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백성을 위한 헌신의 아이콘, 박문수
암행어사 , 영조실록 , 비변사등록 , 연려실기술 , 어사 박문수전
조선 영조 대의 문신 관료로서 암행어사의 대명사와 같이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691년(숙종 15) 경기도 진위 현(현재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부친은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이었다.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후 1727년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칭ㅣ기은,   본관ㅣ고령,   생몰년도ㅣ1691~1756,   시대구분ㅣ조선

 

1) 박문수의 생애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조선 영조 대의 문신 관료로서 암행어사의 대명사와 같이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691년(숙종 15) 경기도 진위 현(현재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부친은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이었다.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병조정랑(兵曹正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1727년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이후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호조판서, 도승지, 병조판서, 어영대장,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주요한 현안이었던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에 속하였으나,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던 영조의 지원 속에 당대의 중신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2) 백성을 위한 삶 설화로 기억되다

 

전국적으로 전승되어 온 다수의 ‘어사 박문수 설화’ 덕분에 그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암행어사로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지만, 사실 영조 대 초중반의 30년에 걸쳐 관직에 몸담았던 그의 이력 중 암행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7개월 정도에 불과하여 결코 그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그가 백성의 편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암행어사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박문수는 어린 나이에 조부와 백부, 부친을 모두 여읜 탓에 가난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 고달픈 생활고를 몸소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기근이 든 지역에 어사로 파견되어 처참한 민생을 여실히 직시하였고, 이를 통해 백성의 삶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이해를 얻게 되었다. 박문수의 이러한 면모는 그가 ‘민생의 실질적인 개선’이라는 정치활동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기민(饑民)의 구제 사업, 진휼 사업 자본 마련을 위한 소금 생산, 군역(軍役)의 폐단 시정 등 민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혁안을 진달하는 서두에 ‘신이 호서에 오래 있었으므로 민폐를 익히 알고 있어(臣久居湖西, 習知民弊)’, ‘신이 시골에 있은 지 오래여서 환자(還子)의 수봉을 정지하거나 탕감하는 폐단을 자세히 알고 있어(臣在鄕旣久, 詳知還上停捧蕩減之弊)’ 등과 같은 문구를 빈번히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민생의 현장에 만연해 있는 폐단을 몸소 겪어 알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박문수는 도승지로 재임 중이던 1731년(영조 7) 9월, 안면도 부근의 민생을 두루 살피라는 왕명을 받고 두 달가량 호서 지방을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아래의 인용문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복귀한 박문수의 보고 내용 중 일부이다.


『영조실록』 권30, 영조 7년 11월 17일 병자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금년에 큰 흉년이 들어서 열 집에 아홉 집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신이 호서에 비축해놓은 곡식이 있기 때문에 1백 곡(斛)의 곡식을 출연하여 공주에 주어 기민을 구제할 자본으로 보탬으로써 호서 사대부들의 창도(倡導)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정에서 지휘한 바는 아닙니다.” 

(今年大歉 十家九空 臣有庄穀於湖西 故捐出百斛穀 付之公州 以補賑資 爲湖西士夫之倡 然此非朝家所指揮者也) 

「영조실록」 권30, 영조 7년 11월 17일 병자

 


『영조실록』 권55, 영조 18년 1월 5일 을축

국사편찬위원회_조선왕조실록 

 

위의 기사에는 박문수가 호서 지방을 답사하는 와중에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의 곤궁함을 목격한 후 사재를 덜어 그들을 도왔던 정황이 반영되어 있다. 현직에 있는 관료가 공무를 수행하는 중 자기의 재산을 내어 백성을 돕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 볼 수 있으므로, 이는 가난한 백성을 돕기 위한 박문수의 의지가 특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판단된다. 이와 유사한 박문수의 언행이 담겨 있는 기사를 한 건 더 살펴보도록 하자.

 


영성군 박문수가 이때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북도의 진정(賑政)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영남의 곡물 운반이 제때에 미치지 못할 염려가 있어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이 지금 장수의 직책을 띠고 있으나, 지금은 평시라서 달리 공을 세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우선 장임(將任)을 해체하고 말을 달려 북도에 달려가서 감사·어사와 진휼할 계책을 의논하고 또 관서로 가서 감사와 곡물 운반할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휼사가 어찌 곡물을 찾아서 다른 도로 직접 가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진정 백성에게 이롭다면 어찌 구구하게 일의 체모를 논하겠습니까?” 하고, 직접 가기를 굳이 청했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도 불가하게 여겼고 또 장임의 해직을 청한 것은 일이 외람된 데 관계된다 하여 추고 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구휼하기에 바빠서 그의 말이 이러한 것이니, 추고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靈城君朴文秀時爲賑恤使 句管北路賑政 而以嶺南運穀有不及之慮 言于上曰 臣方帶將任 而今當平世 無他報効 請姑解將任 以匹馬馳往北道 與監司御史 商確賑救之策 又轉往關西 與監司 議運穀之方 上曰 賑恤使 豈可爲覓穀而躬往他道乎 文秀曰 苟利於民 何論區區事體乎 固請自往 上終不許 大臣亦以爲不可 且以請解將任 事涉猥越 請推考 上曰 急於救民 其言如此 不必推也) 

「영조실록」 권55, 영조 18년 1월 5일 을축

 

위의 인용 기사에는 진휼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당시 우참찬으로서 겸직하고 있던 어영대장의 직임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이로 인해 대신들의 논척을 받는 박문수의 모습이 담겨있다. 진휼 사업에 대한 박문수의 남다른 애착을 통해 민생의 개선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평소 다혈질의 성격과 과격한 언사로 인해 대신들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거나, 영조의 면전에서 국왕의 실정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가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던 박문수의 진심을 이해하고 보호해 주었던 영조의 배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유난히 백성을 아꼈던 박문수의 가치관은 그가 호조판서, 병조판서로 재임하던 시절 기민의 구제를 위한 재정 정책을 입안하고, 많은 민폐를 야기하던 군역(軍役) 제도의 개혁 논의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표출되었는데, 그가 이처럼 다양한 위민(爲民) 사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조의 배려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영조 대에는 기근이 잦아 진휼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므로 민생을 섭리를 잘 알고 있는 유능한 관료인 박문수가 중용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 영조는 박문수가 가진 장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민본(民本) 정치의 일선에 기용하였는데, 이러한 영조의 안배 덕분에 박문수는 평생토록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백성들의 뇌리에도 남다른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증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이러한 박문수의 인상이 인구에 회자되는 일을 거듭하며 결국에는 다종다양한 설화로 자리를 잡아가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비변사등록」 
「임하필기」 
「연려실기술」 
「당의통략(黨議通略)」 
「어사 박문수전」

 

 

관련콘텐츠

 

度支定例

松菴實記

朝鮮王朝實錄:英祖篇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어제국혼정례(御製國婚定例)(1749)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연구(硏究)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