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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선비였다: 성왕(聖王) - 정조(1752~1800)

왕도 선비였다: 성왕(聖王) - 정조(1752~1800)

 

그림 1. <정조어진>, 전주 경기전(慶基殿) 내 어진박물관.

그림 1. <정조어진>, 전주 경기전(慶基殿) 내 어진박물관.

그림 2. <세종어진>, 세종대왕유적관리소.

그림 2. <세종어진>,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성외왕(內聖外王)에 있다.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추고, 밖으로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바랐다. 따라서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당연히 성왕(聖王)이었다. "대군이나 세자시절부터 체계적인 커리큘럼에 따라 학습 받다가 왕이 되면 경연(經筵)을 통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따라서 왕에게도 스승이 있었다. 임금에게 죽을 때까지 공부하도록 한 조선왕조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그렇게 공부하는 왕을 지향했지만 조선왕조 제27대 518년간 성왕으로 인정받는 왕은 단 두 임금밖에 없다. 세종과 정조다. 집현전을 만들어 문예부흥을 꾀하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은 어떤 신하보다 가장 먼저 『성리대전』을 읽었을 만큼 호학(好學)하는 군주였다. 그의 손에서는 책이 떨어질 줄 몰라서 눈병이 날 정도였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육성하는데 힘을 쏟았고 과학기술을 발명하는데도 앞장섰다.

 

 

 

그림 3.『성리대전性理大全』. 1415년 명나라 영락제 때, 송宋나라의 성리학설을 분류 집대성해 편집한 책.

그림 3. 『성리대전(性理大全)』. 1415년 명나라 영락제 때, 송(宋)나라의 성리학설을 분류 집대성해 편집한 책.

그림 4.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1799년, 필사본, 60권 60책,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6호, 서울역사박물관.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은 시문·윤음·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편집한 문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그림 4.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1799년, 필사본, 60권 60책,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6호, 서울역사박물관.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은 시문·윤음·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편집한 문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는 손꼽히는 명군(明君)이었다. 25년 재위기간 동안 줄곧 암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184권 100책이라는 방대한 저술(『홍재전서(弘齋全書)』)을 남긴 인문주의자였다. 노론이 전횡하던 시절에 소론과 남인을 고루 등용하는 등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널리 인재를 불러 썼다. 이른바 탕평(蕩平)의 정치철학이다.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이자 싱크탱크였던 규장각(奎章閣)은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규장각 설치를 명하여 독서를 통한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그림 5. (왼쪽) 창덕궁 후원(비원)에 있는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 보물 제1769호). 오른쪽 아래로 부용정이 내려다보인다. (오른쪽) 김홍도의 《규장각도(奎章閣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正祖)가 영조(英祖)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다음날 창덕궁 후원(後苑)에 규장각을 세우도록 하명했다. 완공되자, 전경을 김홍도에게 그리게 했다.

그림 5. (왼쪽) 창덕궁 후원(비원)에 있는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 보물 제1769호). 오른쪽 아래로 부용정이 내려다보인다. l (오른쪽) 김홍도의 《규장각도(奎章閣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正祖)가 영조(英祖)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다음날 창덕궁 후원(後苑)에 규장각을 세우도록 하명했다. 완공되자, 전경을 김홍도에게 그리게 했다.

  정조 탕평정치의 핵심은 붕당을 초월한 인재등용, 젊은 개혁 인재양성을 위한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서얼차별을 배제한 서얼허통(庶孼許通)이다. 이 가운데 서얼허통 정책은 노비혁파, 금난전권 폐지, 토지개혁과 더불어 가장 혁신적인 정책이었다. 
즉위한 이듬해 1777년 3월 21일, 정조는 이조와 병조에 명한다. 

"아! 저 서인 부류들도 나의 신하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의 허물이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소통시킬 수 있는 방법과 권장 발탁할 수 있는 방법을 특별히 강구하게 하라."
  바로 이 서얼허통의 수혜자가 ‘규장각 4검서관(檢書官)’으로 통하는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다. 이들은 명망 있는 서얼 출신 학자들이었는데 1779년, 모두 초대 검서관으로 선임되었다. 검서관은 오늘날 도서관 사서에 해당한다. 이들 4검서관은 정조시대의 문예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연암 박지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항(閭巷, 길거리)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일생을 마칠 뻔한 이들이 성군을 만나 뜻을 펼치고 이름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 6. 오늘날 도서관 사서에 해당하는 정조시대의 규장각 4검서관의 묵적과 초상. 왼쪽부터 이덕무의 친필, 박제가, 유득공의 발해고, 서이수.

