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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임진왜란 , 평양성전투 , 징비록
넓게는 1592년 5월(선조 25, 음력. 이하 모두 음력) 평양성이 함락될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할 때까지 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졌던 네 차례의 전투 모두를, 좁게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를 말한다.

1) 전쟁의 판도를 바꾼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6월(선조 25, 음력. 이하 모두 음력) 평양성이 함락된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때까지 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졌던 네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만을 뜻하기도 한다.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끝에 조선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대에 평양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2차례에 걸쳐 평양성 수복을 위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전황은 약 7개월간 교착상태에 빠졌다. 1592년 12월 말 이여송이 이끄는 5만의 명군이 참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명나라 원병이 도착하자 조선은 모든 군사적 역량을 동원하여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며,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전투 끝에 고니시 부대가 항복을 선언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의 부대가 먼저 한성으로 후퇴하였고, 이어서 함경도 쪽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도 한성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행주산성에서의 분투 등에 힘입어 결국 일본군은 한성에서도 철수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전세를 바꾼 결정적 요인이 명나라 대군의 참전에 있었던 때문에, 이후 전쟁의 판도는 명과 일본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명-일 양국은 강화협상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은 이 협상에서 사실상 소외된 채 지루한 국지전을 감내해야만 했다.

 

2) 평양성 전투 경과와 관련기록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잠시 전열을 정비한 후 진로를 나누었는데, 조선 침략의 선봉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평안도 방향을 맡아 공격해 왔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는 함경도 쪽으로 향하였고, 애초에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남하하여 호남 공략에 나섰다. 한반도 전역에 대한 장악에 나선 것이다.
조선은 선조가 피신해 있는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근왕병을 소집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충분한 병력을 모으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번번이 일본군에 패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임진강 방어선을 어렵지 않게 뚫고 평안도로 향하였다. 결국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였고,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게 하였다. 6월 13일 고니시의 부대가 대동강에 도착하자 조선군은 대동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고니시 부대에 맞섰다. 14일 새벽 400명의 군사를 내어 강을 건너 일본군을 기습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후퇴하는 병사를 태우는 배가 제 때 대지 못하여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이때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을 건너 돌아왔는데, 이것이 오히려 일본군에게 길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조선군을 쫒아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자마자 조선군은 무너졌고, 결국 윤두수는 무기를 연못에 버리고 성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평양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1차 평양성 전투이다.
함경도를 향했던 가토의 부대 역시 수월하게 함경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전황이 일본군에게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5월을 넘어서면서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에 연패하면서 바닷길이 막힌 데다가 곳곳에서 봉기하기 시작한 의병들이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7월 즈음해서는 비점령지였던 호남의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치면서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뒤늦게 육로로 호남 공략에 나섰던 고바야카와 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등으로 인해 고니시의 부대는 더는 빠르게 북상하지 못하고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소규모이긴 하지만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의 원병이 이미 6월 말경에 국경을 넘고 있었다. 2차 평양성 전투는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의 합동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 조선에 들어온 조승훈의 부대는 요동 수비병 3,000명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였다. 당시 명에서는 일본군의 전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근처에 도착한 조승훈의 부대는 조선 도원수 김명원이 거느린 3,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조명연합군은 7월 15일 새벽 야간을 이용해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 전술에 휘말려 성내로 들어갔다가 많은 사상자만 내고 퇴각하였다.
