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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되기 어려운 때, 죽음을 택한 올 곧은 선비, 황현(黃玹)
매천 , 황현 , 매천야록 , 오하기문 , 왕석보 , 목민심서 , 흠흠신서 , 방례초본
황현(黃玹)은 1855년(철종 6년)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나서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에 통분하며 자결한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 역사가이며 순국 지사이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아버지는 장수 황씨 황시묵이며, 어머니는 풍천 노씨이다.

이칭ㅣ매천,   본관ㅣ장수,   생몰년도ㅣ1855~1910,   시대구분ㅣ근현대

 

1) 한말의 대표적 시인이자 역사가, 지사

 

황현(黃玹)은 1855년(철종 6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서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에 통분하며 자결한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 역사가이며 순국 지사이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아버지는 장수 황씨 황시묵이며, 어머니는 풍천 노씨이다. 조상 중에는 세종 대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황위 등이 있다. 이후 몰락하여 지방의 양반가가 되었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스승은 당시 시문으로 유명하였던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였다. 황현은 젊어서 서울로 올라와 강위(姜瑋, 1820~1884),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이건창(李建昌, 1852~1898) 등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과거 시험의 폐해와 조정의 부패에 실망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뒤 1886년 구례로 이주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여기서 황현의 시와 학문이 꽃을 피웠다. 천여 편이 넘는 시를 지었다. 그리고 한말의 격동과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보며 자신이 보고 들은 역사를 적어 갔다. 그것이 바로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이다. 1905년 그를 이해하던 절친한 벗,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당시 황현도 같이 망명을 떠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아 있던 그는 1907~1908년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황현은 목숨을 끊는 시,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 시의 한 구절이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이다.

 

2) 세상을 걱정하는 깐깐한 선비

 

황현은 당시의 고관도 아닌 초야의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강위,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한말 4대가(大家)로 불리며 2천여 수가 넘는 시를 지은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동시에 개항,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을미사변, 러일전쟁, 을사늑약 등 격동의 시기를 지켜보며 나라를 걱정한, 비판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는 호남 지방의 유명한 시인이자 강직한 성격을 가진 선비였다. 그의 문인 중에는 황현을 비롯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羅喆) 등 강직한 우국지사가 등장하였다. 
황현은 학문적으로는 정약용, 박지원을 특히 존경하였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에 대해서는 “우리 동방에서 공전절후의 작품”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슷한 또래에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건창, 김택영과 깊은 친교를 나누었다. 그는 특히 이건창을 좋아했다고 했는데 이건창은 병인양요에서 자결한 이시원의 유지를 받들어 철저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성품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1898년 이건창이 사망하자 황현은 크게 슬퍼하였다. 김택영은 손꼽히는 문장가이며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 서술도 주도한 역사가이기도 했다. 그는 1905년 나라가 기울자 중국으로 망명을 한 우국지사이기도 하다. 황현 역시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지식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 거지수구(去之守舊, 망명해서 대의를 지킴), 자정치명(自靖致命, 지조를 지키고 목숨을 끊음).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유인석이 제시한 '만고에 없을 큰 변(萬古所無之大變)'에 바르게 처신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다. 유인석은 망명하여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삶은 각기 그 방식은 다르지만 그 시기를 살며 세상을 걱정하는 올곧은 보수주의자들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황현은 시인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가였다. 그 대상은 주로 썩은 관리와 지배 세력이었다. 특히 국왕과 왕비의 무능, 민씨 척족의 부패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가를 하였다. 그가 위정척사론자인가, 개화론자인가 딱 잘라 단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갑신정변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김옥균 등 주도 세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근본을 지키는 온건적 개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지하지만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을 중시하고, 전통적 사회 질서의 동요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등 유학자의 보수적 틀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직접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각종 탐관오리의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면서도 민란, 동학농민운동 등 각종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전통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가 지닌 인식의 특징과 한계가 잘 나타난다. 그는 중국보다는 일본과 서양의 침략성에 대해 강한 경계 의식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된 때부터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일제의 침략성을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신분, 계급을 넘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우는 의병 투쟁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문집은 황현이 죽은 다음 해부터 그의 동생 황원과 벗 김택영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문집은 1911년 『원집(原集)』이 상해에서 간행되었고, 이후 1913년 간행되지 않은 글을 정선하여 『속집』이 간행되었다. 1932년 전남 보성에서 박형득이 문집을 정선하여 『매천시문선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원집』에만도 시 838수가 실렸는데, 거북선의 활약을 그린 ‘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자결한 민영환, 한말의 의병장 최익현 등을 추모한 ‘오애시(五哀詩)’, 목숨을 끊으며 세상에 대한 걱정을 그린 ‘절명시’ 등 그의 우국충정을 살필 수 있는 글이 다수 실려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세상을 보고 들은 것을 비판적으로 적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의 저작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3) 철저한 비판정신, 근대사의 생생한 보고, 『매천야록(梅泉野錄)』

 

