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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 밝혀준 노겸군자: 사표(師表) - 퇴계 이황(1501~1570)

인간의 길 밝혀준 노겸군자: 사표(師表) - 퇴계 이황(1501~1570)


 

 

조선에 인물이 많았지만 누구나 사표로 삼을 만한 큰 스승은 그리 많지 않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표로 부족함이 없다.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라지만 퇴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적 기초가 제대로 세워졌다고 하겠다.

 

 

“지난 봄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저를 깨우치시고 위로하심이 그지없었습니다. 어서 서울로 가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하는 바람을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 탓에 곧바로 길을 떠나지 못하고 앉아서 시간만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 서둘러 답장을 올렸습니다만, 이미 선생님께서 남쪽으로 떠나신 뒤였습니다. 저는 되돌아온 편지를 잡고 길게 탄식했습니다. …지난날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깊이 연구하여야 거의 처음에 세운 뜻을 저버리지 않을 텐데, 번다한 일이 저를 얽매어 하루 종일 겨를이 없고, 또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데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요. 멀리 산마루 사이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저절로 고개가 향합니다.”

그림 1. 사단칠정과 이기론(理氣論)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고봉 기대승의 필적.

그림 1. 사단칠정과 이기론(理氣論)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고봉 기대승의 필적.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퇴계에게 올린 편지다. 사제지간인 두 사람은 이런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간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칠정은 기쁨․성냄․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심 등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이다. 당대의 대학자와 스물네 살 아래의 소장학자가 벌인 이 논쟁은 주자의 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효시다. 이 논쟁을 통해 인간 본성과 감정에 대한 성리학적 이론을 한국식으로 정립했다. 훗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씨앗이 되었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한 뒤, 서울에 와서야 처음으로 퇴계 선생을 뵙고 제자가 된다. 선조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학문에 뛰어난 이가 누구냐고 묻자, 퇴계는 기대승을 거론하며 통유(通儒, 다방면에 통달한 유학자)라고 답한 바 있다. 
  퇴계는 고봉이 벼슬길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벼슬에 임하기 전에 충분히 준비를 했어야지, 무턱대고 벼슬에 올랐다가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다니, 그대가 이토록 무책임한 사람이었단 말이오!”라며 매섭게 나무랐다. 또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사단칠정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며 후배 학자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와 학술적인 존경심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 2. 『성학십도』, 1568년(선조 1) 12월 이황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 『퇴계문집』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 장서각도서.

그림 2. 『성학십도』, 1568년(선조 1) 12월 이황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 『퇴계문집』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 장서각도서. 


  1568년 12월, 퇴계가 선조 임금에게 지어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는 그의 학문세계가 온축된 제왕학이었다. 그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가지 도설로 재편성했는데 이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임금의 마음은 만 가지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요,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공격하고 온갖 간사함이 서로 침해하는 곳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 방종이 따르게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퇴계는 선조에게 학문에 매진하여 성군이 되라고 충고한 것이다. 
  선조는 『성학십도』를 읽은 후 감동하여, “이는 학문하는 데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라. 내가 매일같이 이를 보면서 반성할 것이다.” 말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그림 3. 사대부 화가였던 겸재 정선(1676년~1759년)이 퇴계 이황에 대한 깊은 존경을 담아 그린 안동의 도산서원.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3. 사대부 화가였던 겸재 정선(1676년~1759년)이 퇴계 이황에 대한 깊은 존경을 담아 그린 안동의 도산서원. (간송미술관 소장) 


  왕의 마음을 움직인 퇴계의 학문은 생전과 사후,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계승됐고 영남학파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조선 성리학 하면 줄곧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일가를 이뤘다. 퇴계 철학의 요체는 성리학적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이었다. 이(理)와 기(氣)가 같은 비중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는데, 이(理)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림 4.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후지와라 세이카. 에도 시대의 유학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용하려했으나 세속적인 출세에 관심이 없어 대신 수제자를 추천함.그림 4.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후지와라 세이카. 에도 시대의 유학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용하려했으나 세속적인 출세에 관심이 없어 대신 수제자를 추천함.

