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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 속 독도
역사 , 독도 , 일본
아픈 역사와 함께 한 우리 땅, 독도 2011년 8월, 광복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독도는 또 한 번의 몸살을 앓았다. 일본은 2011년 3월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한층 강화한 중학교 교과서 검정 통과 5개월 후인 8월 2일에 발표한 일본 방위백서에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고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한 것이다. 일본 방위백서란 일본의 방위성이 매년 간행하고 있는 백서로, 방위정책의 기본에 대해 일본 국민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한 우리 땅, 독도 

2011년 8월, 광복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독도는 또 한 번의 몸살을 앓았다. 일본은 2011년 3월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한층 강화한 중학교 교과서 검정 통과 5개월 후인 8월 2일에 발표한 일본 방위백서에서 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고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한 것이다. 일본 방위백서란 일본의 방위성이 매년 간행하고 있는 백서로, 방위정책의 기본에 대해 일본 국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작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일본은 과연 언제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까?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이 독도의 존재에 대해 인식한 시기가 17세기 중반이라고 주장한다. 그 시기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고 있었으며, 독도를 마쓰시마[松島, 송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재 일본인들이 독도라고 부르고 있는 다케시마[竹島, 죽도]는 울릉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울릉도의 다케시마라는 지명은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고 ‘대나무(다케)+섬(시마)’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독도를 마쓰시마라 칭했던 것은 울릉도와 짝을 이뤄 송죽매松竹梅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독도는 마쓰시마가 아닌 다케시마로 바뀌었고, 이는 1905년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지사가 이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킨다고 한 고시告示에서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의 시작은 17세기 말부터이다. 이는 1693년 울릉도에서 조선어민들과 일본어민들이 충돌하였고, 이 사건으로 어민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일본으로 연행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마번1)의 정관正官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은 1693년 11월에 서신과 함께 두 사람을 조선(동래부)으로 돌려보냈다.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서신에는 조선어민들이 다케시마(울릉도)에 들어와서 고기잡이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일본으로 연행했다가 돌려보내니, 앞으로는 절대로 다케시마(울릉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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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1693년) 봄에 울산蔚山의 고기잡이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대었는데, 왜인倭人의 배가 마침 이르러, 박어둔·안용복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버렸다. 그해 겨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정관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이내 우리나라 사람이 죽도竹島에 고기 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서신書信에 이르기를, 
“귀역貴域의 바닷가에 고기 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本國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토관土官이 국금國禁을 상세히 알려 주고서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는데도, 올봄에 어민漁民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토관이 그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질證質 로 삼으려고 했는데, 본국에서 번주목幡州牧이 동도東都(일본의 수도를 뜻함)에 빨리 사실을 알림으로 인하여, 어민을 폐읍弊邑(대마도를 뜻함) 에 맡겨서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금제禁制를 보존하여 두 나라의 교의交誼로 하여금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1694) 2월 23일(신묘) 3번째 기사


이에 대해 조선 정부의 처음 입장은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문제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답신에 “우리나라의 울릉도”라고 쓰는 동시에 “귀경의 죽도(다케시마)”라고 썼다. 그리고 대마번 정관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은 이 답신의 내용 가운데 “우리나라의 울릉도”라는 말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지난번에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에게 보낸 서계의 내용이 모호하므로 되찾아야 하며, 일본이 조선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일본에 대해 강경노선을 펼쳤다. 그리고 돌려받은 조선 조정의 서계를 고쳐서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동일한 섬이라는 점과 울릉도는 조선영토이므로 일본인들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내용을 첨가하여 다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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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이 전일의 회서回書를 고치기를, 
“우리나라 강원도의 울진현蔚珍縣에 속한 울릉도란 섬이 있는데, 본현本縣의 동해 가운데 있고 파도가 험악하여 뱃길이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해 전에 백성을 옮겨 땅을 비워 놓고, 수시로 공차公差를 보내어 왔다갔다하여 수검搜檢하도록 했습니다. 본도本島는 봉만峰巒과 수목을 내륙에서도 역력히 바라볼 수 있고, 무릇 산천의 굴곡과 지형이 넓고 좁음 및 주민의 유지遺址와 나는 토산물이 모두 우리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란 서적에 실려 있어, 역대에 전해 오는 사적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의외에도 귀국貴國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와 서로 맞부딪치게 되자,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끌고서 강호江戶까지 잡아갔습니다. 다행하게도 귀국 대군大君이 분명하게 사정을 살펴보고서 넉넉하게 노자路資를 주어 보냈으니, 이는 교린交隣하는 인정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높은 의리에 탄복하였으니, 그 감격을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이 어채漁採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죽도竹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나라 서적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주貴州 사람들도 또한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서계書契 가운데 죽도를 귀국의 지방이라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어선이 다시 나가는 것을 금지하려고 하였고, 귀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지경을 침범해 와 우리나라 백성을 붙잡아간 잘못은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신誠信의 도리에 흠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대, 이런 말뜻을 가지고 동도東都에 전보轉報하여, 귀국의 변방 해안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사단을 야기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서로 좋게 지내는 의리에 있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숙종실록』 권27, 숙종 20년(1694) 8월 14일(기유) 4번째 기사