그림 6. 오늘날 도서관 사서에 해당하는 정조시대의 규장각 4검서관의 묵적과 초상. 왼쪽부터 이덕무의 친필, 박제가, 유득공의 발해고, 서이수. 
 

  문명한 나라에서 머리 밝은 인재를 썩혀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습노비제도를 없애고 임금노동자로 만들려 했던 정조는 근대성을 지닌 개혁군주였다. 시전(市廛)이 가지고 있던 독점권(금난전권)을 폐지함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려 했고, 개념이 명확하진 않았더라도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나아가려 했던 점은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萌芽)를 보는 듯하다. 
  왕은 군사(君師)의 위치에 있는 이다. 뭇 신하와 백성의 스승인 것이다. 정조실록에는 유독 ‘군사지위(君師之位)’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만백성의 스승 된 지위라는 의미다. 호학군주였던 정조는 스스로 군사를 자처하며 신하들을 독려했다. 경연 자리에서도 경연관들을 가르칠 정도로 박식했다. 
  정조의 빼어난 수상록인 『일득록(日得錄)』은 규장각 신하들이 일상에서 보고 들은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빛나는 아포리즘이 녹아있고 철저한 자기반성과 치열한 학문자세를 엿볼 수 있다.

 

 

나태하고 안일한 사람에게는 하루도 십 년같이 길게 느껴지지만, 자기의 일에 부지런히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찰나처럼 짧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니 남들이 잠든 뒤에 잠을 자고, 남들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비결이다. 

땅은 많지만 내 마음을 끄는 땅은 많지 않다. 사람은 많지만 내 마음을 끄는 벗은 드물다. 세상은 넓지만 내 마음을 끄는 일은 별로 없다. 책은 많지만 내 마음을 끄는 글은 적다. 

선善이란, 공부할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정치할 때는 정치를 잘하는 것이고, 휴식을 취할 때는 푹 쉬는 것이다.

그림 7. 1814년(순조 14)에 간행된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권161∼178에 수록되어 있는 『일득록(日得錄)』. 정조가 경연 등 제반행사에서 대신, 각료, 유생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를 수록한 책. 장서각도서.

그림 7. 1814년(순조 14)에 간행된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권161∼178에 수록되어 있는 『일득록(日得錄)』. 정조가 경연 등 제반행사에서 대신, 각료, 유생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를 수록한 책. 장서각도서.

 

 

  개혁적인 호학군주의 한마디 한마디가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어느 인문학자의 지적처럼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알면서, 성군 정조의 『일득록』은 모르는 게 현실이다.

 

그림 8. (왼쪽) 경기 수원시 화령전(華寧殿)의 정전(正殿)인 운한각(雲漢閣)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 이 그림은 1989년 이길범 화백의 상상화로, 진짜 정조의 어진은 부산 국악원의 조선왕어진보관소에 있다가 6·25전쟁 때 소진되었다고 한다. I (오른쪽) 시와 그림에 뛰어났던 정조가 그린 「정조필 국화도(正祖筆 菊花圖)」, 보물 제744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림 8. (왼쪽) 경기 수원시 화령전(華寧殿)의 정전(正殿)인 운한각(雲漢閣)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 이 그림은 1989년 이길범 화백의 상상화로, 진짜 정조의 어진은 부산 국악원의 조선왕어진보관소에 있다가 6·25전쟁 때 소진되었다고 한다. l (오른쪽) 시와 그림에 뛰어났던 정조가 그린 「정조필 국화도(正祖筆 菊花圖)」, 보물 제744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아쉽게도 정조의 개혁은 미완에 그친다.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발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한다. 정조가 열었던 조선 후기 르네상스시대는 세도정치의 등장으로 몰락하면서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한다. 실패한 개혁을 미화하는 건 옳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당시 노론 벽파는 무조건 틀렸다고 보는 것도 무리다. 개혁의 성공 여부는 당대 사회역량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후 조선왕조는 동서 문명교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역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과 외재적 발전론(식민지 근대화론)이 대립각을 세워왔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인정할 수 없다. 다만 얼마간의 부분적인 역할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의 논의시점을 좀 더 소급해서 잡을 필요가 있다. 이미 국세가 기울었던 고종시대가 아니라, 문화가 융성했던 18세기 영‧정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서구사회와 대등한 입장에서 풍부한 담론거리가 확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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