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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자강회월보

 

1876년 조선은 개항을 했다.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항 이후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서 저마다의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 운동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조선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인민들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에 바쁜 보수주의자들의 시민운동 와해 계책에 넘어간 고종은 1898년 12월 25일 정부는 민회(民會) 금압령을 내렸다. 사실상 시민운동을 탄압하고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였다. 이로써 당시 최대의 시민운동 조직이었던 독립협회의 활동도 사실상 중단되었고, 마침내 해산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시민운동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잠시 사라졌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주의 국가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보안회(保安會)와 공진회(共進會), 1905년에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등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는 정치․사회적 운동과 대중의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지배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던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이들 단체는 곧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 제국에 협력하는 정부의 고위관료들과 일본 제국의 협공으로 시민단체의 정치적 활동 역시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애국지사들은 친일 관료들과 일본 제국의 눈을 피해 조선의 주권을 회복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나수연(羅壽淵)·김상범(金相範)·임병항(林炳恒) 등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발족시켰다. 대한자강회는 1905년 이준(李儁)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대 개편한 단체였다. 일본 제국과의 정치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한자강회는 직접적인 정치적 활동을 자제했다. 그 대신 대한자강회는 교육계몽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되찾을 방법을 강구해 나갔다. 대한자강회는 자신들의 목적을 대한자강회 회원 및 조선 민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 결과 ‘회보(會報)’가 절실함을 깨닫고 곧 잡지 발간 준비에 돌입한다. 1906년 7월 31일 드디어 대한자강회의 회보인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가 발간되었다
. 『대한자강회월보』의 첫 편집 겸 발행인은 김상범이었다. 이후 이종준(李鍾濬)과 심의성(沈宜性) 등이 편집 겸 발행인을 이어갔다. 『대한자강회월보』는 논문(論文), 수필, 소설, 사조(詞藻), 잡조(雜俎)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들의 잡지 구성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 회보의 목적은 명의(名義)에 의거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바라. 논설, 교육, 식산 및 국조(國祖), 고사, 문원(文苑) 등은 내외국의 최고 유명한 문인과 달사(達士)의 저술이라. 이는 계발문명(啓發文明)하는 일대 약석(藥石)이오. 관보(官報), 잡록(雜錄) 등은 참고의 요건이오. 회보(會報), 연설 및 내외 기사, 방언(方言), 소설 등은 지식을 진흥하는 좋은 재료가 될 것이라.(『대한자강회월보』 1906. 3, 속표지 글)

『대한자강회월보』의 주요 필자는 이기(李沂), 장지연,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 등이었으며, 박은식(朴殷植), 정운복(鄭雲復), 지석영(池錫永) 등도 필자로 가담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는 대한자강회의 취지답게 ‘식산흥업’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을 통한 대한제국의 ‘자강’과 ‘실력 양성’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로 『대한자강회월보』에는 교육과 식산흥업에 관한 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자강회에서 추진한 교육진흥책은 학부 교과서 일문 사용 금지, 의무교육 실시, 사범학교 건립 등이었고,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조혼의 금지, 여자 교육의 필요, 가정교육의 문제 등을 공론화하여 일반 민중들을 계몽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식산흥업을 위해서는 부동산 매매의 투명성, 토지 개량, 황무지 개척의 필요성,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에 대한 비판, 개인의 재산 보호, 관개설비 확충, 임업의 필요성 등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렇다고 『대한자강회월보』가 교육과 식산흥업에 관한 글만을 실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분위기 상 정치적 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그 우회적인 방식으로 교육계몽과 식산흥업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진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일어나자 대한자강회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자강회월보』를 통해 자신들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어와 우리 동포님네” “오늘 우리 국민의 의무” “담바귀를 끊어보세”라는 내용의 『단연동맹가(斷煙同盟歌)』는 1907년 4월호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노래였다. 『단연동맹가』는 담배를 끊어 국채를 탕감하자는 결의를 담은 현실참여의 노래였던 셈이다.
또한 대한자강회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내부대신 송병준과 통감부는 보안법 위반과 치안방해라는 구실을 들어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시킨다. 이로써 대한자강회의 회보였던 『대한자강회월보』도 1907년 7월 25일 제13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고 만다.
대한자강회가 해산되자 오가키 다케오, 윤효정, 장지연 등은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로 그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한협회는 훗날 노골적인 친일 성향을 드러냈다. 박은식은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기 이전에 이미 활동을 접고 1906년 12월 『서우(西友)』를 창간하여 계몽운동을 이어갔으며, 을사오적 암살에 실패한 이기는 1908년 6월 『호남학보』를 창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갔다.
1907년 7월 종간된 『대한자강회월보』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중 가장 오래된 잡지 창간호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조남현 지음, 『한국문학잡지사상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최덕교 엮음, 『한국잡지백년』(전3권), 현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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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잡지 발행자 발행일 수록권호 원문
日月池 : 名勝古跡 大韓自强會月報 夜雷報館 1907/03 제1권 2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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