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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지광』 개요

 

『학지광(學之光)』은 1914년 4월 2일자로 창간된 ‘재(在)일본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이다. 이 조선유학생학우회는 대한흥학회(興學會)가 해산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1913년 가을에 철북(鐵北)친목회․패서(浿西)친목회․해서(海西)친목회․경서(京西)구락부․삼한(三韓)구락부․낙동(洛東)․호남다화(茶話)회 등 7개 단체가 회동하여 유학생총단체가 조직되었다.
『학지광』은 격월간이라고 했으나 1년에 2회 또는 3, 4회 정도로 발간되어, 1930년 4월까지 16년간 통권 29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전질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 중 16호가 영인본(태학사, 1976)2권에 합책되어 나왔다.
1914년 12월 3일자로 발행된 제3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신익희(申翼熙), 인쇄인 최승구(崔承九), 발행소 학지광발행소, 인쇄소 복음인쇄소 동경지점, A5판 58면, ‘비매품’이다.
이 잡지에는 재일본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소식을 비롯하여, 논문, 수필, 시, 한시, 기사, 소설, 기행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다. 1914년에서 1919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을 보면 시 28편, 소설 6편, 문학론 8편, 그 밖에 시조, 가사, 수필, 한시 등 전 장르가 망라되고 있다. 집필진으로 현상윤, 장덕수, 나혜석, 최승구, 안확, 송진우, 이광수, 김억, 전영택, 오상근, 이병도, 최팔용, 최학송, 김동인, 박승철, 주요한, 홍영후, 변영로, 변희용, 민태원, 정인섭, 김윤경 등이 참가하였다.
『학지광』은 재일본 유학생회의 기관지로서만 아니라 신문화의 보급과 학술 연구 등 조선의 학술계와 사상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신문학 사조의 도입 및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창간호를 대신한 발간 상황

 

이 잡지의 발간 취지는 장덕수가 쓴 제3호의 권두언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聖經에 曰 ‘너희들은 世上에 빗이라. 山 우에 세운 城은 숨길 수 업스며 또 燈불을 켜서 斗下에 두는 者 업고 燭臺 우에 노아서 家中에 잇는 모든 物件을 빗칠지니 이와 갓치 모든 사람 압헤 너희들의 光明을 빗치라. 모든 사람이 너희들의 善行을 보고 하날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를 讚美할지라.’
우리 사랑하는 靑年 諸君이여 吾人은 沈黙할 수 업도다! 眞實로 自己 心中d[ 泰山 갓흔 確信과 雄大함이 蒼天갓흔 思想과 火山갓흔 熱情이 잇스면 眞實로 글는 피가 흘으고 뛰는 脈이 놀면 明月이 落下하고 天地가 動鳴할지라도 이를 막지 못하리로다...
또한 수록 내용은 그 목차에서 보면 알 수 있다. (3호 목차)
‘學之光 第三號 發刊에 臨하야’…張德秀/‘求하는 바 靑年이 그 누구냐?’…玄相允/‘謹告 我半島父兄’…眉湖生/‘現象的人物의 實力과 修養’…金永燮/ ‘理想的 婦人’…羅惠錫/‘人보다 己를 知함이 必要함’…李周淵/‘情感的 生活의 要求’…崔承力/‘西亂原委錄’…XY生/‘文學의 意識에 關하야’…崔斗善/‘企業論’…務實生/‘英米人及 佛國人의 子女敎育比較’…閔圭植 譯/‘潛航艇의 勢力’…T.C生,
‘南朝鮮의 新婦’…崔素月/‘犧牲’…KY生/‘奇火’…夢夢 譯/‘어리석은 者의 세 가지 疑問’…惡夢/‘제야말노!’…?鼻室主人/‘離別’…石泉/‘웨 울어?’…悟然子/‘寒菊’…小星/‘뿌루타스의 雄辯’…鄭魯湜/‘偉人의 片影’…安廊/‘閑話二題’…編輯/‘彗星이 나타남’…仰天子/‘學友會創立略史’/‘우리 消息’/‘編輯所에서’ 등이다.

 

3. 주요 내용

 

1) 일본 유학생의 그 역사, 그 실상

 

