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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 임윤지당
여성 성리학자 , 성리학 , 윤지당유고 , 송시열 , 이재

이칭ㅣ윤지당,   본관ㅣ풍천,   생몰년도ㅣ1721~1793,   시대구분ㅣ조선

 

1) 임윤지당의 생애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은 조선 영조 대에서 정조 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여성 성리학자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대개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다만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로 기억될 뿐이다. 본관은 풍천으로 함흥 판관을 지낸 임적(任適, 1685~1728)의 딸이며, 영조 대의 대학자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의 여동생이다. 

임윤지당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후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틈틈이 학문을 닦았는데, 특히 둘째 오빠 임성주로부터 「효경」과 「소학」 등을 배워 학문과 인격수양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학자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형제들과 함께 경전·사서(史書) 등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탁월한 식견을 드러내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유인(孺人 : 임윤지당)은 단정하고 한결같으시며, 성실하고 정중하셨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고,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셨다. 여러 오빠 형제들을 따라 경전과 역사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배웠고, 때때로 토론을 제기하였는데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들이 많았다. 둘째 형님(임성주)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효경」․「열녀전」․「소학」․ 사서 등의 책을 가르치셨는데, 누님이 매우 기뻐하셨다.” 
(孺人端一誠莊 自幼無疾言遽步 性聦穎 從諸兄弟 傍聽讀經史 有時發難 多驚人語 仲氏奇之 遂授孝經,列女傳及小學四子等書 姊大喜) 

“형제들이 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때로는 경전과 역사책의 뜻을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금의 인물과 정치의 잘잘못을 논평할 때도 있었다. 누님은 천천히 한마디 말로 그 시비를 결단하셨는데,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으셨다. 여러 오빠들이 탄식하며,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每諸兄弟會坐親側 或論經史義理 或論古今人物 治亂得失 姊徐以一言 决其是非 鑿鑿中窾 諸兄歎曰 恨不使汝爲丈夫身)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임윤지당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동생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1727~1796)의 글 「유사(遺事)」는 그녀의 훌륭한 학문적 재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드러내놓고 학문을 논하지는 않았으며, 우선 부녀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가사를 돌보는 데 마음을 쏟은 연후에야 밤잠을 아껴가며 학문을 연마하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런 까닭에 함께 사는 가족들조차 그녀가 이룬 학문적 성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는 경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성리학에 대한 조예는 당시의 대학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윤지당은 1739년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혼인하였으나 결혼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에 어린 나이에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게 되었음에도 사소한 일 하나까지 빈틈없이 처리하였으며, 시댁 어른의 봉양에도 전심을 다 하여 소홀함이 없었다고 한다.


『윤지당유고』 부록 언행록(言行錄)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처음 시집와서 사당을 배알할 때, 하녀의 시중을 물리치고 손수 제기를 받들어 모셨다. 예의와 거동이 익숙하고, 진퇴지절이 모두 법도에 맞으니 숙부인 참봉공(參奉公)께서 극도로 칭찬하시어, “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은데, 처신하는 것을 보니 의젓함이 태산교악과 같다”고 하셨다.” 

(初於廟見 屛退姆相 親奉篹豆 禮容嫺熟 進退中度 叔父參奉公亟稱曰 年幼體小 觀持身 凝然山岳) 

「윤지당유고」 부록 언행록(言行錄)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누님은 타고난 자품이 탁월한 데다 학문에 대한 공력(功力)도 많았다. 그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데 순수하여 조금도 사사로운 일이 없이 한결같이 바른 정도를 지키셨다.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로부터 친척 이웃 및 집안 식구들을 대하고 가사를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때그때 본분을 다하여서 마땅하게 하셨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하는 가운데 뛰어나게 모범이 되셨다. 아, 누님 같은 사람은 진실로 규중(閨中)의 도학(道學)이요, 여인들 중의 군자라 할 만하다.” 

(孺人姿性旣絶異 問學之功 又足以濟之 故其日用之間 持身處物 粹然無私己之累 而一本乎義理之正 盖自奉先接賓之節 以至處宗族 處隣里 處家衆 處家事 隨在盡分 各得其宜 自然之中 綽有成法 嗚呼 若孺人者 眞可謂閨中之道學 女中之君子)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임윤지당의 시동생인 신광우(申光祐)의 「언행록(言行錄)」과 동생 임정주가 적은 「유사(遺事)」의 내용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녀의 언행에는 절륜한 기품이 있었으며, 예의범절에도 잘 부합하였다. 신광우를 비롯한 두 시동생은 결혼 후에도 분가하지 않고 한집안에서 함께 살았으며, 임윤지당을 집안의 어른으로 공경하여 마치 어머니 따르듯 하였다고 한다. 

