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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의 역사적 배경
윤용현(국립중앙과학관)·정동찬(국립중앙과학관) 박호석(농촌문화연구소)·윤광주(복원전문가)·윤명균(복원전문가) |
용골차 , 통차 , 용미차 , 옥형차 , 맞두레 , 용두레 , 물풍구 , 무자위 , 수차법
우리나라에서 벼농사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 이래 농경사회에서 물을 이용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불가피하였으며, 수전경작 이후 필연적으로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수리관개(水利灌漑)시설을 촉진시켰다. 우리 겨레가 언제부터 수차를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5∼6세기 무렵으로 추측된다. 즉 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건너가서 연자맷돌을 만들었다는 사실(史實)이 있으며, 이것은 수차의 일종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 수차(水車) 이용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1년에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1. 수차의 발전과정

 

우리나라에서 벼농사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 이래 농경사회에서 물을 이용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불가피하였으며, 수전경작 이후 필연적으로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수리관개(水利灌漑)시설을 촉진시켰다.

 

우리 겨레가 언제부터 수차를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5∼6세기 무렵으로 추측된다. 즉 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건너가서 연자맷돌을 만들었다는 사실(史實)이 있으며, 이것은 수차의 일종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 수차(水車) 이용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1년에 첫 기록을 볼 수 있다.[2]

 

수차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용골차’와 ‘통차’이고, 16세기 이후에는 ‘용미차(龍尾車, Archimedes screw)’와 ‘옥형차(玉衡車)’ 같은 서구식 수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고려 말 이래로 ‘수차’라면 일반적으로 ‘용골차’, 즉 ‘번차’로 우리말로 ‘물자애(위)’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대(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용골차는 하천이나 저수지와 같이 물이 있는 곳에서 물을 대야 할 곳까지 나무통(樋)을 걸어 건네고, 한편 용골판(龍骨板)이라고 부르는 네모난 판을 이은 연속된 고리를 만들어 그것을 나무통 속에 꿰어 빙빙 돌려 그 회전에 의하여 용골판이 물을 끌어 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회전동력으로는 수전(手轉)·족답(足踏)·축력(畜力)·수전·수차 등이 두루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기까지는 주로 족답의 번차가 많이 쓰인 것 같다. 우리말로 번차를 ‘물ᄌᆞ애’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그것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 6 >맞두레

 

 

 

오늘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양수 시설로는 맞두레, 용두레, 수차(무자위), 물풍구 등이다. 이러한 도구의 제원을 살펴보면, 먼저 맞두레[3](사진 5)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새끼줄에 매단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퍼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고 힘도 많이 든다. 그래서 혼자서도 쉽게 물을 퍼올릴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용두레이다.

 

 

 

<사진 6> 용두레

 

 

 

용두레[4](사진 6)는 긴 장대를 삼각뿔 모습으로 세우고 그사이에 나무를 파서 만든 기다랗게 생긴 두레박을 새끼줄로 매달고 지렛대 원리를 활용하여 혼자서도 힘들이지 않고 물을 퍼올리는 장치이다. 이 삼각뿔 장대는 요즈음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자유자재로 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삼각구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발달되어 발로 밟아 물을 퍼올리는 수레바퀴 모양의 무자위를 만들어 내었다.

 

무자위[5](사진 7)는 수레나 물레의 바퀴 모양으로 한 개의 축을 중심으로 주위에 많은 나무판(발판) 날개를 나선형(螺旋形)으로 붙이고, 중간 가장자리 부분에 물길을 내었다. 사용방법은 먼저 발판이 물에 잠기도록 설치한 뒤 받침대 끝에 설치되어 있는 긴 작대기 2개를 잡고 올라서서 발로 나무판을 밟고 걸으면, 바퀴가 돌면서 물을 퍼 올리게 되는데, 퍼 올려진 물은 물길을 통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에 끌어 올린다.

