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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지(邑誌)의 편찬과 발달
양보경 |
읍지 , 편찬 , 조선 , 문소지 , 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 여지도 , 승평지 , 탐라지 , 북관지
조선 초기의 국가 주도의 전국지리지 편찬은 1530년(중종 25) 동국여지승람의 신증 이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지의 양식이 변화하여 국가의 명령에 의하지 않고 지방 단위로 사림과 수령을 중심으로 지리지가 제작되는데 이것이 읍지(邑誌)이다. 읍지란 각 고을(읍)의 지리지로서, 지방 행정단위인 부・목・군・현 등을 단위로 하여 작성된 지리서를 말한다. 16세기 이후에는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어 조선 시대의 지리지를 대표한다.

1) 읍지의 시기별 변화

 

조선 초기의 국가 주도의 전국지리지 편찬은 1530년(중종 25) 동국여지승람의 신증 이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지의 양식이 변화하여 국가의 명령에 의하지 않고 지방 단위로 사림과 수령을 중심으로 지리지가 제작되는데 이것이 읍지(邑誌)이다. 읍지란 각 고을(읍)의 지리지로서, 지방 행정단위인 부・목・군・현 등을 단위로 하여 작성된 지리서를 말한다. 16세기 이후에는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어 조선 시대의 지리지를 대표한다.

 

읍단위 지리서인 읍지의 초기 형태는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읍지들은 조선 전기에 있었던 일련의 전국지리지 편찬 과정에서 이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 만들어 졌을 것이다.[1] 조선에서 편찬된 최초의 사찬읍지는 기록으로 볼 때 이자(李耔)가 1507년(중종 2)에 편찬한 경상도 의성의 읍지인 문소지(聞韶志)이다.[2] 그러나 후대의 읍지들을 통해 16세기 전반의 읍지에 관계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16세기 후반 이후에 편찬된 읍지와 같이 체제를 갖춘 것이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16세기 후반 이전에는 읍의 기록으로서 선생안(先生案)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읍의 수령의 재임 사실만을 기록한 것도 있었으나, 그 밖에 건치연혁・산천・도리・인물 등을 간략히 기록하여 각 군현에서 치정(治政)에 도움이 되도록 한 것들도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선생안을 후대의 읍지 편찬자들이 읍지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소지(聞韶志)』의 경우 선생안 보다는 내용이 풍부하며, 『동국여지승람』의 체계에 가까운 사찬읍지의 초기 형태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읍지가 각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조선 전기 전국지리지 제작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1413년(태종 13)에 전국의 지방행정제도와 구역이 한양 중심으로 재편된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지났으므로 각 지방의 역사와 전통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던 데에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읍지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 일정한 규식에 맞추어 간략하게 정리되었던 전국지리지와 달리, 각 지역에서 지역의 거주자가 자신의 고장에 관해 기술한 내용이 풍부한 책이다. 그러므로 읍지는 지역에 관해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지지의 본질에 더욱 충실한 형태였다. 읍지의 편찬으로 중세 지지(地誌)의 체계가 정립되었으며, 조선시대의 국토의 실상과 구조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를 전해 주게 되었다.

 

현존하는 천여 종의 읍지를 소장처별로 검토해 보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가장 많은 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읍지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읍지 내용과 체제에서 몇 단계의 성격 변모가 이루어짐이 확인된다.

 

16・17세기는 읍지의 발아기로서 사찬읍지들이 대부분 편찬되어 내용이 풍부하고 사실적인 읍지들이 많다는 특징을 보인다. 18세기 이후는 관찬읍지가 사찬읍지를 압도하는 점에서 16・17세기와 구별된다. 19세기 이후는 읍지의 새로운 항목의 신설에 나타나듯이 종합적 성격으로부터 군사・재정적인 내용 중심으로 읍지의 성격이 변모한다.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된 시기는 19세기 후반 고종대이다. 고종대에 편찬된 읍지는 5백 종 가까이 되어 현존하는 개별 읍지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현존 도별 읍지의 대부분이 고종대에 작성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고종대의 읍지가 차지하는 양적 비중은 훨씬 증가하게 된다. 고종대의 읍지는 크게 1871년, 1895년, 1899년 세 차례에 걸쳐 편찬되었다.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읍지들은 전통적인 지리인식에서 위기에 부딪친 국가의 동요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시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읍지의 성격이 군사, 재정 중심의 내용으로 변모되었다. 막대한 인력과 노력을 들여 방대한 문헌을 남겼으나 읍지를 통해 정국을 타개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편찬된 읍지들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으로 변모되기 이전의 한국의 각 지역의 모습을 정리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남게 되었다.

