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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탈출 광복군이 본 임시정부 실상과 국내정진대(國內挺進隊) 경험
광복군 , 임시정부 , 국내정진대
광복군은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공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1) 광복군의 창설과 편제

 

중일전쟁이 중국 대륙으로 확산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도 대일(對日)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준비의 상징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창설이다.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병력의 모집과 중국의 승인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병력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청년을 모집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위해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구성하였다. 그 한편으로 임정은 중국정부를 대상으로 광복군 창설 교섭을 전개, 중국은 “한국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하에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였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이청천·유동열·이범석·김학규 등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창설 준비를 마친 임정은 1940년 9월 15일 광복군 창설을 공포하였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는데,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이 중심이었고,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에 공진원, 제3지대장에 김학규가 임명되었다.
한편, 광복군이 공식 창설되자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 5지대로 편입하였다. 1939년 11월 중경(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대원 30명이 결성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초모(招募) 사업을 하여 대원수를 100여명으로 늘렸다. 이러한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은 광복군의 무력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월환은 1942년 전지공작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한 무장조직으로,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창립 당시 100여 명의 규모로, 2개 구대(區隊)로 편제되어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과 함께 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를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원수가 33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화북을 근거지로 독자적인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1년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의용대원의 약 80%에 달하는 인원의 화북진출에 놀란 중국 당국의 의도에 따라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군사통일이 추진되었다. 결국, 1942년 5월 15일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파견하고,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2) 대일(對日)선전포고와 연합군과의 공동작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선전성명서(大韓民國臨時政府對日宣戰聲明書)를 발표하였다. 임정은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을 통하여 종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중국과의 협조는 차치하고, 광복군의 연합군과의 공동 작전의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도·버마 전선에 광복군 공작대원들을 파견한 것으로,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지성(韓志成)·문응국(文應國) 등 공작대원 9명을 선발하여 포로심문·적문서번역 등의 정보활동에 담당케 하였다.
둘째, 중국에 주둔하던 미국의 OSS와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추진한 일을 들 수 있다. 중국 서안(西安)에서는 국내 진공을 위한 훈련이 194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싸전트(Clyde B. Sargent) 대위를 책임자로 한 이 훈련에는 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 등 50명이 참가하였다. 8월 4일 훈련이 완료되고 이들에 대한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는 순간,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여 국내진공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복군에서는 이범석을 책임자로 국내정진대를 구성, 비행기로 국내에 진입하였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3) 장준하가 본 임시정부의 실상과 국내정진대 경험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학도육군지원병제도(朝鮮人學徒陸軍志願兵制)’와 ‘징병제도’가 실시된 것은 1944년부터인데, 이를 통해 조선인 청년이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南洋)과 중국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오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장준하와 김준엽도 그러한 경우인데, 이들은 일본군 입영 전부터 일본군 탈출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내일 중지(中支) 파견 선발에만 끼이면 나는 나의 조국의 아들이 될 수 있으련만. 그 당시 나의 절망 속에 일루의 희망은 내가 중경(重慶)-중국 사천성에 있는 당시 중국의 수도-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 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臨政)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엔 중국군에라도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장준하, 1985 『돌베개』, 思想, 12쪽) 

장준하는 조선을 떠나기 전에 임시정부나 중국군으로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중국 쪽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했다. 장준하의 일본군 탈출은 목숨을 건 시도였고, 이 시도를 견인한 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희망이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은 천신마고 끝에 안휘성 푸양(阜陽)에 있던 광복군 징모(徵募) 제6분처에 모여들었고, 대략 50명의 탈출 학병들이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1945년 1월 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중경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장준하가 본 임시정부의 실상은 그가 꿈에도 그리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래 인용문은 장준하가 중경에 온지 2주째, 현지 교포들이 모이는 주회(週會)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교포들에게 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요즈음 이곳(중경; 인용자)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솔직히 말해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들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日軍)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서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장준하,1985 『돌베개』, 思想, 208~209쪽)

목숨을 걸고 찾아온 임정의 실상에 대한 장준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후에 장준하는 임정이 OSS와 합작한 국내 진공 작전 훈련에 참가하였고, 일본의 패망으로 국내 진공이 소용이 없어지자, 이범석을 필두로 한 국내정진대에 참가했다. 아래 인용문은 그가 9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이윽고 (비행기-인용자) 문이 열렸다. 
우리는 그들(일본군-인용자)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꺠에 걸쳤다. 그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자 산개하며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라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2시 18분. 
그러나 어인 일인가? 
우리들 주변엔 돌격태세에 착검을 한 일본군이 완전 포위를 하고 있었다. 워카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같은 고무관을 제독통에 연결시킨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해서 원거리 포위망을 줄여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는 분위기였다.” (장준하, 1985 『돌베개』, 思想, 250~251쪽)

해방 후 조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광복군의 소감이자, 해방을 맞았던 한국 풍경의 일부였다. 국내정진대는 다음 날 중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돌베개』에는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다시 국내정진대의 일원으로 국내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과 그에 대한 감상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일제시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민족주의적인 정신 자세의 표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장준하, 1985 『돌베개』, 서울, 사상
김준엽, 1987 『長征』1, 2, 서울, 나남
국사편찬위원회, 2001 『신편 한국사』 50,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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