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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 전투(天門嶺 戰鬪)와 발해의 건국
천문령 전투 , 발해 , 삼국유사 , 측천무후 , 대조영
천문령 전투는 현재 혼하(渾河)와 휘발하(揮發河)의 분수령인 길림성(吉林省) 합달령(哈達嶺)으로 비정되는 천문령에서 대조영(大祚榮, ?~719) 집단이 이해고(李楷固, ?~?)가 이끈 당군(唐軍)과 치른 격전을 말한다.

1) 발해 건국의 디딤돌, 천문령 전투

 

천문령 전투는 현재 훈허(渾河)와 후이파허(揮發河)의 분수령인 지린성(吉林省) 하타링(哈達嶺)으로 비정되는 천문령에서 대조영(大祚榮, ?~719) 집단이 이해고(李楷固, ?~?)가 이끈 당군(唐軍)과 치른 격전을 말한다.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군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었고, 마침내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2) 천문령 전투의 배경과 관련 문헌 소개

 

668년 신․당 연합군이 평양성(平壤城)을 무너뜨리면서 마침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은 예상되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구려 주민들을 당의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대조영의 집안도 영주(營州)로 끌려갔다. 중국측 사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別種)’이라고 하거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원래는 속말말갈족이었지만, 6세기 말 이전에 고구려에 귀의하여 동화되었던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추정된다.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이 당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던 것은, 그들이 고구려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高麗舊將祚榮)’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조영 집단이 강제 이주된 영주 지역에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당나라에 투항하거나 강제로 이주된 이민족(異民族)들이 많았고, 이렇게 이민족이 섞여 살고 있던 상황 때문에 영주는 중원과는 달리 비교적 한문화(漢文化)의 압박이 덜한 편이었다. 그 덕분에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독자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고구려인과 말갈인 사이에는 피복속민으로서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상호 이해와 화합이 진전되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695년 5월 거란족 출신 이진충(李盡忠)이 난을 일으켜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살해하고 영주를 점령하였다. 당 정부가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영주지방은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를 틈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乞四比羽, ?~?)는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하였다.
영주를 떠나 동쪽으로 탈출하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마침내 천문령 서쪽의 고구려 고지(故地)에 각각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당시 요동은 당·신라·돌궐 그 어느 쪽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고, 당은 요동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들의 죄를 사면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당이 내렸던 작호(爵號)를 거부하며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이들을 거란의 잔당(殘黨)으로 재규정하여 죄를 사면한 것을 취소하고, 거란의 항장(降將) 이해고에게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병사(病死)한 아버지 걸걸중상의 뒤를 이은 대조영은 집단을 이끌고 걸사비우와 함께 당나라 군대의 위협에 맞서게 된다.
천문령 전투 관련 문헌으로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오대회요(五代會要)』를 참고할 수 있다. 『구당서』는 오대(五代) 후진(後晉)의 출제(出帝) 개운(開運) 2년(945)에 유구(劉昫) 등이 편찬한 책으로,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백 50권, 모두 2백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찬 당시의 원명은 『당서』였으나, 송대(宋代)에 편찬한 『신당서』가 나온 뒤부터는 『구당서』로 불리게 되었다. 『신당서』는 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歷) 4년(1044)에서 가우(嘉祐) 5년(1060) 사이에 구양수(歐陽修)·송기(宋祁) 등이 봉칙찬(奉勅撰)하고 증공량(曾公亮)이 감수한 당대 290년간의 정사로, 본기 10권, 지 50권, 표 15권, 열전 150권, 총 225권으로 되어 있다. 『오대회요』는 중국 송(宋)나라의 왕부(王溥)가 편찬한 책으로,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해 관련 기록으로 발해전을 참고할 수 있다. 『구당서』가 주로 당나라 쪽의 사료에 바탕을 둔 반면, 『신당서』와 『오대회요』는 9세기 전반 사신(使臣)의 신분으로 발해를 방문했던 장건장(張建章)의 저술인 『발해국기(渤海國記)』도 참고하였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 역시 기록이 단편적이며 사건의 순서에 착오가 보이는 경우 종종 있으므로 주의를 필요로 한다.

 

3) 천문령 전투의 전개와 발해 건국

 

기록이 소략하여 천문령 전투의 개전(開戰)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지만, 당시 요동의 정세와 천문령 전투 이후 대조영 집단이 동모산으로 이동하여 발해를 건국하는 것으로 볼 때 697년에서 698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 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 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衆, 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나머지 무리를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가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그의 목을 베고, 또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니 왕사(王師=이해고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北狄), 발해말갈(渤海靺鞨)

 



是時仲象已死, 其子祚榮引殘痍遁去, 楷固窮躡, 度天門嶺. 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 楷固敗還.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전하고 돌아왔다.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北狄), 발해

 

이해고의 공격은 두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그 예봉(銳鋒)의 첫 대상은 걸사비우 집단이었는데, 여기서 이해고는 대승을 거두고 걸사비우를 참수하는 성과를 올린다. 대조영은 수장을 잃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포섭하여 동북쪽으로 달아나자, 이해고가 여세를 몰아 대조영을 쫓았다. 마침내 천문령 부근에서 당군과 대조영 집단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다. 자세한 당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이 전투에서 대조영은 이해고만 겨우 탈출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 집단은 당의 추가 공격을 우려하여 동모산으로 이동하였다. 동모산은 오늘날 둔화시(敦化市) 청산쯔산성(山城子山城)으로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한 대조영은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돌궐 등 당의 주변 세력과 긴밀한 연대를 맺으며 당에 맞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의 시작이었다.

 

 

참고문헌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 
권은주(2010). 7세기 후반 북방민족의 反唐활동과 발해건국. 『백산학보』, 86, 151-190.
노태돈(1981). 渤海建國의 背景. 『대구사학』, 19, 1-29. 
서병국(1983). 渤海建國의 背景硏究. 『논문집』, 1, 43-66.
송기호(1995). 『渤海 政治史 硏究』. 서울; 일조각.
임상선(1993). 渤海 建國 參與集團의 硏究. 『국사관논총』, 42, 121-148.
정병준(2008). 營州 大祚榮 集團의 渤海 建國. 『문학 사학 철학』, 15, 27-50.
吴焕一(1999). 渤海建国年代考. 朝鲜文·方学凤(编). 『渤海史硏究(8)』, 延吉; 延边大学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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