『매천야록』은 황현이 자신이 보고 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매천야록』은 김윤식의 『음청사』, 『속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와 함께 한국 근대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매천야록』에는 1864년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의 47년간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중 나라가 망하고 황현이 순절할 때까지의 기사는 그 사후 제자 고용주가 추기하였다. 이 책은 7책 6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 고종 원년부터 1893년까지의 사실은 1책 반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고, 1894년 갑오년 이후부터 자세히 실려 있다. 황현이 1894년부터 『매천야록』을 집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894년이 큰 변화의 계기라고 본 그의 시대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황현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근은 갑오년(1894년)에서 비롯하였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황현은 특히 의병 투쟁에 대해 매우 상세한 기록을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약상에 대해 빠짐 없이 수록하고자 하였다. 그 밖에도 전명운・장인환 의거, 안중근 의거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면서도 평민, 노비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순국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의 칼날을 번뜩이고 있다. 식자인(識字人)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관찬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민중의 여론들도 충실히 전하고 있다. 반면에 전문적인 역사서가 아니라 당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정보의 한계, 주관적인 판단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특히 전통질서를 흔드는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 책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45년이 걸릴 정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침략과정을 낱낱이 밝히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친일매국자들의 치부를 폭로하고 있으므로, 황현은 순절할 때 이 책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말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김택영의 글에서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세상에 공개되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된 것은 광복 후의 일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간행된 것이다.



“丁茶山, 名若鏞…研究古今, 留心民生國計, 討論著述, 窮源極委, 要爲有用之學, 而皆可爲後世法, 若牧民心書·欽欽新書·邦禮艸本·田制考等諸書是也, 在東方殆可謂曠前絶後”

“정다산(丁茶山)의 이름은 약용(若鑛)이며…과거와 현재를 연구하고 민생과 나라의 대계에 유념하여 토론하고 저술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규명하여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후세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 동방에서 광전절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황현의 학문적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산 정약용에 대한 평가이다.

 



“遂貪頑·驕奢, 實基外戚亡國之禍, 而但秉國旣久, 世惟知壯金, 而不知有國家, 或曰, 壯金國之柱石, 豈其然哉”

“탐욕, 교만, 사치에 빠져 실로 외척이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 다만 국권을 잡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오직 장동 김씨(壯金)만 알 뿐이지 국가가 있는지는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장동 김씨가 국가의 기둥과 초석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세도 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다.

 



“上親政以來, 日事流連, 每夜曲宴淫戱, 倡優·巫祝·工瞽, 歌吹媟嫚, 殿庭燈燭如晝, 達曙不休”

“임금(고종)은 친히 정치를 한 이래, 날마다 유흥을 일삼아 매일 밤 잔치를 열고 진탕하게 놀았다. 광대, 무당, 악공이 노래하고 연주하며 날이 밝도록 대궐 정원의 등촉을 대낮처럼 훤히 밝히고 날이 새도록 놀았다.” 최고 통치권자인 고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고종이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의 기강, 과거제 문란, 재정 고갈, 부정부패가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臣生年七十四, 死何足惜, 但逆賊不能討, 仇讐不能滅, 國權未復, 彊土未還, 而四千年華夏正道, 淪於糞壤, 而莫之扶, 三千里先王赤子, 化爲魚肉, 而莫之救, 此臣雖死而目不能瞑者也”

『매천야록』에 인용한 의병장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상소의 일부이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에 관한 기록을 충실히 담고자 노력하였다. 최익현의 글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은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들을 멸종시키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되찾지 못하고, 4천년 중화(中華)의 바른 도(正道)가 더러운 땅에 사라져도 붙잡지 못하고, 삼천리의 선왕의 백성(先王赤子)들이 모두 어육이 되어도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湖南賊全琫準·孫化中·崔慶善·成斗漢·金德明等伏誅, 用絞, 不用斬, 世恨其失刑, 琫準臨刑, 大罵朴·徐逆賊而死, 賊魁崔時亨亡命, 竟不得捕”

“호남의 도적 전봉준, 손화중, 성두한, 김덕명 등을 죽였다. 교형(목매달아 죽임)으로 하고 참형(목을 베어 죽임)을 하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이 (알맞은) 형벌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전봉준이 죽을 때 박(박영효), 서(서광범)을 역적이라고 꾸짖고 죽었다고 한다. 적의 우두머리 최시형은 망명하여 결국 체포하지 못했다.” 황현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는 대목이며 그의 한계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도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 자체는 전통 질서를 흔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의 개혁성, 반외세 지향 등을 주목하기보다는 도리어 약탈행위 등을 비난한 측면이 강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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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수(2010). 매천 황현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에 대한 인식. 『한국근대사연구』, 55. 34~60.
홍영기(2007). 한국의역사가 - 황현. 󰡔한국사시민강좌󰡕, 41. 17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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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섭(1969), 매천의 역사의식. 『숙대사론』, 4. 3~15.
국사편찬위원회(1971). 『매천야록』. 서울: 탐구당(번각본)
김준(1996), 『국역 매천야록』, 서울: 교문사.
한국고전번역원(2010). 『매천집』. 서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원(2005). 『한국문집총간 제348집(양원유집, 매천집)』. 서울: 한국고전번역원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14년 11월 30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a_001
국역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14년 11월 30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a_001r
황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4년 11월 28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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