 

 

<표 3>  읍지의 시기별 분포와 내용의 변화

시기

내용

 1600              1650          1700       1750      1800         1850      1900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미상

郡縣誌의

종수

3(9)

2(2)

3(7)

1(3)

2

7
(17)

0(1)

36
(22)

105
(6)

30
(11)

30
(3)

21
(3)

425
(6)

6

195

사찬읍지의 종수

3(5)

2(2)

3(5)

1(1)

2

5
(10)

0(1)

8(7)

5(2)

3(4)

6(0)

8(0)

4(1)

0

2(1)

道誌의
종수

 

 

(1)

 

 

(2)

 

(1)

1

2(1)

2

1

30

 

17

신설항목

 

 

 

 

 

 

 

邑地圖

道路

田稅

大同

均稅

糶糴

(坊里)

場市

 

 

 

鎭營誌

事例

 

 

 註 ( )안의 숫자는 부전읍지의 숫자임.

 

 

2) 조선 중기의 사찬읍지

 

16~17세기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격동을 겪으면서도 각 지역에서 읍지의 편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국가의 명령에 의한 지리지 편찬이 아닌, 지역의 사림 또는 수령과 사림의 협조에 의한 사찬읍지의 편찬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이다.

 

16・17세기는 읍지가 싹트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사찬읍지가 중심이 되었으나, 관찬읍지도 혼효되어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찬읍지도 지방의 사족들의 협조, 또는 제작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찬읍지와 관찬읍지 사이에 내용상의 큰 차이가 없으며, 후대의 읍지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상세함이나 질적인 면에서의 차별성도 없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는 사찬읍지와 관찬읍지의 구별이 큰 의미가 없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읍지들은 지방통치 자료, 향촌 질서의 재편과 안정, 재지 세력의 현양, 군현의 역사지리서, 군사・방어의 강화와 대비, 교화의 수단 등 여러 유형의 읍지들이 편찬되어 사회적 요구, 각 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나타냈다.

 

16~17세기에 읍지는 팔도에서 모두 편찬되었다. 현재까지 파악한 읍지들을 도별로 보면 한성부 1종, 경기도 3종, 충청도 5종, 전라도 9종, 경상도 16종, 강원도 7종, 황해도 2종, 평안도 5종, 함경도에서 4종 등 총 52종이 편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구역 품계 중 대읍이라 할 수 있는 목(牧)과 부(府)지역에서 편찬된 읍지가 각각 11종, 29종이다. 당시에 전국의 목과 부의 수는 각각 20개, 87개였으므로, 부와 목의 60.0%, 33.3%의 지역에서 읍지를 편찬한 것이다. 반면에 전국의 지방행정구역 가운데 수적으로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군(郡)과 현(縣)에서는 각기 9종씩을 편찬하여, 전국 군현수와 대비해 보면 각각 12.5%와 5.8%의 군현 지역에서 읍지가 편찬되었다. 이를 통해 16~17세기에는 품계가 높은 지역에서 읍지 편찬이 상대적으로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충청도의 가장 큰 고장 4곳 중 청주를 제외한 공주・홍주・충주에서, 경상도의 경우에도 경주・상주・안동・진주・동래・성주・선산・밀양 등 대부분의 대읍에서 읍지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품계가 높은 지역에는 직위가 높은 수령이 파견되었으며, 지방이 넓고 인구가 많아 사족 등 인적 자원이 풍부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18세기 이후에는 전국 대부분의 부목군현에서 읍지가 편찬되었다. 그러므로 대읍(大邑)중심의 읍지 편찬은 16・17세기의 특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문화 수용의 1차 거점지이며, 사족의 거주가 풍부하였던 지방 중심지에서 일차적으로 읍지 편찬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가 꽃피웠던 것이다.