『학지광』제6호(1915. 7)에 보면, 「일본유학생사(史)」가 비교적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그 개요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일찍이 신라 · 백제 때부터 매년 적지 않은 수의 청년을 우리나라로 보내어 제반 학술과 문물제도를 배워갔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조선인이 일본에 가서 유학한 일은 없고, 다만 정치적인 교섭 때문에 일어(日語)를 배워 온 사람은 있다. 신라의 관리 김약필(金若弼)등이 사절로 갔을 때에 일어를 배웠고, <중략> 임진왜란 때 강우성(康遇聖)이 붙잡혀 갔다가 10년간 살면서 일어를 연구하여 『첩해신어(捷解新語)』 전10권을 저술했고, 그 후에 홍순명(洪舜明)이 일본을 다녀와서 『왜어유해(倭語類解)』 전2권을 저술했다.
근세에 와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뒤, 박영효(朴泳孝)등이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갈 때 생도 10명을 데리고 가서 유학을 시키니 이것이 곧 일본 유학생의 효시이다. 그러나 이 학생들이 김옥균(金玉均)과 함께 귀국하여 갑신정변(1884)에 가담했다가 실패한지라, 그로부터 일본 유학은 한동안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동학혁명(1894)이 일어나고 청일(淸日)전쟁(1894~1895)에 일본이 승리하자, 1895년에는 정부가 150명의 청년을 뽑아 일본 유학을 보냈다. 1897년 홍석현(洪奭鉉)이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게 되어 일본 유학생 중 첫 졸업생이 된다. 이 무렵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경에 있으면서 유학생 50명을 양성했다고 한다. 이때의 유학생 수는 이미 200명을 넘었으며, 1905년의 을사(乙巳)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이 있은 다음에는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와 같은 연혁을 밝히고는 유학생 사회의 실상을 드러내 놓았다.
“유학생이 있은 지 30년 동안에 내왕한 사람은, 1,600명에 달하나 그 중 졸업한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하다. 이 400여 명 중 ‘확실한 대학 본과’를 졸업한 사람은 겨우 9명이니 그 통계표는 여좌하니라”고 했다(통계표의 수치는 좀 다르지만, 전재 생략). 그러면서,
“그 동안의 학생들의 성적을 살펴보면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오늘은 법과를 배우다가 낙제하면 내일은 상과에 입학하여 차반피과(此班彼科)로 전전하다가 중도 폐지한 자도 많고..., 4각 모자를 쓰고 자칭 대학생이라 하니 유아가 양요리를 먹어도 분수가 있지……오호라, 유학생의 부패한 사상이 가관이로다.”라고 개탄한다. 이어서 나오는 유학생 단체에 대한 내용은 복잡하다.
“...광무 9년(1905)에 공사관이 철폐되고 유학생 감독부가 설치되었다. 그 동안 유학생들의 결사(結社)는 없었고 일시적인 간친(懇親)회 등이 있었다가, 그해 12월 30일 유학생 130여 명이 유학생 감독부에 모여서 망년회를 갖고 여기서 발론하여 조직한 것이 ‘유학생구락부’이다.
이 단체가 생긴 후로 학생이 크게 불어나서 500여 명이 되어 의견이 분분하고 지방열이 팽창하여 작은 단체가 난립하게 된다. 그것이 곧 태극(太極)학회, 공수(共修 )학회, 한철(漢鐵)청년회, 동인(同寅)학회, 낙동(洛東)친목회, 호남학계(學契), 광무(光武)학회, 연수(硏修)학회, 광무학우회 등인데, 이 또한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1908년 2월에 통합되어 대한학회가 되더니, 1909년 11월에는 대한흥학회로 연합한다. 그러다가 1911년 5월 삼남(三南)친목회, 황평(黃平)친목회, 청년구락부 등이 유학친목회를 창립했다가, 1912년 봄에 호남다화회, 낙동친목회가 주동이 되어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창립하여 학보를 발행하니 이것이 곧 『학지광』이다......1,600명에 달하나 그중 졸업한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하고, 그 400여 명 중에서 ‘확실한 대학 본과’를 졸업한 사람은 90명도 아닌 겨우 9명”이라는 통계표를 실었다.

 

2) 서구 신문물에 대한 소개와 청년들의 책임

 

『학지광』에서는 서구의 발달된 문명, 즉 신문명 소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에 『학지광』 제14호, 제15호에서는 「최근의 문명 소식」을 기사로 다루어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사회를 둘러보자. .......(비행기, 대포, 장갑자동차, 발화액 등에 대한 소개) 남은 이 같은 발명을 하였다고, 동에서 떠들고, 서에서 지껄이지마는, 우리는 아직도, 正更夜 감감한 밤이다……발명은 고만두고라도, 연구하는 이도 없다……우리는 實狀科學에 관한 천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비행기 창조는 우리 조상이라 한다. 활자의 발명도 우리가, 세계의 으뜸이라 한다……우리는 어떠한 방면에든지, 원만한 천재가 있는 우리다……바라건대, 한 번 더 과학에 눈을 뜨라. 금일에 이르러서는 무엇 무엇보다 과학이 필요하며 무엇 무엇보다도 과학이 더 많은 힘을 주는 것이다. 
서구 문명, 특히 과학의 필요에 대한 주장은 다른 많은 기사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겉 개화? 속 개화?>(18호), <구각을 벗어요>(19호) 등의 기사나 서양에서 발명된 것들을 소개하는 등의 기사가 모두 그러하다. 또 학지광 제4호 <반도청년의 각오>에서는 “ 我 반도사회는 이미 이십세기 무대에서 추락하였으며 실패한지라……사회의 지위는 이십세기에 처하였으나 이십세기의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의 조직이 동결되어 비참함 암흑시대에 추락되었고……그러한 즉 반도청년들은 도도히 흘러가는 암흑의 사회를 구제하고 신문명을 개발하여 이를 유지하며 이를 진전케 하여야 할지니 우리 청년의 책임은 진실로 산하보다도 일층 중대하도다.”라고 강조한다. 즉 청년들은 이미 20세기 무대에서 추락한 반도에 신문명을 개발하고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학지광』 제 20호, 「시대사조와 조선청년」).

