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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불행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 강정일당
정일당유고 , 여성학자 , 성리학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조선 정조 대에서 순조 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여성 성리학자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대개 그렇듯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정일당(靜一堂)이라는 호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본관은 진주로서 명문 출신이나 조부와 부친을 일찍 여의었던 까닭에 편모슬하에서 가난과 싸우며 성장하였다.

이칭ㅣ정일당,   본관ㅣ진주,   생몰년도ㅣ1772~1832,   시대구분ㅣ조선

 

1) 강정일당의 생애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조선 정조 대에서 순조 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여성 성리학자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대개 그렇듯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정일당(靜一堂)이라는 호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본관은 진주로서 명문 출신이나 조부와 부친을 일찍 여의었던 까닭에 편모슬하에서 가난과 싸우며 성장하였다. 
강정일당은 나이 20세에 충주의 선비 윤광연(尹光演, 1778~1838)과 혼인하였으나, 가정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평생 동안 가난, 질병과 싸워야 했다. 또한 5남 4녀를 낳았으나 모두 첫 돌을 지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자식을 하나도 길러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지난한 생활고와 연이은 불행 속에서도 강정일당은 여성과 아내로서의 직분을 다함은 물론,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요령을 터득하였으며,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예의에 있어 유교의 바른길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강정일당은 생계를 돌보기 위해 공부를 등한시하던 남편에게 과거시험 공부를 권유하는 것을 계기로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시어머니 지일당(只一堂) 전씨(全氏)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보다 나이가 많았던 데다 타고난 식견과 재능이 남달랐으므로 자연히 학업의 성취가 뛰어났고, 남편의 학업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윤광연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기리는 제문에서,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연마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아내의 권고와 격려 덕분이며, 자신에게 있어 아내는 어진 스승이자 평생의 붕우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적고 있다.


『정일당유고』 부록 제망실유인강씨문(祭亡室孺人姜氏文)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드디어 힘써 배웠다. 비록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내 마음이 마침내 방자해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대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떠한 모양의 인간이 되었을는지 알 수 없다.”(吾聞之甚喜 遂勉而學之 雖未敢自謂有得 而此心終不放肆 以至于今日 微君之言 吾未知其爲何狀人也) 

“나에게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격려하였고, 나에게 한 가지 허물이라도 있으면 걱정하여 문책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나를 중도의 바른 자리에 서게 하며, 천지간에 과오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내가 우둔하여 다 실천하지는 못하였지만,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見吾有一善 則非徒喜之 又加勉焉 見吾有愆 尤非徒憂之 又從以責焉 必使吾立於中正之域 爲天地間無過之人 雖吾闇劣未能悉從 然嘉言格論 終身服膺) 

「정일당유고」 부록 제망실유인강씨문(祭亡室孺人姜氏文)

 

평생을 가난과 병고 속에서 고생하였던 강정일당은 1832년(순조 32) 9월 14일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난 후 경기도 광주 청계산 동쪽 기슭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는 그녀의 사당이 있다.

 

2) 불운을 딛고 학문을 꽃피우다

 

윤광연은 강정일당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저작들이 민멸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1836년 문집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를 간행하였다. 조선 시대에 여성의 문집이 간행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윤광연은 가산을 기울여 문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강정일당은 생전 수십 권에 이르는 저작을 이루었으나 이 중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시문과 편지 등의 저술 10여 권만이 남아 문집에 담기게 되었다.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와 쪽지 등을 통해서 그녀의 학문과 심성 수양의 경지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38수에 이르는 시를 통해서는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친정과 시댁의 학문적 전통을 두루 전해 받은 것으로 보이며, 남편의 스승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 ~ 1838)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그녀에 앞서 여성 학자로 명성을 떨친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 ~ 1793)을 매우 흠모하여 그녀에게서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강정일당은 실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였는데, “남녀의 품성은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임윤지당의 소신은 강정일당에게는 신념과도 같은 의미를 가졌으며, 이에 따라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도학에 몰두하여 많은 성취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시와 문장 그리고 글씨로도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의 행장(行狀)을 지은 3종형제 진사(進士) 강원회(姜元會)는 그녀의 학문과 문학을 일컬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정일당유고』 부록 유인정일당강씨뇌문(孺人靜一堂姜氏誄文)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아아! 성정(性情)의 바른 것은 「시경(詩經)」의 관저(關雎)에서 얻은 것이고, 성실을 밝힌 학문은 「중용(中庸)」에서 얻은 것이며, 안빈낙도하는 생활은 안회(顔回)의 단표누항(簞瓢陋巷)에 부끄럽지 않았다. 시에서 발휘된 것은 성리학의 명문에 넣을 만하고, 단정한 필체에서는 심성 수양의 경건함을 알 수 있으며, 서간문에서는 학문 성취의 결과를 볼 수 있다.”(性情之正 得於關雎 明誠之學 得於中庸 安於貧則不愧乎簞瓢之樂 發於詩則可參乎濂洛之什 銀鉤之畫 吾知其直內之敬 尺竿之步 吾知其向上之功) 

「정일당유고」 부록 유인정일당강씨뇌문(孺人靜一堂姜氏誄文)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학자로서 이름을 남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조선 시기 동안 진정한 의미의 학자로서 자취를 남긴 여성은 임윤지당과 강정일당 정도를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평생 궁핍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음에도, 늦게 시작한 학문에 몰입하여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강정일당은, 가난과 불행 속에서 학문을 꽃피워 조선 시대 여성 지식인의 이름을 떨친 참된 학자이다. 더불어 18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 의식 성장을 암시하는 맹아와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정일당유고」 
한춘섭, 「(女流文人)姜靜一堂」, 城南文化院, 1992 
이영춘, 「강정일당-한 조선 여성 지식인의 삶과 학문」, 가람기획, 2002 
장인자, 「姜靜一堂의 文學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관련콘텐츠

 

姜靜一堂의 生涯와 學問

姜靜一堂의 '代夫子作'에 대한 고찰

靜一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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