3차 전투는 8월에 명의 원병 없이 조선 병력만으로 이루어졌다. 남쪽에서 간헐적인 승전보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또 일본군은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을 뿐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일본군의 전력이 전과 같이 않다고 판단한 조선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고자 시도하였다. 8월 1일,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평양 서쪽, 대동강 입구, 중화(中和)의 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갔는데, 보통문(普通門) 밖까지 진출하며 약간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갑자기 대대적으로 공격해온 일본군에게 밀려 결국 물러났다. 10월과 11월에 승병(僧兵)과 힘을 합쳐 다시 평양성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4차 전투는 해를 넘겨 1593년 1월에 있었다. 1차로 파병되었던 조승훈의 부대가 패퇴하고 5개월이 지나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하여 5만의 군사를 재차 파병하였다. 새로이 파병된 명군은 규모도 커졌지만, 대포 등의 공성 화약무기를 갖춘 포병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중국 남부의 절강성과 복건성에서 온 병사들로서 남병(南兵)이라 불렀는데, 평양성 회복에는 이 남병의 역할이 컸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12월 말에 국경을 넘었고, 1월 초에 평양 근교에 도착하였다. 이여송의 부대가 도착하자 조선은 이일(李鎰)·김응서(金應瑞)가 이끄는 관군과 휴정(休靜)·유정(惟政)이 이끄는 승군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조명연합군은 1월 6일과 7일에 걸쳐 탐색전을 벌이다가 1월 8일을 기해 총공격을 가하였다. 명나라 남병의 포병부대가 평양성을 집중 사격하고, 기병과 보병은 모란봉(牡丹峰), 칠성문(七星門), 보통문(普通門), 함구문(含毬門)의 네 곳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밀린 고니시 부대는 연광정(練光亭)의 토굴에 쫓겨 들어가 응전하였다. 토굴로 쫒긴 일본군의 결사항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이여송은 일본 측에게 퇴각을 종용하였고, 고니시가 이를 받아들여 평양성을 내주고 한양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조선군은 퇴각하는 고니시 부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라는 이여송의 통보에 따라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야만 했다.
고니시 부대가 평양성을 점령한 1592년 6월부터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 1월까지는 전쟁의 교착상태였다. 후방이 불안정해진 일본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조선군의 전력은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을 만큼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군의 발을 평양에 묶어두고 협상을 통해 북진만 막으려 했던 명나라 측의 태도 역시 전황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있도록 하였다. 명군의 2차 파병으로 평양성이 탈환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부대가 먼저 한성으로 철수한 후 함경도의 가토 부대 역시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고립되다시피 한 일본군은 결국 4월에 한성에서 마저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한 직후부터 일본군과의 강화협상에 주력하였고, 조선은 명나라에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5년간 경상도 남부에 주둔한 일본군과 지리한 국지전을 계속해야만 했다.
평양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제법 자세하게 전하는 편이다. 우선 중앙군의 전투였고 전체 전황에 있어서 중요성 또한 컸던 만큼 정부에 보고된 내용이 자세하고 분명하였다. 따라서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4차례에 걸친 전투의 전황뿐 아니라 평양성 수복을 위해 노력했던 여러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이덕형의 『백사집(白沙集)』등 당시 전쟁 상황에 깊이 관여했던 중앙 관료들이 남긴 기록에도 평양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상세하다. 임진왜란 당시 지제교(知製敎)로 대명 외교문서를 제작하였던 신흠(申欽)의 문집인 『상촌집(象村集)』에 실려있는 몇 편의 지(志)에도 관련 기록이 있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신흠의 후손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임진왜란기 명군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고대일록(孤臺日錄)』과 『난중잡록(亂中雜錄)』등 임진왜란 관련 기록 대부분에 평양성 전투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워낙에 중앙군과 명군이 참전한 전투라서 기록상의 오류나 혼동은 없다. 다만, 명군의 활동에 대해서 저자에 따라 약간씩 입장 차이가 있다. 신흠의 『재조번방지』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번방(藩邦)인 조선을 다시 일으켜(再造) 준 명나라의 은혜를 기록하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명군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난다.