 

    

 

 


<사진 7> 무자위

 

 

이 무자위는 물레방아의 원리와 비슷하지만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동력을 얻는 대신에 거꾸로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물의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 다르다. 특히 무자위는 논이나 밭의 높이가 물의 높이보다 더 높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너른 들이나 평야 지대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염전에서는 바닷물을 퍼 올리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무자위와 함께 풀무의 원리를 이용하여 통 안에 장치된 피스톤을 왕복시켜서 물을 품어내도록 한 물풍구(사진 8)가 사용되었다. 이 물풍구는 굵은 대나무의 속을 파내거나 판자로 통(실린더)을 만들고, 그 속에 활대(피스톤)를 끼워 사용하였는데, 시간당 10~20톤의 물대기를 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양수기도 전기모터를 이용한 고속회전으로 많은 물을 쉽게 퍼 올릴 뿐 그 기본원리는 옛 도구들과 똑같다.

 

 

2. 수차의 개량과 보급

 

물을 퍼 올리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개발한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러한 양수도구를 보급하려는 노력 또한 꾸준히 이루어졌다. 수차에 대한 보급의 노력은 고려시대의 고려사,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데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차가 우리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高麗史 食貨 二, 農桑, 恭愍王 11年倏)인데, 그 해에 백문보(白文寶)가 건의하기를 “중국 강회(江淮: 江南) 백성이 농사를 짓되 수차의 편리함을 알지 못하여 논 아래에 개울이 있어 한 길 깊이가 되지 않는데도 내려다보면서 감히 위로 물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황무지화하는 것이 십중팔구입니다. 모름지기 계수관(界首官)에 명하시어 수차를 만들어 민간에 전하시면 한황(旱荒)에 대비하는 최상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진 8> 물풍구

 

 

이와 같이 중국 강남에서 쓰고 있던 수차법을 도입하고자 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이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노력은 지속 되었다. 1429년(세종11) 12월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온 박서생(朴瑞生)이 제출한 보고서는 조선의 수차제조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가 일본에서 보고 온 수차는 수세(水勢)를 이용하여 자전(自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급류에 가설하면 자전하지만 만수(漫水)에 가설하면 자전하지 않아도 발로 밟아야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세종 11년(1429년)에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통차’는 종래의 족답식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自激水車)’라고 불리었고, 이때부터 종래의 수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여 ‘당수차(唐水車)’라 하고, 통차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하여 ‘왜수차(倭水車)’라 했다. 성종 때부터 연산군 2년(1496년)에는 최부(崔溥)가 중국에서 보고 온 수전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연산군 8년(1502년)에는 전익경이 정교하고 능률적인 수차를 만들었다고 하며, 명종 15년 (1546년)에도 중국의 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들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비변사(備邊司)에 하교하기를, “연심(燕瀋: 북경과 심양)의 관개에 쓰는 것은 수차만한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는 이 제도(制度)에 전연 어두워서 가까운 거리에 비록 콸콸 흐르는 물이 있을지라도 지세(地勢)가 조금 높으면 어찌하지 못한다.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인데, 그 기구의 편리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이제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그 제도를 만들게 하여 만약 그것이 쓸 만하면 외방(外方)에 전파(傳播)시켜 농사를 권장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게 하라.”는 교지를 내린 기록이 있다. 숙종 때에도 물리학자 이민철(李敏哲)이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숙종 9년(1683년)에 보급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 서양계 수차인 ‘용미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정조(正祖) 7년(1783)에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이조참판(吏曹參判) 이경양(李敬養)의 상소를 빌어 “수차(水車)의 기계를 만드는 것이 진실로 관개에 큰 이익이 되므로, 중국에서는 논농사에 오로지 이것에 의지하여 백성이 가뭄을 근심하지 아니하고 나라가 그 이익을 보게 되는데, 곧 듣건대, 우리나라는 그 제도를 모방해 와서 능히 반포해 시행하지 못하고 혹은 도(圖)를 상고하여 사사로이 만든 자가 있는데도 이미 조정의 영(令)이 없어서 시험해 쓰지 못한다고 하니, 곧 강구(講求)하여 널리 펴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수차는 농사일에 도움이 있고 만드는 것은 곧 사사로이 만든 것이 있으니, 먼저 세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그 사사로이 만든 것을 가져와서 모방해 만들어 시험해 쓰도록 하자”는 건의를하여 시행토록 한 바 있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2년(1898)에는 수륜과(水輪課)를 설치하여 관유(官有)와 민유(民有)를 물론하고 높고 건조한 땅에 수륜(水輪)을 설치하여 포(浦)를 파고 방죽을 쌓아, 개간하고 관개(灌漑)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이익을 보도록 하였다.