이 답신을 받은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은 내용에 불만을 품고 오랫동안 조선에 체류하면서, 몇 차례에 걸쳐 조선 조정과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사이 조선 조정은 장한상張漢相을 약 180년 만에 울릉도에 대한 관리로 파견하였다. 이는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일본이 울릉도를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조선 조정은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당시 울릉도에 대한 현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울릉도를 조사한 장한상은 조사결과를『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 글에는 울릉도뿐 만 아니라 울릉도에서 본 독도의 모습까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후반 시작된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 독도는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최고의 군사상 전략지점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2)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 의정서를 근거로 군대 주둔을 비롯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령,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울릉도와 독도의 경우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 역시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강제수용하였다. 더욱이 러시아와의 해군 전투에서 3분의 1을 상실한 일본군에게 이 지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었다. 1904년 5월 18일 일본은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울릉도 삼림벌채권을 빼앗도록 강요하였고, 울릉도에 대한 러시아의 기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해 일본은 9월 1일 울릉도 남쪽과 서쪽에 각각 감시망루를 설치하였다. 이어 독도에도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군함 니타카[新高]호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니타카호가 독도 현지 조사를 시작한 9월 24일은,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3)가 ‘독도 영토 편입 및 불하 청원(リャンコ島領土編入竝ニ貸下願)’을 내무성에 제출하기 5일 전이었다. 내무성 담당자는 독도가 한국령일 가능성이 있어서, 러·일 전쟁 중에 한국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의혹을 살 수 있으므로, 시기가 좋지 않다고 각하하려고 하였다. 내무성에서 이 청원을 기각하려하자 나카이는 외무성 정무국장을 찾아갔고, 정무국장은 망루와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군사적으로 이익이 있으므로 편입을 강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독도 망루 설치는 겨울철의 험악한 날씨와 작선 수행의 어려움 등으로 지연되었다. 그 사이 1905년 1월 1일 일본군은 뤼순을 함락하였고, 1월 10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顯正]는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 회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월 28일 총리대신과 해군대신 등 11명의 각료가 참석한 가운데 독도의 편입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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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8일 일본 정부에서 발급한 독도의 일본 편입을 결정하는 문서 

일본 내각문고 소장(독도울릉학연구소 제공)


이는 일본 정부가 나카이라는 한 어민의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해 독도의 강제편입을 단행한 것이다. 이어 시마네현 지사는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오키도사 소관으로 정한다고 고시하였다. 이렇게 진행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오늘날 일본의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가장 중요한 문서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은 1905년 10월 8일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해저전선을 부설하고 이어 11월 9일 독도와 일본 마쓰에[松江]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을 완료하였다. 당시 전쟁이 끝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이러한 행동은 독도에 이은 한반도 병탄 의도를 숨기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 직후 독도는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주목하였다. 전승의 명소로, 군사적 요충지로 독도는 한반도 극동에 위치한 작은 돌섬이 아니라, 한반도와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곳이자 출발선과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독도의 강제 편입과 함께 일본은 러일전쟁 직후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제1차 한일협약(1904.9.),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1905.11.), 한일신협약(1907.7.), 한일병합조약(1910. 8.) 등으로 이어가며, 한반도 병탄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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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저자 발행자 발행년도 원문

시네마현 고시 제40호

시네마현 시네마현 1905 원문보기

한국의 해저케이블 史

연합뉴스 네이버뉴스 1993 원문보기

각주


1) 대마번(대마도)은 쓰미마후추번[対馬府中藩]으로, 이즈하라번 또는 쓰시마 번으로 불린다.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300번藩의 하나로, 쓰시마 섬 전역과 규슈 일부를 통치하였다. 
2) 한일의정서란 1904년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에 강제하여 교환한 의정서로, 내용 가운데 제4조에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이때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것, 또한 대일본제국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가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명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 전역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3)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은 1890년부터 외국 영해에 나가 잠수기 어업에 종사한 기업 형태의 어업인으로, 1893년에는 조선의 경상도·전라도 연안에서 잠수기를 사용하여 물개와 생선 등을 어획하였고, 1903년 독도 인근 연해에서 해마잡이를 시도하였다. 이 해마잡이가 수익이 매우 높자 다른 일본의 어부들이 알고 경쟁적으로 남획하는 것을 방지하고 수익을 독점하기 위해 독도의 소유자인 당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어업독점권을 획득하고자 일본의 농상무성을 통하여 한국 정부에 차용청원을 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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