 

북한에서 발행된 『우리나라 중세과학기술사』에는 지리학 분야가 과학기술사의 한 분야로 독립 설정되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중기의 읍지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해주읍지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해주읍지는 황해도 해주읍에 관한 문건들이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없어졌기에 그것을 다시 마련

할 목적으로 1596년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그해에 완성한 읍지이다. 이 책에서는 우선 고구려와 신라대에 부르던 해주읍의 이름을 비롯하여 옛 이름 10가지를 밝히고 여러 개의 읍터와 성토들의 위치와 크기를 고증하였다. 여기에서는 특히 1591년에 성문과 해자 사이에 들다리(거교)를 놓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그 구조와 크기를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다리의 앞부분 양쪽 끝에 쇠고리줄들을 매여달아 다리 전체를 들어 올려서 적이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도록 된 다리였을 것이다. 해주읍지에서는 다음으로 읍을 둘러싸고 있는 10여 개의 높은 산을 비롯하여 령과 고개 그리고 여러 갈래의 강과 나루터 및 가까이에 있는 섬 등의 지형적 특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밖에도 다리, 역참 등 교통운수관계의 지리적 대상물들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는 특히 해주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140종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 역시 봉건적 수탈 대상물을 상세히 조사 등록한 것이지만 16세기 말의 해주지방의 농산물과 수산물 및 수공업제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여 준다.[3]

 

 

이 글을 통해 임진왜란 직후인 1596년에 편찬된 해주읍지가 북한에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읍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용된 글의 내용으로 보아 해주읍지는 연혁, 성지, 산천, 도로, 역원, 물산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읍지의 체제가 16세기 말에 편찬되었던 남한 지역의 읍지의 체례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17세기의 지방지로 널리 알려진 승평지(順天), 탐라지(濟州), 북관지(함경북도), 동경잡기(慶州), 경산지(星州)와 함께 1626년에 편찬된 강동지(江東), 1638년에 편찬된 영주지(古阜), 함산지통기(咸興) 등을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읍지로 소개하였다.[4] 이로써 남한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북한에 현존하는 16세기의 읍지로 황해도 해주읍지(海州邑誌), 17세기의 읍지로 평안도 강동의 강동지(江東志), 전라도 고부의 영주지(瀛州志) 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표 4> 16ㆍ17세기에 편찬된 팔도의 행정 단위별 읍지수

행정단위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합/전국

비율

1

3

3

3

 

1

 

1*

12/20

60.0

2

 

2

5

5

1

4

10*

29/87

33.3%

 

1

1

4

2

 

 

1*

9/72

12.5

 

1

3

4

 

 

 

 

9/154

5.8

3(1)

5(4)

9(4)

16(5)

7(5)

2(0)

5(2)

12(2)**

59/333

17.7

 

 

 

 

 

 

 

 

주)괄호 안의 숫자는 전하지 않는 부전읍지의 숫자임.
*함경도의 『北關誌』에는 7개 府, 1개 牧, 1개 郡의 읍지가 수록되어 있다.
**『北關誌』 1종의 읍지에 9개 군현읍지가 수록되었으므로, 16ㆍ17세기에 편찬된 함경도 읍지수는 4종임.

 

 

 

                  <표 5> 조선 중기에 편찬된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의 읍지

도명

읍지명

소장처 도서번호

지역명

편찬시기

편찬자

편찬주체

현존여부

서울

薰陶坊鑄字洞志

고4790-16

서울 南部

1621

權憘

사찬

현존

경기도

松都志

일사 915.12-805s

개성

1648

金堉

수령

현존

江都志

개인소장

강화

1695

李衡祥

사찬

현존

黃驢志

 

여주

 

尹暉

사찬

부전

충청도

湖山錄

개인소장

서산

1619

韓汝賢

사찬

현존

忠原志

 

충주

1603

 

 

 

公山誌

 

공주

 

 

 

부전

洪陽志

 

홍주

 

李睟光

 

부전

鴻山縣誌

 

홍산

 

 

 