임윤지당은 1793년(정조 17) 음력 5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나 강원도 원주에 묻혔다. 1796년(정조 20) 임정주와 신광우가 그녀의 유고 40여 편을 엮어 「윤지당유고」 1책을 간행함으로써 그녀의 학문과 저술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2) 빼어난 인품과 심오한 학문

 

임윤지당은 기호 서인의 학문적 전통을 이은 가학의 기반 위에서, 둘째 오빠 임성주에게 학문을 전수 받아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그 자세한 내역은 동생 임정주의 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누님의 학문은 유래가 있다. 우리 고조부이신 평안감사 금시당[今是堂 : 임의백(任義伯)]께서는 사계(沙溪 :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마음(心)’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교훈을 들으셨다. 선친이신 함흥판관 노은공(老隱公 : 임적)께서는 백부이신 참봉공(임선)과 함께 황강(黃江 : 권상하)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정직(直)’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셨다. 둘째 형님 성천부사 녹문공(임성주)은 도암(陶庵 : 이재) 선생 문하에서 ‘도(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철학을 전수받으셨고, 누님은 형님에게서 수학하였다. 가문에서 전승된 학문 연원이 유구하고 그 영향이 이와 같이 심원하였다.” 

(孺人學有所自 我高祖平安監司今是堂公諱義伯 受業沙溪金先生之門 得聞師心之訓 先考咸興判官老隱公諱適 與伯氏參奉公諱選 出入黃江權先生之門 得聞直字之敎 仲氏成川府使鹿門公諱聖周 蚤遊陶庵李先生之門 得聞道不可離之義 而孺人又受學於仲氏 盖其家庭之間 淵源之遠 擩染之深如彼)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이와 같이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이재(李縡), 임성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 위에서 평생 동안 오롯하게 학문에 진력한 그녀는 성리학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등의 논설은 그와 같은 학문적 결실이라 하겠다. 아울러 그녀가 기술한 「대학」과 「중용」 등 경전의 해설과 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 등 역사 인물에 대한 논평도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그녀의 심원한 학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도 강하게 지니고 있어 인간의 보편적인 인격 완성과 심성 수련에 있어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으며, 학문을 통해서 공히 성현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녀는 남녀가 지닌 체질이나 심성,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의 본분을 다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단순히 여성으로서 예절과 품행을 닦는 삶에 머무르지 않고, 학문과 문장의 재능을 발휘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남자의 원리는 씩씩한 것이고, 여자의 원리는 유순한 것이니 각기 그 법칙이 있다. 성녀 태사(太姒 : 문왕의 정비)와 성인 문왕께서 하신 업적이 달랐던 것은 서로 그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 같이 천성대로 최선을 다하셨던 것은 그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았더라면 두 분이 또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常言乾健坤順 各有其則 聖姒聖文 所行異宜者 分之殊也 盡性則同者 理之一也 易地則皆然) 

「윤지당유고」 부록 유사(遺事)

 

동생 임정주가 채록한 임윤지당의 언사를 통해 우리는 남녀를 분별하는 테두리에 갇혀 있기보다는 인간의 존재 기반이 되는 보편적 원리에 주목하였던 그녀의 참신한 사유 체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남다른 고민과 학문에의 입지(立志)가 있었기에 임윤지당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학자로서 깊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그녀보다 50년 정도 늦게 태어나 조선 후기 여성 지식인의 계보를 이은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임윤지당의 문집을 읽고 그녀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인 차별과 여성이라는 굴레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부단히 정진하였던 임윤지당의 밝은 눈빛이 뒤에 올 이들을 위한 환한 등불이 되어 준 셈이다.


『윤지당유고』 부록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지으신 글에는 일체 저속한 내용이 없었다. 그것은 모두가 경전을 담론하고 성리(性理)를 설파한 것으로서, 도심(道心) 가운데 말하고자 하신 바를 서술한 것이었다. 어찌 절절히 뜻을 붙이고 말을 꾸며 번듯하게 만들려고 하셨겠는가. 생각건대 유인(孺人)은 예법을 애호하고 경전과 역사에 침잠하셨다. 옛날이 현철한 부녀들을 손꼽아 본다면 아마도 경강(敬姜 : 춘추시대 노나라 문백(文伯)의 어머니)과 반소(班昭 : 중국 동한 시대의 여류 사학자)를 겸하였다고 할 만하다. 사색은 정밀하고 존심(存心)은 철저하며, 지혜는 밝고 행실은 수양되어 표리가 한결같으셨다. 순수하고 평화로운 경지를 성취하신 것은 오래 덕을 쌓은 큰선비와 같았다.” 

(故其所製諸篇 絶無閑漫語 類皆談經說理 而一切信手抒寫 道心中所欲言而已 何甞切切然刻意修辭 求爲是工好也 竊甞以爲孺人愛好禮服 沉淹經史 歷數古賢婦女 於敬姜班昭 庶幾兼之 至若思索之精 操存之密 知明而行修 表裏如一 粹然安且成 則當求之宿德醇儒) 

「윤지당유고」 부록 발문

 

 

참고문헌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녹문집(鹿門集)」 
「운호집(雲湖集)」 
이영춘, 「국역 윤지당유고」, 혜안,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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