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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平壤城 戰鬪)와 백제의 전성기
평양성 , 백제 , 고구려 , 삼국사기
평양성 전투는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이 전사한 전투로, 백제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대방군 지역을 두고 벌어진 한판 승부, 평양성 전투

 

평양성 전투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에 큰 피해를 줬던 전투이다. 4세기 한반도에서는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 400여 년간 지속된 중국 군현이 완전히 축출되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대립 구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했던 나라는 백제로, 평양성 전투의 승리는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로 평가되는 근초고왕이 이루어낸 영토 확장의 결실이었다.

 

2) 평양성 전투의 배경과 관련 문헌 소개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 근초고왕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한편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을 추진함으로써 백제를 도약시키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366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368년에는 준마(駿馬) 두 필을 선물하는 등의 교섭에 나서는데, 이는 백제의 내부 체제정비가 일단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백제는 369년부터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시행하여, 우선 369년 3월 마한 지역을 공략하여 호남지역의 일대를 점령하고 낙동강 중하류 연안으로 진출하여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명실상부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백제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백제 북쪽에 있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각각 313년, 314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자연히 고구려와 맞닿게 되었다. 낙랑과 대방 고지(故地)를 먼저 차지한 고구려는 처음에는 남쪽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어지럽던 중국 대륙의 정세를 활용하여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백제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4세기 전반 서북방면에서 관동지역을 장악하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전연(前燕)의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후 전연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방 국경지대의 안정을 확보한 고구려는 요동 대신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백제는 옛 대방군 관할인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비정되는 치양(雉壤)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백제의 북방 영토 확장은 그렇지 않아도 남진(南進)을 추진했던 고구려를 자극했다.
마침내 369년 9월 고국원왕이 보기(步騎) 2만을 동원해 멸악산맥(滅惡山脈)을 넘어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비정되는 치양(雉壤)을 침공함으로써 양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일 근구수왕(近仇首王, ?~384)이 되는 근초고왕의 태자가 지휘한 백제군은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고 물품을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며 승리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재차 침공했는데, 근초고왕은 이를 사전에 예측하고 지금의 예성강(禮成江)인 패하(浿河)의 요지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불시에 습격하여 고구려를 물리쳤다. 고구려군의 공격을 차단한 백제 근초고왕은 그동안의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평양성 전투를 보여주는 문헌으로는 『삼국사기』가 유일하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이 편찬한 삼국 및 통일신라의 정사로, 기전체의 서술방식을 채택하였으며 본기(本紀)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연표(年表) 3권, 잡지(雜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구성되었다. 평양성 전투에 대한 유일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워낙 소략하여 구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3) 『삼국사기』로 본 평양성 전투

 

371년 10월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평양성은 오늘날 평양시 동북의 대성산성(大城山城) 일대로 추정된다. 백제가 고구려 공격에 3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사실은 백제가 소농민을 항시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고대국가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은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저하되었을 고구려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百濟王帥 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는 원문의 주석)

 

41년(371)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 지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평양성 전투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제의 선제공격으로 평양성 공방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고구려군을 진두지휘하던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백제 개로왕(蓋鹵王, ?~475)이 북위에 보낸 국서(國書)에는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近仇首王)이 고국원왕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평양성 전투에서 근구수왕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본기를 참고한다면 백제의 주장처럼 고국원왕은 전투 당시 전사했다기보다는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승리를 거둔 근초고왕은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않고 평양성에서 군사를 돌려 개선했다. 백제는 평양성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황해도 황주(黃州) 이남 일대를 영향권에 편입시킬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백제의 군사적 역량을 과시할 수 있었다. 평양성 전투 1년 뒤인 372년 근초고왕은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어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국제사회로부터 당당하게 인정받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노태돈(1999). 『고구려사 연구』. 파주; 사계절.
문안식(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서울; 해안.
여호규(2004). 4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고국원왕의 생애. 『역사문화연구』, 20, 165-201. 
여호규(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高句麗와 百濟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169-213. 
정재윤(2012). 4~5세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 44, 5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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