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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管山城 戰鬪)와 백제의 시련
관산성전투 , 백제 , 성왕 , 장수왕 , 남진정책 , 나제동맹
관산성전투는 554년 백제 성왕(聖王, ?~554)의 신라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로,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차지한 한강유역을 553년 신라가 빼앗은 사건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1) 백제 성왕의 비극, 관산성 전투

 

관산성전투는 554년 백제 성왕(聖王, ?~554)의 신라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로,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차지한 한강유역을 553년 신라가 빼앗은 사건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관산성의 위치는 현재 충청북도 옥천군 일대로 비정된다. 이 지역은 백제에는 자신들의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신라의 영토였고, 신라의 입장에서도 경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성왕이 전사하고 많은 군사를 잃으면서 한동안 크게 위축된 반면, 신라는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고 영토를 계속 확장함으로써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2) 관산성 전투의 배경과 관련 문헌 소개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특히 평양(平壤)으로 천도하고 적극적으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추진한 장수왕(長壽王, 394~491)의 행보는 백제와 신라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공동으로 방어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나제동맹이 결성되었다. 비유왕(毗有王, ?~455) 7년(433)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고, 신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이 응하면서 시작된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493년(신라 소지마립간 15, 백제 동성왕 15) 양국 간의 혼인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러한 나제동맹을 토대로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은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한강 유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하였다. 백제로서는 475년 장수왕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 약 80년 만에 다시 옛 중심지를 수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 7월 한강 하류를 공격하고 여기에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아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말았다. 마침내 성왕은 ‘기로(耆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54년 7월 신라 공격에 나선다. 
관산성전투와 관련한 참고문헌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이 편찬한 정사로 기전체의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본기(本紀)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연표(年表) 3권, 잡지(雜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사서이며, 천지창조 및 일본의 건국 신화에 해당하는 신대(神代)부터지토 덴노[持統天皇]가 사망하는 697년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의 통사(通史)이다. 관산성전투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매우 소략한 편인데, 이에 반해 백제의 편에 서서 원군을 파병했던 일본은 『일본서기』에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어 관산성전투의 재구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일본서기』는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3)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로 본 관산성전투의 전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관산성전투 관련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대신 신라본기와 『일본서기』를 참조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선공으로 시작했으며, 성왕을 비롯하여 좌평 4명과 군사 3만이 전사하는 백제의 대패로 끝이 났다.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대가야)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러자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로 싸웠다. 이때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9천6백 명을 목 베었으며 한 마리의 말도 살아서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

 

관산성 전투는 단순히 백제와 신라의 대결만은 아니었다. 가야군과 왜군이 백제 편에 서서 참전했던 것이다. 가야는 성왕 26년(548) 벌어졌던 독산성 전투(獨山城戰鬪)의 결과 백제에 복속되어 부용화(附庸化)의 길을 걷고 있었으므로, 백제의 요청이 있을 경우 참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긴메이 덴노[欽明天皇] 15년(554) 정월에 백제가 왜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자 “조군(助軍) 1천과 말 100필, 배 40척을 보내기로 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은 그 해 6월 백제에 도착하여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관산성 전투는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백제군은 신라군을 격파하며 우세를 보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맏아들이자 후에 위덕왕(威德王, ?~598)으로 즉위하는 여창(餘昌)이 공격을 주도했는데, 그는 선봉군을 이끌고 구타모라(久陀牟羅)까지 진출하여 보루를 쌓고 관산성 일대를 압박하였다. 이때 성왕은 후방에서 전황을 보고받고 이를 통해 지휘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전장에 나가 있는 아들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보기(步騎) 50여 명만 이끌고 길을 나섰는데,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예상 경로를 모두 차단함으로써 성왕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크게 활약한 인물은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삼년산군 비장인 도도(都刀)로 기록되어 있다.

 

已而苦都, 乃獲明王, 再拜曰, 請斬王首. … 明王仰天, 大息涕泣, 許諾曰, 寡人每念, 常痛入骨髓. 顧計不可苟活. 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 掘坎而埋.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하였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

 

 

 

성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신라군의 총공세로 백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여창은 신라군에게 포위당하였고, 활을 잘 쏘던 왜군 축자국조(筑紫國造)의 도움으로 겨우 몇몇 장수들과 함께 샛길로 탈출할 수 있었다. 지휘관을 잃은 백제군은 3만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백제로서는 여러모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성왕(東城王, ?~501) 이후 성왕 대까지 강화되었던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가 크게 동요하게 되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입지는 다시 단단해졌다. 대외적으로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가야 지역에 대한 주도권마저도 잃게 되었다. 반면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음은 물론 가야까지 차지하게 되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관산성 전투는 100년 이상 지속되었던 나제동맹 관계를 완전히 해체시킴은 물론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 관계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백제는 오랜 주적이었던 고구려보다도 신라에 대한 공세에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신라는 여기에 대응하여 새로운 동맹자로서 중원 대륙의 당(唐)을 주목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일본서기』 
김갑동(1999). 新羅와 百濟의 管山城 戰鬪 . 『백산학보』, 52, 189-214.
김주성(2008). 管山城 戰鬪의 背景. 『중원문화연구』, 12, 1-20.
노중국(1988). 『百濟政治史 硏究』. 서울; 일조각.
노태돈(1976).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13, 29-57.
양기석(2008).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중원문화연구』, 12, 21-44.
전덕재(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신라문화』, 34, 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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