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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꺾인 보국안민의 꿈, 전봉준
매천야록 , 동학농민운동 , 고종실록 , 녹두장군
전봉준은(全琫準, 1855 ∼ 1895)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이다. 몸이 왜소한 편이라 흔히 ‘녹두(綠豆)장군’으로 불렸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인물로서,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전봉준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개혁의 뜻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이칭ㅣ해몽,   본관ㅣ천안,   생몰년도ㅣ1855~1895,   시대구분ㅣ조선

 

1) 보국안민의 꿈이 싹을 틔우다

 

전봉준은(全琫準, 1855 ~ 1895)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이다. 몸이 왜소한 편이라 흔히 ‘녹두(綠豆)장군’으로 불렸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인물로서,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전봉준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개혁의 뜻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던 전봉준은 이후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東谷) 마을에 자리 잡아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꾸렸으며, 동네 훈장으로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35세 때인 1890년(고종 27)을 전후하여 동학에 입교한 전봉준은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2) 백성의 원망 민란으로 타오르다

 

당시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조병갑(趙秉甲)은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그는 한재(旱災)가 들어도 세금을 면제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1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를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 발생적으로 고부 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 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 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전봉준이 봉기할 당시의 정황을 담고 있는 기록으로서 눈에 띈다.

 


고부(古阜)에서 동학당 전봉준 등이 봉기하였다. 이때 박원명이 난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조정의 호의를 표명하고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마을로 돌려보내자 난민들은 모두 해산하였다. 동학 괴수(魁首) 전봉준 등 수명은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그 후 이용태가 와서는 박원명이 하는 것과는 달리 백성들에게 오역률(忤逆律)을 적용하여 모두 죽이려고 하였고, 또 부호들에게 민란을 주도했다는 구실을 붙여 뇌물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가 감사 김문현과 공모하여 감옥으로 이감된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으므로, 백성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민란을 일으켰다. 

(古阜東匪全琫準等起 朴源明宴亂民 諭以朝廷德意 赦罪歸農 亂民皆散 而倡魁全琫準等數人 不知去處 及李容泰至 盡反源明所爲 毆民忤逆之律 欲按誅之 又構富室以倡亂脅索厚賂 與監司金文鉉通謀 移囚營獄者相望 民憤怒復亂) 

「매천야록」 권2 고종 31년 갑오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해 진격하여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였다. 이어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한 후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 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다시 천명하였다. 이후 영광·함평·무안·장성 일대에 진격한 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3) 외세의 개입과 농민군의 좌절

 

그러나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인천에 들어왔다. 이처럼 외국 군대의 진주로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농민군은 홍계훈의 선무(宣撫)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탐관오리 응징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대한 확약을 받음으로써, 5월 7일 이른바 전주 화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정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청일전쟁의 우세를 등에 업은 일본이 침략 야욕을 노골화함에 따라 동학 농민군은 9월 중순을 전후하여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남접 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북접농민군 10만 명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여 일본군 및 정부군과 몇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11월 초 우금치(牛金峙) 싸움에서 대패한 후, 차츰 농민군은 진압되었다. 

이에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여 재기를 모색하던 전봉준은 순창에서 부하인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래에 인용한 기사 두 건은 동학 농민전쟁이 농민군의 패배로 끝날 즈음의 정황을 담고 있는 기록으로서 주목된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병술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3일 미시(未時)쯤 적이 전라 감영(全羅監營)의 서문(西門)과 북문(北門)을 활짝 열어 놓고 누런 빛깔의 큰 깃발을 세운 다음에 5, 6천 명의 군사가 관군과 싸웠는데 적이 크게 패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숫자가 1,000여 명이었다. 적의 괴수 김순명(金順明), 어린 장사 이복용(李福用), 참모(參謀) 선판길(宣判吉), 이른바 곽(郭) 장군, 박장사, 정(鄭) 장군이라는 자들은 모두 죽고 장사(壯士) 전녹두(全祿斗)는 머리뼈가 부서지고 다리를 상하였다. 적은 여전히 성(城)안에 웅거하여 줄곧 굳게 지켰는데 관군은 더욱 사기를 높여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에 김순명의 머리를 적의 깃발 대에 달아매어 효수하니 남은 적이 크게 놀라서 적들은 패하여 돌아갔다. 8일 진시(辰時)쯤 초토사(招討使)가 군사를 정돈하고 성에 들어가니 성안의 백성으로서 종전대로 살고 있는 남녀노소가 수만여 명이었다. 노획한 무기는 창과 총이 1,000여 자루, 불랑기(佛狼機) 대포 24문〔坐〕, 납탄 5만 8,000여 개, 화약 1,000여 근(斤)이고 그 밖에 활과 화살, 갑옷과 투구, 칼과 도끼 등속이었다. 모두 다 회수하여 대장에 올리고 방을 붙여서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初三日未時量 賊大開完營西北二門 建黃大旗 五六千軍 與官軍戰 賊徒大潰 斬獲千有餘 賊魁金順明 童壯士李福用 謀士宣判吉 所謂郭將軍將軍 朴壯士壯士 鄭將軍將軍者 竝死 壯士全祿斗碎顱傷股 賊尙據城中 一向堅守 官軍益勵不怠 於是梟首金順明 懸於賊旗 大警餘賊 賊黨敗歸 初八日辰時量 招討使整軍入城 城中人民男女老少依舊居住者數萬餘人 所獲軍器 鎗與銃千餘柄 佛狼機大砲二十四坐 鉻丸五萬八千箇 火樂千餘斤 其餘弓箭 甲冑 刀斧等屬 竝皆收還 載籍出榜安民)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병술

 

국사편찬위원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 

 


호남의 동학적도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 등을 처형하였다. 그들은 교형(絞刑)을 하고 참형(斬刑)은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은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매우 한탄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이 처형될 때 그는 박영효, 서광범 등을 역적이라고 꾸짖고 죽었다고 한다. 적의 우두머리 최시형은 망명하여 결국 체포하지 못하였다. 

(湖南賊全琫準孫化中崔慶善成斗漢金德明等伏誅 用絞 不用斬 世恨其失刑 琫準臨刑 大罵朴·徐逆賊而死 賊魁崔時亨亡命 竟不得捕) 

「매천야록」 권2 고종 31년 을미

 

 

참고문헌

「고종실록」 
「매천야록」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오하기문(梧下記聞)」 
국사편찬위원회, 「동학란기록」상·하, 195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콘텐츠

 

(번역) 오하기문:

황현이 쓴 동학농민전쟁의 역사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전봉준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全琫準의 生涯와 思想

(東學革命)녹두장군 全琫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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