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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千古)의 맑음 지닌 생육신: 지조(志操) -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천고(千古)의 맑음 지닌 생육신: 지조(志操) - 매월당 김시습(1435∼1493)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것과도 같고,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것과도 같으며, 신이 선창하고 귀신이 답하는 것과도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마리를 잡아내지 못하게 하였다.”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 내용이다. 매화가지에 걸린 차가운 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천재가 인정한 천재였다. 그는 세종17년에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泮宮)에서 태어났는데 ‘시습’이라는 이름은 『논어』 첫 구절 ‘배우고 때로 읽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왔다.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문자를 익히기 시작했다는 이 천재는 유년시절에 세종을 알현하는 광영을 얻어 문재(文才)를 인정받는다. 그는 나면서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였다.

 

그림 1. 이이(李珥)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한 조선 초기의 학자 김시습의 초상화(작가 미상, 보물 제1497호, 부여 무량사)(왼쪽).  1582년 이이가 『율곡집』 권14∼16 잡저에 김시습에 대해 지은 전(傳)이다. (오른쪽)

그림 1. 이이(李珥)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한 조선 초기의 학자 김시습의 초상화(작가 미상, 보물 제1497호, 부여 무량사)(왼쪽). ㅣ 1582년 이이가 『율곡집』 권14∼16 잡저에 김시습에 대해 지은 전(傳)이다. (오른쪽) 


  운명의 힘은 그를 방랑의 길로 인도했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이 1455년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 무렵 매월당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 벼슬공부였을 것이다.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한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간이나 두문불출했다. 유학에서 중시하는 강상(綱常, 삼강오륜)의 도리를 저버린 일대 사건 앞에서 그는 통곡했다. 그러다가 홀연히 일어나 공부하던 책들을 불살랐다. 현기증을 느끼고 똥통에 빠지는 기행마저 불사했다. 이후로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발길 닿는 데로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세조는 집현전 학자들까지 몰살했다. 1456년 6월 사육신(死六臣)이 자살하거나 죽임을 당해 시신이 저자거리에 버려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 시신들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매월당이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성승 등의 다섯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고 돌로 묘표를 했다. 지금은 탈이 날까 두려워 외면하지만 훗날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기리게 될 위인들이었다. 지조와 의리를 다하고 죽은 참 선비들의 주검이 버려지는 꼴을 그의 성격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려울 거 없고 거칠 것 없이 척당불기(倜儻不羈)의 삶을 산 매월당다운 행동이었다. 그 자신도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끝까지 지켜 세조에게 벼슬하지 않은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마라毋投與狗骨
개들은 떼로 모여 어지러이 다투어선集類亂喍啀
자기 무리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不獨其群戾
종당에는 주인과도 어그러지리라終應與主乖 

  훗날 관동(강원도) 유랑시절에 쓴 노골적인 시에 매월당의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매월당은 일평생 산을 벗 삼았다. 서울 근교 수락산은 경주 금오산과 더불어 매월당이 가장 사랑했던 산이었다. 수락산 동쪽 봉우리 만장봉을 동봉(東峯)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내원사가 있는 폭천(瀑川 )곁에 폭천정사를, 동봉에는 매월당을 짓고 살았다. 
한 평생 의리를 지키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간 매월당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많은 흠모를 받아왔다. 아직까지도 전국에 그의 화상을 모셔놓고 추모하는 곳이 많다.

 

그림 2. 박세당 고택 쪽에서 본 수락산 동봉 서쪽 전경. 매월당 김시습은 1472년, 38세 때 수락산 동봉 동쪽에 폭천정사를 짓고 10여년을 생활했다고 한다.(위쪽 사진). 내원사 가는 길.(아래 왼쪽 사진). 금류폭포 상단 너럭바위에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는 해서체 암각문이 새겨져있다.(아래 오른쪽 사진).

그림 2. 박세당 고택 쪽에서 본 수락산 동봉 서쪽 전경. 매월당 김시습은 1472년, 38세 때 수락산 동봉 동쪽에 폭천정사를 짓고 10여년을 생활했다고 한다.(위쪽 사진). 내원사 가는 길.(아래 왼쪽 사진). 금류폭포 상단 너럭바위에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는 해서체 암각문이 새겨져있다.(아래 오른쪽 사진). 


  수락산 동봉이 보이는 서쪽 기슭에는 유학자 박세당(1629~1730)의 처소가 있다. 그는 1680년(현종 9) 40세 때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패한 그가 추앙한 인물이 매월당이었다. 박세당은 주자학 일변도의 세상에서 주자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학자다. 그런 그가 세력싸움에서 밀려난 건 필연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를 서계(西溪)라 짓고 매월당의 동봉에 비겼다. 

“이 산을 좋아한 이는 홀로 김시습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분이 죽은 지 200년이나 되었다. 다시 그분을 이을 이가 있겠는가. 이에 암자를 지으니 김시습과 비교하여 그 뜻이 어떠한가.”
-『서계집(西溪集)』<석림암기(石林庵記)>

 

그림 3.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서쪽자락에 있는 박세당 고택.

그림 3.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서쪽자락에 있는 박세당 고택. 

  박세당은 매월당을 천고청(千古淸), 곧 천고의 맑은 분이라고 예찬했다. 수락산 서쪽 계곡 박세당 고택에서 동쪽을 보면, 동봉이 보인다. 산은 사람을 보듬고 사람은 그 산을 빛내는 법이다. 동봉과 서계의 유적이 있기에 수락산은 더욱 명산이 되었다. 

갰다가는 비 오고 비 오다가 또 개네乍晴還雨雨還晴
천도도 그렇거늘 하물며 세상인심이랴天道猶然況世情

  절묘한 시편이다. 이렇듯 매월당의 빼어난 시와 소설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흥미롭게 읽힌다. 『금오신화』에 실린 소설들은 하나같이 기발한 판타지들이다. 이승과 저승, 용궁과 천당, 지옥을 넘나들며 유감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등장인물도 사랑하는 남녀, 공자, 석가, 귀신 등 다양하다. 당시 유학자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문학적 상상력이다.

 

그림 4.

그림 4.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고 풀이되는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이다. 

  천재로 태어났지만 불우한 시대를 만나 평생 외로운 방랑자의 길을 걸었던 매월당은 조선 선비들 가운데 유불선을 통섭한 보기 드문 학자였다. 여러 사상의 회통을 추구했던 그는 ‘유가(儒家)의 본뜻을 잃지 않으면서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대의를 깨우쳐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했다. 한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평일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 질문을 받으면 응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율곡은 평했다. 

  매월당은 지조와 자유의 상징이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매화꽃가지에 걸린 차가운 달을 보며 그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권력과 돈을 좇느라 지조나 의리 따위는 우습게 내팽개치고도, 잘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며 조롱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는 알지 아는 알지我會也我會也
손뼉 치며 한바탕 깔깔 웃노라拍手呵呵笑一場

 

 

그림 5. <묵매도(墨梅圖): 달밤에 핀 매화>, 어몽룡(魚夢龍, 1566-1617),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그림 5. <묵매도(墨梅圖): 달밤에 핀 매화>, 어몽룡(魚夢龍, 1566-1617),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그림 6. 매화와 달을 완상하며 살고 싶은 도시인의 꿈을 담은 <my roman>, 최완성, 2012. 그림 6. 매화와 달을 완상하며 살고 싶은 도시인의 꿈을 담은 < my roman >, 최완성,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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