피하여 파주 산성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날 행주산성에서의 혈전은 일본군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고, 이후 일본군은 군량과 기타 필요 물품을 구하려는 목적 외에는 한성 밖으로 대규모 출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마저도 한성 주변 곳곳을 지키며 기습 공격을 해 오는 조선군들로 인해 여의치가 않아 일본군은 군량과 각종 보급에 큰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압박이었으며, 결국 명군과 협상을 통한 철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행주산성 공격에 실패하고 두 달 후 일본군은 한성에서 철수하여 경상도로 물러났다.
행주대첩 전투에 대한 기록들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 『기재사초(寄齋史草)』등 임진왜란에 대한 1차 자료들에 언급은 있으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정도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당대의 기록 중 전투의 상황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이다. 권율이 올린 장계, 그리고 권율이 보고를 위해 보낸 수하 신경희와 선조가 주고받는 문답을 통해서이다. 조선 정부의 관심은 벽제관에서 패하고 물러난 명군의 동향에 집중되어 있던 중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 뜻밖의 대규모 전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대의 기록인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나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 실린 권율 유사(遺事)에는 묘사가 좀 더 자세하나 내용은 『실록』과 동일하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전투 상황에 대한 기록은 간략하나 그 전후의 상황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전체 전황을 살필 수 있다.

 

3) 『징비록(懲毖錄)』에 나타난 행주대첩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던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은거해 있으면서 썼으며, 『시경(詩經)』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제목은 유성룡이 이 기록을 남긴 목적을 잘 보여준다. 1633년(인조 11) 『서애집(西厓集)』을 간행할 때 그 안에 수록하였고, 이후 1647년(인조 25)에 임진왜란기의 장계 등 기타 기록을 모아서 별도의 『징비록』을 간행하였다. 이때 간행된 『징비록』은 16권 본이며, 다른 판본으로 장계 등의 기록을 뺀 2권짜리가 있다
『징비록』의 내용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대일 관계인 교린사정(交隣事情)을 책 앞부분에 기록하여 두었는데, 이는 전쟁 발생의 원인을 밝혀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한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은 간행되기 전의 초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저자가 간행에 앞서 의식적으로 추가해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징비록』에는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 특히 명과 조선 사이에 오간 기밀·고급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군 참전 이전 조선군의 전투 상황, 의병의 활동 등 조선인들의 활약을 비롯하여 정유재란기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전쟁 전 기간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고급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함께 전쟁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징비록』은 『선조수정실록』, 『이충무공전서』 등을 편찬하는데 중요한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청나라에까지 알려져 널리 읽혔는데, 일본의 경우는 『조선징비록』이란 이름으로 자체적으로 간행되기까지 하였다. 『징비록』은 현재에도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유성룡은 행주대첩 당시 영의정 겸 평안·충청·경상·전라 4도의 도체찰사로서 전쟁 상황과 군사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무렵의 전황에 대한 정보는 유성룡이 가장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조정에 행주 대첩이 알려진 것도 유성룡이 올린 보고를 통해서였다. 다음은 유성룡이 기록한 행주산성 전투인데, 앞부분의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군들이 산성을 거점 삼아 전진하고 있었으며 권율이 한성 수복을 목적으로 행주산성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懲李洸等 野戰而敗 至水原 據禿城山城 賊不敢攻 及 聞天兵將入京城 渡江陣于幸州山城 至是 賊從京城大出攻之…矢雨下 賊分爲三陣 迭進 皆敗 會日暮 賊還入京城 慄令軍士取賊屍…而泄其憤

(『징비록』권 3,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물리치다)
징비록(柳成龍 著, 1695, 古2158-8), vol 3, 21쪽 

 

권율은 이광 등이 들판에서 싸웠다가 패한 것을 징계하고서 수원에 도착하여서는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적은 감히 이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장차 한양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에 이르러 적이 한양에서 대거 나와 행주산성을 공격하니…화살이 비 오듯 날아오고 적은 세 진영으로 나누어 차례로 공격하여 왔지만 모두 아군에게 패하였다. 해가 지자 적은 한양으로 되돌아갔으며 권율은 적의 시체를 거두어…원한을 풀게 하였다.

 

다음은 행주산성 전투가 마무리된 후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재침을 피해 행주산성을 나온 권율의 부대를 비롯하여 경기 지역의 조선군을 재배치하고 이후 한성의 적을 고립·압박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곤란을 겪었으며 결국 한성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聞賊欲更出期必報 甚懼 毀營柵 率軍至臨津 從都元帥金命元…登坡州山城 觀形勢… 而地形斗絶可據 卽令權慄 與巡邊使 李薲 合軍據守 以遏賊兵西下 防禦使 高彦伯…等 爲遊兵 遮蟹踰嶺 義兵將 朴惟仁…等 從右路伏於敬陵昌陵之間 各以其兵出沒抄擊 賊多出則避而不戰 少出則隨處邀擊 自是 賊不得出城燋採 馬死者甚多

(『징비록』권 3,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물리치다)
징비록(柳成龍 著, 1695, 古2158-8), vol 3, 22쪽. 

 

적이 다시 공격하여 반드시 복수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병영의 목책을 부수고 군대를 이끌고 임진강에 이르러 도원수 김명원을 따랐다…파주산성에 올라 살펴보니…주둔할만하였기에 권율과 순변사 이빈에게 각자의 군대를 합쳐 여기에 주둔하면서 적병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차단하게 하고, 방어사 고언백과…등에게 유격대를 이끌고 해유령을 막게 하였다. 또한 의병장 박유인…등에게 오른쪽 길로 가서 경릉과 창릉 사이에 매복하여 각기 병사를 데리고 출몰하며 적을 공격하되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면서 싸우지 말고 적이 조금 나오면 여기저기서 맞아 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적은 성 밖으로 나와서 땔나무와 말 먹일 꼴을 모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죽은 말이 매우 많았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난중잡록(亂中雜錄)』(조경남)
『기재사초(寄齋史草)』(박동량)
『징비록(懲毖錄)』(유성룡)
『백사집(白沙集)』(이항복)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신경)
이장희(1999), 『壬辰倭亂史硏究』, 출판사 아세아문화사.
김경수(2012),『재조번방지』의 사학사적 고찰,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18호, 225-259.
김시덕(2013), 해제-『징비록』과 동아시아,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유연성(2014), 임진왜란기 한성 주변 전투의 전략적 의의, 『한일관계사연구』, 제48집, 93-130.

 

 

 

관련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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