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알지 : 청렴(淸廉) - 박수량(1491~1554)
박수량 |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33-1번지. 
  한 무리의 공직자들이 늘어서서 경건하게 참배를 한다. 묘 앞에 서있는 호패형 빗돌 비석은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다. 흔히 묘 앞에 비석을 세우는 까닭은 묘 주인의 공적을 오래오래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비석은 그 어떤 행적도 기록해놓고 있지 않다. 바로 그래서 오늘도 많은 공직자들이 찾아와 고인의 청백정신을 닮고자 체험교육을 받는다.

그림 1. 장성박수량백비長城朴守良白碑, 전남 장성군 박수량의 묘 앞에 서있는 호패형 빗돌 비석으로 한 글자도 없는 ‘백비’다.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귀감이 되는 청백정신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그림 1. 장성박수량백비(長城朴守良白碑), 전남 장성군 박수량의 묘 앞에 서있는 호패형 빗돌 비석으로 한 글자도 없는 ‘백비’다.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귀감이 되는 청백정신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은 조선 3대 청백리로 통한다. 황희와 맹사성, 혹은 맹사성과 정약용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박수량은 늘 꼽힌다. 조정에서 38년 동안 벼슬하여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두어 칸의 집이 없었다고 하니 자기관리가 엄격했다. 그는 죽기 직전 두 아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초야로부터 외람되이 재상에 이르렀으니 분수에 넘는 광영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를 청하거나 비를 세우지 말라.” 
  죽고 나서, 운구가 선산이 있는 장성으로 내려갈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다. 평소 청백한 생활이 또 한 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에 대사헌 윤춘년이 명종에게 아뢰었다.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할 때에도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상여를 모시고 본가가 있는 장성으로 내려가려 하나, 그들 형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이 사람을 포장한다면 청백한 사람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명종은 “포장하는 것이 옳다”며 장성으로 가는 길목의 관원으로 하여금 상구(喪具)를 호송하도록 했다. 장례비도 나라에서 부담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청백(淸白)을 알면서 비석에다 새삼스레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백비를 하사한다. 후손들은 그 백비에 아무런 공적도 새기지 않고 그대로 세운다.

  요즘 들어 부쩍 공직자 윤리가 강조되어서일까. 박수량의 백비를 중심으로 한, 장성군의 ‘청렴문화 체험 교육’은 전국 공직자와 공공기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인기리에 확산돼가고 있다. 2015년 11월 현재, 전국 1,121개 기관에서 899회에 걸쳐 5만 1268명이 다녀갔다. 
  공직자부터 바로서야 사회의부패지수가 낮아진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당위는 늘 현실적인 상황논리 앞에서 무색해진다. 박수량의 백비처럼 실증적인 유적과 스토리가 있어야 공감을 산다. 
  박수량의 선비정신은 청렴과 신독(愼獨),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청렴은 공직윤리와 자부심에서 나오고, 신독은 선비의 기본소양이다.

 

그림 2

이른바 그 마음의 뜻을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소인은 홀로 일 때 좋지 않은 짓을 함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 

所謂誠其意者, 勿自欺也, …故君子必愼其獨也!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대학(大學)』 

 

  『중용(中庸)』에는 “숨겨진 것 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고, 작은 것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란 그 홀로일 때에 조심하는 것(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이라고 했다. 박수량은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신독을 실천한 선비다. 오랜 관직생활 때문일까. 그는 저술이 많지가 않다.

 

거울처럼 잔잔하고 수심은 깊은데 
다만 겉모습만 비추고 사람마음은 비추지 못하네. 
만약 속마음도 온통 환하게 비춘다면 
경포대 위에 머물 사람이 드물 것이네. 
鏡面磨平水府深 
只鑑人形未鑑心 
若使肝膽俱明照 
應知臺上客罕臨

그림 3. 김홍도의 『금강사군첩(剛四郡帖)』(1788년) 중 「경포대(鏡浦臺)」. (간송미술관 소장)그림 3. 김홍도의 『금강사군첩(剛四郡帖)』(1788년) 중 「경포대(鏡浦臺)」. (간송미술관 소장)

 

 

  강릉 경포대에 가서 읊은 시인데, 맑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속마음이 비침을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번듯한 외모에 숨겨진 검은 속내가 탄로 날까봐 사람들이 쉽게 찾지 못할 거라며 부패한 세태를 조롱한다. 실제로 그가 살았던 중종과 명종 연간은 부정부패가 극심한 시대였다. 훈구대신과 왕실 외척들의 탐욕이 극에 달해 백성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홍길동 같은 의적(義賊)도 나오고 임꺽정 같은 대도(大盜)도 나왔다. 
  박수량의 청렴한 행적을 보면, 후한 때의 재상 양진(楊震)의 일화가 떠오른다. 측근 왕밀(王密)이 밤중에 찾아와,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며 금 10근을 바친다. 이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 我知子知 何謂無知).”라고 말하며 금을 물리쳤다. 유명한 사지론(四知論)이다. 