 

이렇듯 세종대의 자격수차의 권장책과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에 의한 부단한 이웃나라의 앞선 수차의 제작기술 권장은 주목할 만하였다.

 

이와 같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차는 농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가난 때문에 새로운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세(地勢)와 자연조건으로 볼 때 대체로 천수로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상례(常例)이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수차를 돌릴 만한 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수차의 보급이 어려웠던 다른 문제들 중에는 자재의 문제, 즉 수차 제작에 쓰일 목재가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질이나 우량의 면에서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은 수전농업에 있어서 보(洑)나 제언(堤堰)을 발전시켰고, 벼 재배는 그러한 시설로 족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수차의 제작은 절실한 문제로 요청될 수 없었고 더욱이 벼 재배는 부종법이 주여서 파종기의 물 문제는 이로써 어느 정도 조정할 수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사정과 견주어 일반 백성들이 수차에 관심이 적은 것을 한탄하는 조선중기 실학자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수광(李睟光)이 말하기를, “중국 수차(水車)의 제도는 위(魏)나라 마균(馬均)이 비로소 창조(創造)하였는데, 전토(田土)의 관개(灌漑)에 가장 유익하여 천하에 통하여 사용할 만하다. 지난번에 양만세(楊萬世)가 일본에 가서 그 제도를 얻어왔는데 지극히 편리하였지마는, 우리나라 사람은 성질이 옹졸하여 연습해 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애석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요인에도 그런대로 가장 잘 보급된 것이 ‘답차(무자위)’라는,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였다. 그것은 간편하여 제작비가 적게 들고 한 사람이 밟아 돌리는 데도 ‘두레(맞두레)’나 ‘용두레’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답차(踏車)’는 지금도 삼남(三南)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차이며, 염전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1]   본 글은 정동찬, 윤용현, 윤광주, 2007. 「자승차의 復元 및 實驗硏究」 『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 연구』; 박호석, 2007. 「자승차의 기구학적 구조와 성능에 대한 고찰」 『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연구』(경인문화사, 2007)에 수록되어 있는 논고를 발췌하였다.

[2]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밀직 제학(密直提學) 백문보(白文寶)의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강회(江淮: 중국의 양자강과 회수지방) 백성이 농사를 지으며 수한(水旱)을 근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오로지 수차(水車)의 힘입니다. 우리 동방 사람은 논에 경작하는 자가 반드시 봇도랑에 물을 끌어넣기만 하고, 수차로 쉽게 물을 대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논 밑에 도랑이 있어 한 길[丈]의 깊음이 채 되지 못하는데도 내려다보면서 감히 퍼 올리지 못하니, 이로써 묵은 논이 열에 항상 여덟아홉이 됩니다. 마땅히 계수관(界首官)에게 명하여 수차를 만들되, 교공[巧工: 솜씨가 있는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모양을 본떠서 민간에 전하게 한다면, 이는 가뭄에 대비하고 묵은 땅을 개간하고 첫째의 계책이며, 또 백성이 파종과 모심기에 겸하여 힘쓰게 되면 한재를 방비하고 곡종(穀種)을 잃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3] 정동찬, 유창영, 홍현선, 윤용현, 「겨레과학의 발자취(Ⅱ)」(국립중앙과학관, 1996), 56~57쪽.

[4] 위의 책, 60~61쪽.

[5] 위의 책, 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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