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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이사부 , 독도 , 우산국 , 신라
우산국을 정복한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 ‘독도는 우리 땅’ 노래 마지막 소절에 등장함과 동시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신라의 대표 장군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신라 장군 이사부이다. 어릴 적부터 불러온 노래에 등장하는 이유 때문인지 신라 장군 그 누구보다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우산국을 정복한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 

‘독도는 우리 땅’ 노래 마지막 소절에 등장함과 동시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신라의 대표 장군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신라 장군 이사부이다. 어릴 적부터 불러온 노래에 등장하는 이유 때문인지 신라 장군 그 누구보다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흔히 신라 장군 이사부로 알려져 있는 그는 내물왕의 4세손으로 내물왕의 증손인 지증왕의 조카 항렬(行列)이며, 법흥왕과는 형제 항렬에 해당한다. 귀족사회였던 신라시대 이사부는 왕족 출신이자 당시 최고의 진골귀족으로, 512년 하슬라주 군주로 있던 20대의 젊은 시절에 최고 관등 이찬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이사부 장군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그의 이름은 ‘이사부’라 알려져 있지만, 태종(苔宗), 이종(伊宗), 이사부지(伊史夫支) 등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하였고, 성씨는 「삼국사기」에는 김씨로,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성씨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시 성씨제가 미정립된 상황이었고, 후대에 정립된 성씨제도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부계와 모계의 양측적 출계원리가 작용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례로 보인다. 
문헌에 기록된 이사부의 첫 번째 기록은 505년(지증왕 6)에 실직(悉直, 지금의 삼척)의 군주(軍主)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 군주는 그 지역의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까지 총괄하는 힘을 가진 지위였고, 이사부는 군주가 된 후 막강한 군사력과 군력을 바탕으로 당시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 그리고 541년 이찬으로서 상대등과 시중을 겸하는 병부령이 되었고, 한강 상류지역을 공략해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다. 문헌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그의 모습은 실직의 군주로 임명 후 약 60년 뒤인 562년(진흥왕 23)에 가야 토벌전의 출전이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임명되었던 6세기 초, 신라에서는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증왕 4년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과 같은 신라 고유의 칭호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4권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6년 서기 505년 2월에 왕이 친히 국내의 주군현(州郡縣)을 정하였고, 군주란 이름이 이때 시작되었다. 즉, 신라의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이사부는 실직주의 첫 번째 군주로 임명되었던 것이고, 군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505년(지증왕 6)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로 삼았는데, 661년(문무왕 1) 총관(摠管)으로 바꾸었고, 785년(원성왕) 도독(都督)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고 한다. 따라서 실직주의 군주란 장군 이상의 관직으로, 신라의 9주州 중 하나였던 실직의 행정권·사법권·징병권 등을 행사하였던 지방장관이었던 것이다. 

문헌에 기록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우산국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飡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13년(서기 512) 임진에 그는 아슬라주(阿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니 꾀로서 항복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의 형상을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는 속여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삼국사기」 44권, 열전 4 이사부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강릉)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又阿瑟羅州[今溟州] 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飡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獅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삼국유사」 1권, 기이 1 지철로왕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주의 군주가 된 이사부는 우산국을 병합할 계획을 세웠고, 그해 6월 우산국 정벌을 시작하였다. 삼척의 정라항을 출발, 우산국에 도착한 이사부는 우산국의 우해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우해왕이 이사부가 보낸 사신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이에 이사부는 원래의 계획대로 전투를 시작했고, 그 결과 우산국은 멸망하고 신라에 항복한 후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내용을 바탕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사부는 사전에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산국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위엄만으로는 항복시키기 어려우니 꾀로써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나무를 깎아 사자 형태의 우상을 많이 만들게 하였고, 이를 우산국 정벌을 위해 출항할 전선에 나누어 싣게 하였다. 이사부가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도록 할 것이다”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처음 본 사자모양에 기가 질려 매우 두려워하고 바로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밟아 죽인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사부 군대가 만든 조형물은 그 크기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를 싣고 길고 험한 바다 길을 건너 울릉도까지 갔다는 내용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사부가 장군으로서의 용맹함과 더불어 전술적 지략에도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사부의 우산국 원정 결과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와 울릉도 주변의 여러 부속도서를 포함하는 우산국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당시 우산국은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의 정동쪽 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독도를 포함 그 주변 부속도서들을 세력권 내에 두었던 소국(小國)이었다. 우산국의 영역에 대해 「만기요람」 군정편에는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을 빌어,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이 우산을 왜인들은 송도(松島)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산국의 신라 편입은 역사적으로 독도를 우리 영토로 확정하는 최초의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라는 증거의 기반이 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사부는 541년(진흥왕 2)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562년까지 실권을 장악하며 동서남북으로 신라의 지배권을 확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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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저자 발행자 발행년도 원문

三國史記

김부식
봉선찬
古典刊行會 1932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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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刊寫地未詳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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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朝鮮光文會 1914 원문보기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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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동
京都帝國大學文學部 1921 원문보기

신라의 東北方 진출과 異斯夫의 于山國 정복 출항지

김창겸 韓國史學會 2011 원문보기

신라의 于山國 정벌과 통치

채미하 한국이사부학회 2014 원문보기

각주


1) 「삼국사기」 권44, 열전 이사부전 
2)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지철로왕조 
3) 단양신라적성비 
4) 강봉룡, 2010, 이사부 생애와 활동의 역사적 의의, 이사부와 동해 
5) 「삼국사기」 권4, 지증마립간 6년 2월조 
6) 「삼국사기」 신라본기 4, 진흥왕 23조 9월조 
7) 경상북도, 2008, 독도총서, 경상북도 
8) 경상북도, 2008, 독도총서,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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