  퇴계의 저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출판되고,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 세이카(藤員惺窩)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력은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에게로 이어졌다. 그들은 퇴계를 주자의 도통으로 보고 신명(神明)처럼 존숭했다. 

  '동방의 주자(朱子)'라 할 만큼 학문의 일가를 이룬 퇴계의 공부법은 반복학습이었다. 같은 책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고 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색했다. 이러한 사색을 통해 퇴계는 어려운 성리학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훌륭한 가문도 스승도 없었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와 양잠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홀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변변한 스승도 없어서 이웃집에 사는 한 노인에게 『천자문』을 깨쳤다. 12세가 되자, 형 이해와 함께 숙부인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부터는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 5. 「이황 초상」, 이유태, 1974. 이황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퇴계학파를 형성했다.그림 5. 「이황 초상」, 이유태, 1974. 이황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그림 6. 1976년 발행된 1천원권의 앞면에는 퇴계 이황이,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었다. 2007년부터 뒷면은 퇴계 생존 시의 건물인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산수를 담은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로 바뀌었다.

그림 6. 1976년 발행된 1천원권의 앞면에는 퇴계 이황이,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었다. 2007년부터 뒷면은 퇴계 생존 시의 건물인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산수를 담은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로 바뀌었다.

 

 

  퇴계는 주역철학에도 정통했다. 그는 노겸군자(勞謙君子)로도 불린다. 노겸은 『주역』 겸괘(謙卦)의 3효사에 나오는 말로, 애쓰고 노력하면서도 겸손함을 이른다. 퇴계는 인정이 많고, 봄바람 같이 온화한 성정이었다. 아이들이 무릎에 앉아 수염을 잡아당겨도 허허 웃기만 했고, 제자들에게도 항상 존중하는 언행을 했다고 한다. 생전에 318명의 제자를 배출한 건 스승으로서 그가 지닌 덕성을 짐작케 한다.

그림 7. 『퇴도매화첩』. 이 목판 문집에는 퇴계가 평생 동안 지은 매화시 90여수가 담겨있다.

그림 7. 『퇴도매화첩』. 이 목판 문집에는 퇴계가 평생 동안 지은 매화시 90여수가 담겨있다.

  퇴계는 매화를 사랑한 문인이기도 했다. 그가 임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저 매화 분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군자답고 멋스러운 한 생애의 마침인가.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黃卷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그림 8. 단원 김홍도의 <백매白梅>.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8. 단원 김홍도의 <백매白梅>. (간송미술관 소장)

 

 

  풍기 군수 시절에 만난 기생 두향에게 보낸 매화시다. 봄날, 고매한 선비의 서실 풍경이 한 눈에 그려진다. 가슴에 켜켜이 서린 연정(戀情)과 그리움이야 줄 끊긴 거문고 하나만 생각해도 방안 가득 넘쳐난다. 

 

그림 9.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현재의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 전경. 1574년(선조 7)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그림 9.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현재의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 전경. 1574년(선조 7)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그림 10. 도산서원. 지금은 동서당, 전교재를 갖춘 큰 건물이지만 출발은 작은 서당이었다.

그림 10. 도산서원. 지금은 동서당, 전교재를 갖춘 큰 건물이지만 출발은 작은 서당이었다. 


  퇴계는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대학총장)을 지내다 43세 때 사퇴했다. 이후로 사퇴와 임명을 반복하면서 물러난다는 의미를 담은 퇴계(退溪)라는 호로 쓴다. 53세 무렵에는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호를 쓰며 고향에 있는 명산 청량산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기암절벽의 청량산은 수려하지만 물이 부족하고 생활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도산(陶山)을 택하게 된다. 
  퇴계는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밝혀준 큰 스승이다. 그는 치도(治道)를 추구하는 경세가의 길이 아니라 수도(修道)에 주력한 스승의 길을 걸었다. 벼슬자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잡는 일보다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을 열고자 힘썼다. 그는 자신의 아호처럼 물러남의 미학을 아는 대학자였다. 아울러 늘 노력하고 겸손했던 노겸군자였다. 그가 일생동안 파고든 학문은 성리학이었지만 큰 스승으로서의 면모는 학문 분야를 떠나 영원한 현재성과 숭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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