 

3) 『징비록(懲毖錄)』에 나타난 평양성 전투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던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은거해 있으면서 썼으며, 『시경(詩經)』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제목은 유성룡이 이 기록을 남긴 목적을 잘 보여준다. 1633년(인조 11) 『서애집(西厓集)』을 간행할 때 그 안에 수록하였고, 이후 1647년(인조 25)에 임진왜란기의 장계 등 기타 기록을 모아서 별도의 『징비록』을 간행하였다. 이때 간행된 『징비록』은 16권 본이며, 다른 판본으로 장계 등의 기록을 뺀 2권짜리가 있다.
『징비록』의 내용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대일 관계인 교린사정(交隣事情)을 책 앞부분에 기록하여 두었는데, 이는 전쟁 발생의 원인을 밝혀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한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은 간행되기 전의 초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저자가 간행에 앞서 의식적으로 추가해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징비록』에는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 특히 명과 조선 사이에 오간 기밀·고급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군 참전 이전 조선군의 전투 상황, 의병의 활동 등 조선인들의 활약을 비롯하여 정유재란기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전쟁 전 기간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고급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함께 전쟁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징비록』은 『선조수정실록』, 『이충무공전서』 등을 편찬하는데 중요한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청나라에까지 알려져 널리 읽혔는데, 일본의 경우는 『조선징비록』이란 이름으로 자체적으로 간행되기까지 하였다. 『징비록』은 현재에도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징비록』에는 4차 평양성 전투 당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평양성을 되찾을 때 명나라 남병이 가지고 온 대포가 큰 역할을 했는데,『징비록』의 당일 전투 묘사에도 대포의 위력이 잘 드러나 있다.

翌日朝 進圍平壤 攻普通門七星門 賊登城上 列竪白紅旗拒戰 天兵以大砲火箭攻之 砲聲震地 數十里 山岳皆動…駱尙志 吳惟忠等 率親兵 蟻附而登 前者墮 後者升 莫有退者 賊刀槊下 垂城堞如蝟毛 天兵戰益力 賊不能支 退入內城 斬戮焚燒 死者甚衆

(『징비록』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
징비록(柳成龍 著, 1695, 古2158-8), vol 3, 10쪽. 

 

다음 날 아침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하였다. 적은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항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울려서 수십리 안의 산이 모두 흔들렸다…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개미처럼 성을 붙어 오르는데 앞사람이 떨어지면 뒷사람이 올라가니 후퇴하는 병사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나와 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명나라 군대가 더욱더 분투하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났다. 칼로 베고 불로 태워 죽인 병사가 매우 많았다.

 

 

다음은 평양성을 되찾은 후 일본군이 퇴각할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인데,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명군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賊將 平行長…等 率餘衆 連夜遁還 氣乏足繭 跛躄而行…我國無一人出擊 天兵又不追之…若行長,義智,玄蘇等 就擒 則京城之賊自潰 京城潰則 淸正歸路斷絶 軍心洶懼 必沿海遁走 不能自拔 漢江以南賊屯 次第瓦解 天兵鳴鼓徐行 直至釜山 痛飮而已 俄頃之間 海岱肅淸 安有數年之紛紛哉

(『징비록』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
징비록(柳成龍 著, 1695, 古2158-8), vol 3, 12쪽.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등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밤마다 달아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기력은 쇠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갔다.…우리나라 사람은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명나라 군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만약 유키나가(行長), 요시토시(義智), 겐소(玄蘇) 등을 잡았다면 한양의 적은 스스로 무너졌을 터이고, 한양의 적이 무너지면 기요마사(淸正)는 돌아오는 길을 차단당했을 터이니 적병들은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따라 달아났겠지만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터이고 한강 이남의 적진들이 차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그러하였다면 명나라 군대는 북을 치며 천천히 나아가 곧장 부산에 도착하여 실컷 술만 마셨어도 되었을 것이고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깨끗해졌을 것이니, 어찌 몇 년 동안의 어지러움이 있었겠는가.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징비록(懲毖錄)』(유성룡)
『백사집(白沙集)』(이덕형)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신경)
『난중잡록(亂中雜錄)』(조경남)
『고대일록(孤臺日錄)』(정경운)
이장희(1999), 『壬辰倭亂史硏究』, 출판사 아세아문화사.
김경수(2012),『재조번방지』의 사학사적 고찰,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18호, 225-259.
김시덕(2013), 해제-『징비록』과 동아시아,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상촌집,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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