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예술적 승화: 풍류(風流) -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

존재에 대한 연민과 예술적 승화: 풍류(風流) -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다다르면 곧 깨달으리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山僧貪月光
甁汲一壺中
到寺方應覺
甁傾月亦空

그림 1. <월하탄금도> 이경윤(李慶胤 1545~161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그림 1. <월하탄금도> 이경윤(李慶胤, 1545~161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샘물속의 달을 노래한 절묘한 시, 「영정중월(詠井中月)」이다. 당대의 유학자 문인이 불교적 공(空)의 세계관을 그림 그리듯이 멋진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쉬운 글자들을 썼지만 운을 정확히 맞췄고 심오한 사상을 담았다. 기막힌 시적 재능에 질투가 날 정도의 절창이다.

 

그림 2.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초상(왼쪽)과 우리나라의 역대 필적을 모아놓은 『명가필보』에 실린 이규보의 필체(오른쪽).

그림 2.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초상(왼쪽)과 우리나라의 역대 필적을 모아놓은 『명가필보』에 실린 이규보의 필체(오른쪽).

  이규보(李奎報)는 13세기 고려가 낳은 최고의 문장가이자 풍류남아다. 그는 시와 거문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 불렀다. 이쯤이면 자못 낭만적인 아취들로 넘쳐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불행히도 최씨 무신정권기이자 몽골 침략기였다. 예술적 감성이 넘쳐나는 문인이 그 험악한 고난의 연대를 살아야 했으니, 시와 거문고와 술은 어쩌면 치유의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 집엔 잔술도 바닥 나邇來盃酒乾
극심한 술 가뭄에 목이 타던 차에是我一家旱
고맙네, 보내준 약주感子餉芳醪
단비가 따로 있겠나快如時雨灌 
 

  그는 22세 때 사마시에 수석 합격하고 이듬해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다. 그렇다고 바로 관직을 얻을 수는 없었다. 도리 없이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충헌 집정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을 써달라는 자기추천서였다. 최충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중에서야 자신을 칭송하는 이규보의 시에 만족하고 발탁한다. 이규보 나이 32세 때였다. 구차스런 출사였다. 
  당대의 대문장가가 무신 집정의 발아래 무릎 꿇고 관직을 구했으니 아부꾼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시대상황에서 개경에서 사는 문사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백면서생이 먹고사는 길은 벼슬밖에 없었다. 이규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출중한 문장력으로 몽골 황제에게 진정표(陳情表)까지 올렸다. 

“(고려가) 병사를 더 내어 만노(萬奴)를 토벌하자고 하시는데 이 구석진 곳에 있는 소국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대군이 휩쓸고 간 뒤라 남은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산 자도 거의 부상당한 끄트러기인데다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하여 다 죽어버렸나이다. 그러므로 천병(天兵)을 도울 만한 힘이 없사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명을 어기게 되었으니, 그 죄는 비록 피할 수 없으나 그 정상을 용서받음직 하옵니다.”

 

그림 3. 이규보가 몽골황제에게 올린 외교문서 <진정표>(왼쪽)는 그의 대표적인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오른쪽) 28권에 수록돼 있다.

그림 3. 이규보가 몽골황제에게 올린 외교문서 <진정표>(왼쪽)는 그의 대표적인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오른쪽) 28권에 수록돼 있다. 
 

  고려가 용병을 파견하고 전쟁 물자까지 보내라는 몽골황제에게 이쪽의 사정이 참혹함을 들어 너그러운 아량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규보는 발군의 문장력으로 이처럼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도맡아 써야만 했다. 만일 그가 최충헌에게 잘 보여 벼슬자리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문서로조차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청산별곡이 울려 퍼지던 시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산과 바다에 숨어버린다면 나라는 결딴나고 만다. 이규보는 수양산에 숨어산 백이(伯夷)보다 어느 때라도 출사한 이윤(伊尹)이나 유하혜(柳下惠)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어찌 자의식이 없었겠는가. 그는 술과 예술로 치유하고 승화시키는 길을 택했다. 특히 원나라(몽골)에 당한 굴욕은 민족적 자존감을 세워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하게 한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누볐던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노래한 장편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그래서 탄생했다. 몽골군에 짓밟히고 무신정권과 타락한 불교, 이렇개 3중고에 시달렸던 고려인들은 이규보의 서사시를 읽으며 적잖이 위로받았을 것이다.

