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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의 승패를 가른 매소성 전투(買肖城 戰鬪)
나당전쟁 , 매소성 전투 , 설인귀
675년 9월 지금의 경기도 양주 일대에 위치한 매초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신라와 당의 대결은 나당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의 공세와 신라의 저항이라는 형태로 전개되던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다시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1) 나당전쟁의 분수령, 매초성 전투

 

675년 9월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매소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신라와 당의 대결은 나당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중요한 전투였다. 당의 공세와 신라의 저항이라는 형태로 전개되던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매소성 전투를 계기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나아가 당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2) 매초성 전투의 배경 및 관련 문헌

 

670 신라가 백제 옛 땅에 설치된 당의 웅진 도독부를 공격하면서 나당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초기에 토번(吐藩)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느라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672년부터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전선을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신라와 당은 672년 8월 석문(石門)에서 처음으로 정면 승부를 펼쳤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는 크게 패하였다.
석문 전투를 계기로 당나라 군대의 힘을 체감한 신라는 사죄사(謝罪使)를 보내는 외교 교섭을 통해 당의 공세를 늦추고자 하였고, 동시에 전쟁 준비에 전념하였다. 수비 거점 마련을 위한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시행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9서당 군단을 차례로 조직하면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불만을 가진 일부 친당(親唐) 귀족을 처형하여 국왕 중심으로 내부 결속을 다져나갔다.
한편 당은 계속 공세를 이어나갔다. 신라의 서북방 국경인 임진강과 한강 하류 일대를 계속 공격하였으며, 674년에는 문무왕의 책봉을 취소하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 629~694)을 신라 국왕으로 임명하여 신라 내부의 동요를 유도하기도 하였다. 675년 2월에는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總管) 유인궤(劉仁軌)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후 돌아갔으며, 곧이어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전선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근행은 매소성 일대를 거점으로 삼아 한강 하류를 향한 압박을 계속하였다. 신라도 당나라 군대가 거란과 말갈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9군을 북쪽으로 보내어 맞서게 하였다. 두 나라의 군대는 마침내 9월 29일 매소성에서 부딪쳤다.
매소성 전투의 이모저모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그려볼 수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이 편찬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정사로, 기전체의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본기(本紀)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연표(年表) 3권, 잡지(雜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구성되었다. 매소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가장 자세하므로 본 전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3) 매초성 전투의 경과와 의미

 

『삼국사기』는 매초성 전투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艘.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撃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신라)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이끌고 와 매소성에 주둔하였다. 아군이 공격하여 당군을 도망가게 만드니, 전마(戰馬)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兵器)도 그만큼 되었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5년

 

 

매소성 전투에 앞서 천성(泉城)에서 전초전이 벌어졌다. 천성은 한강 하구인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교하 일대로 비정된다. 이곳에서 임진강 수계를 따라 이동하면 매소성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설인귀가 이끄는 당의 수군은 길을 잘 아는 신라인 풍훈의 안내를 받으며 매소성의 이근행 부대에 물자를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설인귀의 부대는 1차 관문인 천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도리어 큰 손실을 본 채 퇴각하고 말았다. 보급 작전이 실패한 것이다.
당시 이근행이 이끌던 당군의 규모를 『삼국사기』는 ‘20만’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수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상당한 규모의 대군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대군이 점점 날씨가 추워지는 가운데 군수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전투력이 상당히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9월 29일 매소성의 당군은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기록의 누락일 수 있겠지만, 신라군의 손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상당량의 군수 물자를 노획한 점으로 보아 신라군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당군이 도주하는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675년 9월에 있었던 매소성 전투의 승리는 나당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뜻밖의 대패를 당한 당은 당시 서북 변경을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인 토번에 대처하기 위해 이듬해인 676년을 기점으로 출구 전략을 선택하였다. 676년 2월 평양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遼東故城)으로,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긴 사실은 이러한 당의 정책 방향을 잘 보여준다. 한편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신라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660년 백제 정벌 이래 16년간 이어졌던 긴 전쟁을 끝낼 기회를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노태돈(2009).『삼국통일전쟁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서영교(2006).『나당전쟁사 연구』. 서울; 아세아문화사.
이상훈(2007). 唐의 軍事戰略을 통해 본 羅唐戰爭期의 買肖城 戰鬪.『신라문화』, 29, 89-123.
김병희(2014). 매소성 전투의 위치와 실상에 대한 고찰.『군사』, 91, 19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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