  관리들은 왜 부정부패를 저질렀을까. 
  무엇보다도 박봉이 그 원인이었다. 조선시대의 녹봉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해져 있다. 3개월마다 주는 것을 녹(祿)이라 하고 매달 주는 것을 봉(俸)이라 한다. 녹봉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과전(科田)도 주었으므로 그 수익까지 합치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점차 과전이 없어지고 임진왜란으로 녹이 봉으로 바뀌면서 액수도 줄어들었다. 즉 9품에게 한 달에 쌀 10말, 콩 5말을 주고, 서리에게는 한 달에 쌀 6말을, 지방의 아전에게는 공식적으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양반은 거의가 첩을 두고 종까지 여럿 두었는데 이런 박봉으로는 부지할 수가 없었다. 공식적인 보수가 없는 아전붙이들은 적당히 착취하며 살았다. 국가가 뇌물을 묵인해주는 구조였던 셈이다.

 

그림 4. 조선 태조에서 숙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들의 전기집(傳記集)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서 박수량 편. 정조 때 편찬한 이 글은 그를 “금(金)처럼 정밀하고 옥(玉)처럼 단단하여, 안에 쌓아 밖을 제재했도다”라고 말한다. (출처: 국역국조인물고)

그림 4. 조선 태조에서 숙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들의 전기집(傳記集)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서 박수량 편. 정조 때 편찬한 이 글은 그를 “금(金)처럼 정밀하고 옥(玉)처럼 단단하여, 안에 쌓아 밖을 제재했도다”라고 말한다. (출처: 국역국조인물고) 
 

  대간(臺諫)을 지낸 박수량은 그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대간은 간언(諫言)을 맡아보던 관리로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벼슬을 통칭한다. 오늘날로 치면 언론사와 감사원, 검찰 기능이다. 

“공론이 있는 곳은 대간뿐이며, 대간을 중히 여기는 것은 조정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조정이 중하면 기강이 서서 임금의 세력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청명한 세상을 당해서는 재상이 감히 권세를 끼고서 대간을 얕잡아보지 못하고, 대간도 지키는 바를 굽혀 재상에게 아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합하여 공경하므로 서로 사정을 봐달라고 요구할 수 없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쇠미한 때에 미쳐서는 권세를 가진 자가 대간을 제멋대로 부려서 제 사사로운 일을 성취시키고, 공로를 가진 자나 재상을 종처럼 섬기면서 그 명예를 낚기 때문에, 부정하게 영합하고 사곡하게 결탁하여 오직 이 일을 도모하기에 급급하므로 끝내는 어지럽게 됩니다.”
  그는 대간의 역할이 왕도정치의 구현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강직한 자세는 대간에게 물러나 지방 관료가 돼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벼슬아치들에게는 정년보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보통 나이 70세면 사직을 하지만 채 3년도 못하고 그만 두기도 했다. 지금처럼 연금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건이 훨씬 나아진 오늘의 관점에서 청백리를 보면 지나치게 청렴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뇌물이라는 것도 아주 미미한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선조 초기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각처에서 보내온 물품 기록이 있는데 쌀2말, 깨3되, 간장 1되, 꿩 1마리, 먹 3개 따위였다. 
  이런 것마저도 거절한 박수량의 청렴정신은 오늘날 한 기(基)의 백비로 남았다. 이제는 청렴만이 미덕일 수는 없는 시대다. 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능력을 발휘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아닐까.

 

그림 5. 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223번지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 장성 출신으로 효행이 탁월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었던 7인을 추모하여 모신 7기의 비(碑)가 있는 곳으로, 박수량은 1698년(숙종 24)에 추배되었다. 『국조인물고』는 지극한 효자였던 박수량이 “담양 부사로 있을 적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자 공이 몸소 약을 달이느라 수십 일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대변이 단지 쓴지 맛보아가며 약을 써서 병환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 5. 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223번지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 장성 출신으로 효행이 탁월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었던 7인을 추모하여 모신 7기의 비(碑)가 있는 곳으로, 박수량은 1698년(숙종 24)에 추배되었다. 『국조인물고』는 지극한 효자였던 박수량이 “담양 부사로 있을 적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자 공이 몸소 약을 달이느라 수십 일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대변이 단지 쓴지 맛보아가며 약을 써서 병환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콘텐츠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