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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
대한매일신보 , 신문 , 타블로이드 , 신채호

 

 

 

오늘날 세계는 피세계라, 문명도 피가 아니면 살지 못하며, 부강도 피가 아니면 이루지 못하며, 부패한 사회도 피가 아니면 개혁하지 못하며, 완고한 민족도 피가 아니면 불러 깨닫게 하지 못하며, 한 걸음 나아가려 하여도 피가 아니면 못하며, 한 일을 행하려 하여도 피가 아니면 못할지라. 그런 고로 그 창자에는 피바퀴가 항상 돌아다니며, 그 눈에는 피눈물을 항상 흘리며, 그 몸은 피로 목욕하며, 그 마음은 피로 갈아서, 그 백성은 피백성이 되고, 그 나라는 피나라가 되어야 나라 땅이 엄정하게 되나니. (「학계의 꽃」, 「대한매일신보」, 1908.5.16.)



 

그림 1. 「대한매일신보」


 

피바람이 불었다. 너도나도 단지(斷指)를 했다. 1908년 함경도 보창학교 학생 17명이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뜨거운 피로 “우가 우리 한국 동포를 반드시 구하리라.” “우리가 우리 삼천리강산을 보전하리라”고 썼다. 1908년 일본의 통감부 정치와 일본에 협력한 한국 대신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순수하고도 뜨거운 피를 흘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8일에 창간하였다.

 

영국인 배델(Ernest Thomas Bethell)과 양기탁이 힘을 합쳐 「대한매일신보」을 만든 것이다.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으며,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글본, 국한문본, 영문본(「The Korea Daily News」)을 함께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슬로건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투적 민족주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발간된 그 어떤 신문보다 일본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았던 신문이 「대한매일신보」였다.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으로 구성된 논설 진은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1만 부가 넘는 발행 부수를 자랑했던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였다. 이런 이유로 일본 통감부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눈엣가시이자 해결하기 힘든 골칫거리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에 정면 승부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장인 베델이 영국인이라는 신분적 위치가 한몫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사주가 조선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 통감부에서도 「대한매일신보」을 함부로 탄압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우회적 방법을 택한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인 배척을 선동한다며 영국상해고등법원에 베델을 제소하는 등 다양한 외교적 경로를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전투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항일투쟁의 필봉을 꺾지 않았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시사평론」이란 코너를 만들어 일본, 친일 협력자, 일진회, 얼개화꾼, 탐관오리, 협잡꾼, 민씨 척족, 개인주의자, 구습, 근대 교육 등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멈추지 않았다.

 

각 방곡에 있는 뒷간 벽에 쓰인 글씨 본즉 모모대신 행적들을 소상하게 적었으니 유방백세저 공명이 뒷간까지 향내 난다. 한 번 웃고 말 일이오 (「시사평론」부분, 「대한매일신보」,190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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