 

그림 4.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된 『동명왕편』 서문.

그림 4.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된 『동명왕편』 서문. 

세상에서는 동명왕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들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제법 그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일찍이 그것을 듣고는 웃으며 말하였다. "선사(先師) 공자께서는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신(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이는 실로 황당하고 기괴한 일이니, 우리들이 이야기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다《위서》와 《통전》을 읽게 되었는데 역시 그 사실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니, 어찌 자기 나라의 것은 자세히 밝히고 외국의 것은 소홀히 다루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국사(國史)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글이니, 어찌 그 사실을 함부로 전하였겠는가?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雖愚夫騃婦 亦頗能說其事. 僕嘗聞之 笑曰 : 先師仲尼 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 非吾曺所說. 及讀魏書通典 亦載其事. 然略而未詳 豈詳內略外之意耶? …况國史直筆之書 豈妄傳之哉?

 

  이규보는 비유와 의인화의 귀재였다. 그에게는 미물이건 사물이건 사람이건 가릴 것 없이 똑같은 처지로 보였다. 전란과 폭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연민의 발로였음은 물론이다. 너무도 유명한 <슬견설(虱犬說)>을 보자. 몸에 기생하는 이와 개의 우화다.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 맹세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火爐)를 끼고 앉아,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걸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랬더니 손이 실망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이 아닙니까? 나는 큰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벌레‧개미‧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합니다.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말한 것이지 어찌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겠습니까? 당신이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안 아픕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몸통이나 가락과 마디를 불문하고 혈육이 있기에 그 아픔은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것들인데 어찌 저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것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보십시오. 그런 뒤에야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슬견설(虱犬說)>

 

  개가 죽는 거나 이가 죽는 거나 아까운 생명이 꺾이는 건 마찬가지다. 난세를 당하여 어렵사리 목숨을 붙이고 살아가는 고려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 이 땅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뭇 생명을 사랑하는 정서가 있었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문기(文氣)가 있었다. 몽골침략기에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 경판 판각을 국책사업으로 벌인 것도 이런 정서와 예술혼의 밑바탕이 있어서 가능했다.

<쥐를 놓아주며(放鼠)>

사람은 하늘이 만든 걸 훔치고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이 훔친 걸 훔치는구나爾盜人所盜
다 같이 먹고살려고 하는 일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겠니何獨於汝討

 

  고달픈 인생의 깊은 슬픔을 아는 가객(歌客) 이규보의 풍류정신은 단순한 음풍농월이 아니다. 세상 만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다. 이나 개, 쥐뿐만이 아니라 부러진 책상과 벼루까지도 의인화하고 자신의 처지와 일체화시킨다. 그래야만 선비로서의 자기 부끄러움이 씻기는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개화기, 선교사로 파송된 캐나다 출신 목사 게일(J.S.Gale, 奇一, 1863~1937)의 한국문화예찬론이다. 조선인을 미개인 취급하던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달리, 게일은 한국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에 매료된다. 그는 이규보를 좋아해 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강화도에 있는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한글 성경 번역 사업을 하고, 종로 연동교회에서 목회하다가 40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떠날 때 『동국이상국집』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림 5.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의 묘와 재실.

그림 5.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의 묘와 재실. 
 

  이규보의 문학은 지금 우리시대에도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어느 시대인들 인생의 애환이 없겠는가. 맹자의 말처럼 일치일란(一治一亂)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이규보는 무신정권 체제 아래서 몽골침략까지 당한, 한국사 최대의 전란기를 살면서도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의 부끄러움을 시로 드러냈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표준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양심이 있을 수 없다. 용기는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나온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를 때, 무슨 일이건 서슴없이 자행하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는 망하는 지경에 이른다. 
  술 마시지 않은 날이 단 하루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대문장가 이규보의 고단한 삶과 예술적 승화는, 하루하루를 급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풍류란 꼭 여유로움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바쁜 일상에서도 누릴 수 있어야 진정한 풍류인이다. 일찍이 최치원이 밝힌 것처럼 풍류는 한국인의 맥박이자 혼이다.




 

관련콘텐츠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