 

3) 조선의 문명과 이에 대한 자의식

 

조선의 문명에 대한 인식에서는 신/구 문명을 분명히 구분하고 구습타파에의 의지와 내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문학>(6호)이라는 기사에서는 조선의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유교의 영향에 오염된 조선 문화와 조선인의 습성을 들고 있다. 특히 이러한 구습은 이미 백여 년이나 전에 들어 온 신문명을 배척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유교와 조선 고유의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신문명을 창달해야 하는 현실에서 조선의 것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의 미술>(5호)에서는 ‘인문이 점차 진화할수록 미술의 발달은 이에 수반하여 개진함으로 國의 文野를 불문하고 인민이 있는 즉 미술이 必有할새 이 미술은 人民開否의 意想을 나타내는 일종의 活歷史’라고 하면서 미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미술을 긍정하면서 유교가 이를 쇠퇴시켰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조선문화’의 긍정은 조선문화의 유적을 소개하는 기사에도 나타난다(<학지광> 제17호 <조선문화의 유적일람>).
한편, <문화의 의의와 그 발전책>이라는 기사에서는 문화를 문명과 동일한 의미로 보고 조선문화의 발전책으로서 선각자의 노력, 도서관 설치, 청년회 ? 구락부의 충실과 발전, 여자교육, 교회의 혁신, 민중극장의 건설 등을 들고 있는데, 이 중 민중극장의 건설이 문화 발전책으로 제시된 것이 재미있다.

 

4) 근대예술의 대한 소개와 인식

 

서구 문명에 대한 소개는 발달된 문물에 대한 것만 아니라 근대 예술들에 대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기사가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22호)라는 기사이다. 해당 기사는 입센에서 시작된 근대극이 영혼의 해방과 구제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며 칭송하고, 특히 근대극의 특징으로 민중계몽을 들고 있다.
근대극은 현금, 적어도 과거를 보면 비속한 민중을 驅逐하려 하였다. 무지한 俗衆-그들은 다만 연극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 시설과 가치 있는 인류활동의 大敵이다……이와 같은 근대극운동은 第一로 일반사회의 계몽에 資코저 하는 명료한 목적을 버리지 못할 것이나 동시에 인류의 영혼을 창조적으로 해방하며 구제하는 예술적 지위에서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상술한 바 근대극은 결국은 인류의 영혼의 해방 구제를 사명으로 하야 예술적 지배자의 극적 표현을 중심으로 하여 인류의 공동생활에 공헌하는데 그 의미의 全的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한편, 영미시의 동향을 개관하는 <最近英詩壇>도 비슷한 내용이다. 결론부에 이르러, 잠깐 우리나라 사정을 돌아보면서 외국문화의 극대와 현 우리문화의 극소를 정신 차려 관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음악의 묘사와 근대표제음악(27호) 역시 바하, 하이든, 베토벤, 슈트라우트 등 근대 표제음악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독주가도 없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우리나라 정신을 호흡하는 음악, 우리나라 생명을 가진 음악’을 누가 작곡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나타나고 있다. <소설에 대한 조선 사람의 사상을……>(18호)에서도 소설의 예술적 가치에 눈 뜰 것을 권고하고 있다.

 

4. 위상과 의의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 상당수의 청년들이 일본 등지로 유학을 떠나 신지식, 신사상을 배우는 데 열중하였고, 1910년대 중반 이후 이들이 귀국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시대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3.1운동을 전후해 귀국한 유학생 지식인들이 3.1운동 이후 새롭게 열린 문화정치의 공간에서 다채로운 사상적 편력, 문화운동의 주역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학지광』은 근대사회로 진입할 즈음 신지식인의 의식과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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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 형성 초기단계의 역사적 성격 - 1910년대 <학지광> 誌의 시를 중심으로 이은정 1994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국내학술지논문 원문보기
1910년대 잡지의 특성과 유학생 글쓰기 : 『學之光』을 중심으로 황지영 2010 국립중앙도서관 학위논문 상세보기
『학지광(學之光)』에 나타난 김여제의 시 고찰 맹문재 200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국내학술지논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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