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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죽음 영조를 위태롭게 하다, 이인좌의 난
영조 , 경종 ,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정국에서 배제된 소론의 강경파 인사들과 일부 남인들이 영조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李麟佐, ? ~ 1728)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난이 발생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1)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영조의 즉위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정국에서 배제된 소론의 강경파 인사들과 일부 남인들이 영조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李麟佐, ? ~ 1728)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난이 발생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은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 : 후일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독대[丁酉獨對]를 행하였다. 이에 경종 대의 정국은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과 이에 반대하는 소론이 대립하는 구도로 운영되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世弟 冊封)과 세제 대리청정을 강행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소론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의 핵심 인사들을 제거한 후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를 이끌었던 강경파 소론은 다시금 존재를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의 소론 강경 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가 준 게장을 먹고 독살되었으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의혹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 昭顯世子의 曾孫)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흉언을 퍼뜨려 전국적인 흉서와 괘서사건을 초래하였으며, 군사를 모집하고 조직을 갖추는 등 모반을 준비해 갔다.

 

2) 반란의 전개와 진압

 

1728편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본격적인 반란이 막을 올렸다.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었다. 아래에 인용한 실록의 기사는 청주성이 함락할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주목된다.

 

적이 청주성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하였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을축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0403015_006>

 

3월 14일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하여 경기도 각지에서 취군 현황이 속속 보고되자, 영조는 도성문을 폐쇄하고 경외(京外)의 관군을 동원해 서울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북상하던 중 관군을 만나 접전을 벌였으나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등에 의해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이인좌의 반란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을 하였는데, 영남 지방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李熊輔)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창(古縣倉)에서 일어나 안음현과 거창현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합천·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이에 경상감사 황선(黃璿)이 성주목사 이보혁 등으로 하여금 주변의 관군을 이끌고 가 토벌하게 함으로써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던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호남 지방의 반군 역시 박필현 등의 주도자들이 거병 전에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반란은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해 4월 19일 개선하였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

 

3) ‘무신년의 잔당(殘黨)’, 영조의 트라우마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장기간 재위하며 조선 후기의 중흥을 이끌었던 영조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대로부터 이어진 당파 간의 알력으로 인해 즉위 초반의 왕권은 매우 위태로웠다. 다행스럽게도 반란의 진압에 성공하여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후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영조는 성공적인 치세를 이룩하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반란의 상처는 단기간에 치유될 성격이 아니었으며, 빈번한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과 맞물려 크고 작은 모반 사건이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러한 모반 사건들은 곧잘 이인좌의 난과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되곤 하였는데, 그것은 영조를 비롯한 당국자들이 ‘무신년의 잔당들’에 의해 지속적인 분란이 야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록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영조의 치세 내내 그를 괴롭히는 트라우마와도 같았던 것이다. 아래의 실록 기사에는 이와 같은 사례가 담겨 있어 눈에 띈다.

 

사신은 논한다. ... <중략> ... 아! 무신년에 변고가 일어난 뒤로 흉역을 엄격히 토벌하고 성무(聖誣)를 통쾌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법망에서 벗어난 무리들이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임금에게 마구 욕을 하고 당을 지어 모역(謀逆)하는 자가 뒤를 이어 일어나 지극히 근심스럽고 위태로웠으니 후회한들 또한 미칠 수가 없었다. 

「영조실록」 35권, 영조 9년 8월 신미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wua_10908023_003>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죄를 씻어줌이 너 역시 지극하였다고 할 것이다. 네가 승지로 있었을 때 내가 늙은 것을 민망히 여겨 여러 해 동안 침체되었다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마땅히 감읍(感泣)했어야 했는데도 너는 얼굴도 꿈쩍하지 않아 내가 그때에 이미 네 마음을 알았었다.”하니,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경종이 서거하고 영조가 즉위하였던 1724년 : 인용자 주)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 5월 계사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105020_002>

 

사신(史臣)은 말한다. “세도가 불행하여 난역(亂逆)이 거듭 일어나 아주 흉악하고 절패(絶悖)하였는데, 신치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갑진년 8월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水刺)를 들기 싫어하는 징후가 점차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御廚)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었다. 이는 가을철 신미(新味)인데,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었다. 그 후에 지나치게 많이 들었다는 말이 밖으로 전해지자 이유익(李有翼)과 박필현(朴弼顯)의 무리가 이를 가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말을 만들어 내고, 몰래 심유현(沈維賢)을 사주하여 전파시켰다. 또 이천해(李天海)를 꾀어 어가(御駕) 앞에서 난언(亂言)을 하게 하여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핍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역적 신치운의 흉언의 근본인데, 게장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천해 같은 흉역도 말하지 못한 바였다. 아! 통분스럽다. 그 역시 사람인데 차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동조(東朝)께서 설사 게장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예삿일이요, 더군다나 올린 바가 또 어주(御廚)에서 올린 것이겠는가? 오직 우리 동조의 인자한 덕은 우리 경묘와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는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 5월 갑오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105021_001>

 

 

참고문헌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 
이성무 외,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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