부전

강원도

水城誌

장2-4250

간성

1632

李植

수령

현존

陟州誌

國史B-6BBA

삼척

1662

許穆

수령

현존

通川志

 

통천

1592

鄭逑

수령

부전

臨瀛誌

 

강릉

1593

鄭逑

수령

부전

關東志

 

강릉

1595

鄭逑

수령

부전

春川邑誌

 

춘천

1648

嚴愰

수령

부전

宜春志提要

 

춘천

 

許穆

 

부전

 

 

 

 

 

 

 

 

 

 

 

 

 

 

 

 

 

 

주)소장처는 도서번호 앞에 약자로 기록하였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후의 표도 같음.

고 :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도서, 규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

장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國史 : 국사편찬위원회, 한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 : 국립중앙도서관

 

 

                            <표 6> 조선 중기에 편찬된 전라도 지역의 읍지

도명

읍지명

소장처 도서번호

지역명

편찬시기

편찬자

편찬주체

현존여부

전라도

濟州風土錄

규11616

제주

1521

金淨

사찬

현존

昇平志

고대, 성대

순천

1618

李睟光

수령

현존

耽羅志

한-62-179

제주

1651

李元鎭

수령

현존

耽羅志

 

제주

 

李燾

崔與天

사찬

부전

龍城志

한-62-42

남원

1699

鄭逑

사찬

현존

同福志

 

동복

1584

 

수령

부전

茂長縣邑誌

 

무장

1636

 

 

부전

瀛州志

북한

고부

1638

 

 

 

興陽志

 

흥양

1700

宋來夏
柳東興

 

부전

 

 

                      <표 7> 조선 중기에 편찬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읍지

도명

읍지명

소장처 도서번호

지역명

편찬시기

편찬자

편찬주체

현존여부

황해도

延安府誌

규10889

연안

1581

尹斗壽

수령

현존

海州邑誌

북한소재

해주

1596

 

 

현존

평안도

平壤志

규4885

평양

1590

尹斗壽

수령

현존

成川志

규12399

성천

1603

李尙毅

수령

현존

江東志

북한소재

강동

1626

 

 

현존

龜城志

 

구성

1626

李㙉

 

부전

江界志

 

강계

1695

李麟徵

 

부전

함경도

北關誌

규1261

鏡城, 吉州,
明川, 富寧,
會寧, 茂山,
鍾城, 穩城, 慶源

1693

申汝哲

 

 

咸山志

 

함흥

1610

 

 

 

安邊志

 

안변

 

金堉

 

부전

三江志

 

삼수

1681

李香复

 

부전

 

 

                               <표 8> 조선 중기에 편찬된 경상도 지역의 읍지

도명

읍지명

소장처 도서번호

지역명

편찬시기

편찬자

편찬주체

현존여부

경상도

咸州誌

규10985

함안

1587

鄭逑

수령

현존

永嘉誌

규15562

안동

1602

鄭逑

사찬

현존

東萊誌

 

동래

1611

成晉善

수령

부전

商山誌

고4709-31

상주

1617

李埈

사찬

현존

一善誌

규15484

선산

1630

李埈

사찬

현존

晋陽志

고4790-17

진주

1632

成汝臣 河忄登

사찬

현존

丹城誌

 

단성

1640

李時馥

 

현존

密陽誌

규6844, 6861

밀양

1652

申翊全

 

현존

天嶺誌

한-62-26

함양

1656

鄭秀民

사찬

현존

東京雜記.

규1255

경주

1669

閔周冕
李埰 외

사찬

현존

鰲山誌

국립고2759-1

청도

1677

閔周冕 李埰

사찬

현존

星山誌

한-62-167-2

성주

1677

李元禎

사찬

현존

聞韶志

 

의성

1507

李耔

 

부전

昌山志

 

창녕

1581

鄭逑

 

부전

咸安志提要

 

함안

 

許穆

 

부전

苞山志

 

玄風

 

 

 

부전

 

 

 

3) 전국군현읍지의 집성과 지역 정보의 종합화

 

18세기는 국가 주도의 지리서・지도의 편찬 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17세기 중엽 이후 사회 질서가 서서히 정비되어 가고, 지방사회에 대한 국가의 파악도 진전되어 갔다. 중앙의 행정력이 하부 단위까지 침투, 정비됨에 따라 지방 행정 자료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따라 중앙 정부는 개별적인 필요에 의해 군현 단위로 작성하였던 읍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작성된 후 150여 년이 지나 전국 각 지역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담은 종합적인 지리지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던 숙종대(재위기간: 1674년~1720년)에 몇 차례에 걸쳐 지리지의 편찬이 시도되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18세기 중엽인 영조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으니, 이 책이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이 책의 체제는 16세기 후반 이래 대두된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방리(坊里), 도로(道路), 부세(賦稅)에 관한 제 조항 및 각 군현 읍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채색지도(彩色地圖)이다. 이 밖에도 군사적인 측면이 강화되어 군병(軍兵)항목을 신설하고 군정수(軍丁數) 및 조직, 배치 등을 각 군현별로 상세하게 수록하고, 지도에도 진보(鎭堡) 등 군사적인 시설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각 읍의 첫머리에 각 군현의 채색 지도가 첨부된 점이다.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이라는 의미의 『여지도서』라는 책이름이 보여 주듯이 이 책의 체재에서는 지도가 중시되었다. 각 군현마다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한 대축척지도가 첨부되어 지도와 읍지가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다. 읍지의 내용을 지도로 도식화함에 따라 읍지의 기록에 정확성이 증가되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 인식에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여지도서』는 공시적(共時的) 기록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전국에 걸쳐 동일한 시기에 작성된 읍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내용상으로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종합적 성격을 지니며, 18세기 중엽의 지방사회를 전국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영조를 이은 정조도 지리지와 지도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다. 지리지 편찬은 1788년(정조 12)부터 『해동읍지(海東邑誌)』(또는 海東輿地通載)의 편찬으로 본격화되었다. 정조는 이 책의 편찬을 주도하고, 몸소 서문을 편술하였음은 물론, 호구와 방리 등 항목・호구 숫자 작업 내용을 점검하였다.[5] 또한 『해동읍지』의 편찬을 위해 지리・지도전문가인 정상기의 손자이자 정항령(鄭恒齡)의 아들 정원림(鄭元霖)에게 군직(軍職)을 주고 이 일을 맡게 하였으며, 규장각 각신이던 김종수(金鍾秀)・서호수(徐浩修)・이가환(李家煥)・이서구(李書九)・윤행임(尹行恁)・이만수(李晩秀)・성대중(成大中)・유득공(柳得恭)・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각 도의 지리전문가들 26명을 참여하게 하였다. 읍지 편찬을 위해 읍지청(邑誌廳)을 설치하였으며, 읍지청의 자료들은 여타 편찬 사업에도 활용되었음을 1790년(정조 14)의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의 편찬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 16ㆍ17세기 읍지에 간혹 인용되고 있는 古記나 州記들도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咸州志의 任官題名記序에도 향리들이 작성하여 전해 오고 있는 先生案을 취해 읍지에 수록하였음을 밝혔다. 1833년(순조 33) 경에 편찬된 慶尙道邑誌 영주군읍지의 고적 조에 정종소가 수령으로 있을 당시 군지를 작성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정종소는 세조대에 재임하였으므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편찬 명령에 따라 저본으로 작성된 읍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2] 陰崖先生文集(규. 7158). 제1책(乾) 年譜. 李耔는 1506년(중종 원년)에 의성현령에 부임하여 1507년에 聞韶志를 편찬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재임시에 의성 읍지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손들이 그의 문집을 편찬하던 1754년에는 읍지는 인멸되고 없었다. 紫巖集(서울대 古. 3428-816). 제3책(人), 권7. 年譜. 1634(인조 12)년에 李民寏이 聞韶志를 저술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주에 “先時陰崖李公知縣著邑誌一卷先生又著一卷”이라고 써 놓아 陰崖先生文集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3] 리용태, 우리나라 중세과학기술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백산자료원 재발행, 1990) p.191.

[4] 리용태, 앞의 책, p.201.

[5] 『承政院日記』 卷1659, 正祖 13년, 6월 26일, 6월 27일,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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