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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나라에서 발간한 세계적인 의서 <동의보감>
허준 , 동의보감 , 조선 , 선조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던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에게 의학서적을 편찬하라는 명을 내렸다. 전란 통에 죽거나 다치는 백성이 많아진 데다 전염병까지 겹쳐 의원과 약재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경험이 많지 않은 의원이나 선비들도 손쉽게 활용할 종합적이면서도 간편한 의서가 필요했다



그림 1. 허준 초상(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선조실록>에는 이날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았지만, 이 책이 완성되자 대제학 이정귀가 <동의보감> 머리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왕께서) 병신년(1596)에 태의(太醫) 허준을 불러 하교하셨다. ‘요즘 중국의 방서(方書)를 보니 모두 베껴 모은 것들이라 자질구레해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대가 여러 학자의 의술을 두루 모아 하나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라.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섭을 잘하지 못한 데서 생기니, 섭생(攝生)이 먼저이고 약석(藥石)은 그다음이다. 제가의 의술은 매우 넓고 번잡하니, 모쪼록 긴요한 부분을 가려 모으라. 외진 시골에는 의약(醫藥)이 없어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향약(鄕藥)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는 약초를 분류하면서 우리말 이름을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조선 시대에는 약재값이 비싼 데다 의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의료혜택을 받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의원이 많지 않은 지방에서는 선비들이 의서를 참조해 증세에 적합한 처방을 선택해야 했는데, 조선 실정과 맞지 않는 의서가 많아서 의원들도 적합한 처방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림 2. 보물 제1085-1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동의보감에
<1614년 2월 오대산사고에 내린다>는 내사기와 좌승지의 수결이 있다.


그림 3. 동의보감 표지


 

방대한 처방을 찾아보기 쉽게 만든 책 

 


선조의 첫째 요청은 ‘중국 의서를 베껴 모으지 말라’는 것이다. 허준 이전의 조선 의학은 중국 금원(金元) 4대가의 의학을 받아들여 정리하는 수준이었는데, 가능하면 많은 의서를 수집하다 보니 세종이 편찬케 했던 <의방유취(醫方類聚)>는 365권이나 되어 의원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성종 때에 266권으로 줄여 개정판을 내기는 했지만, 의료현장에서 활용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금원 4대가의 의학을 정리한 <의학정전(醫學正傳)>을 바탕으로 허준의 스승인 양 예수가 중국의 풍부한 임상 경험과 의학이론에 조선의 약재를 보완해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출판했다. 이 책으로 의학을 배운 허준이 중국의 의서에 바탕을 둔 것은 사실이나, 수많은 책을 참조하면서도 나름의 철학과 우주관으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선조의 두 번째 요청은 ‘섭생(攝生)이 먼저고, 약석(藥石)은 그다음’이라는 것이다. 병에 걸린 뒤에 약을 쓰기보다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소개하라는 것인데, 약재가 부족한 시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허준은 이에 제1부 「내경 편(內景篇)」에서 도가적(道家的) 양생론(養生論)을 펼치면서 풍부한 임상경험과 의학이론을 조화시켰다.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과 땅, 사람을 하나의 우주로 상정하여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를 그리고 책머리에 편집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맞게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는 둥글게, 땅을 나타내는 몸은 평평하게 그리고, 척추로 연결했다. 오장 육부가 머리와 연결된 것이 서양의 해부도와 다른 점이다.

 

선조의 세 번째 요청은 ‘번잡한 의술을 긴요하게 가려 모으라’는 점이다. 이정귀는 “서적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어두워져 <영추(靈樞)>의 본지(本旨)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의서가 드물게 되었다. 평범한 의원들은 의술의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해 의경(醫經)의 뜻을 벗어나 자신의 견해만 고집하거나, 기존의 방법에만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른다. 어느 약,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혼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병세에 맞는 의술의 열쇠를 찾아내지 못해, 사람을 살리려 하다 도리어 죽이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개탄하였다. 그래서 허준은 시골 의원들도 증세에 맞는 처방을 선택하기 쉽도록 체계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의서를 만들어냈다. 이정귀가 “이 책은 고금의 서적을 포괄하고 제가(諸家)의 의술을 절충하여 본원(本源)을 깊이 궁구(窮究)하고 요긴한 강령을 제시하여, 그 내용이 상세하되 지리한 데 이르지 않고 간추리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칭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조의 네 번째 요청은 ‘시골에 의약이 없으니, 약초의 이름을 우리말로 써서 백성들이 알 수 있게 하라’는 점이다. ‘의약’은 ‘의원과 약재’이니, 의원이 없거나 비싼 약재를 살 수 없는 경우에도 시골에 흔한 약초를 구해 치료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허준은 시골 의원이나 선비들까지 의료 인력으로 끌어들였고, 시골에 흔한 약초까지 활용하도록 책을 썼다.



그림 4. 장서각에 소장된 동의보감 
언해본은 궁체로 쓰였다.

 

그림 5. 동의보감 첫머리에 실린 
신형장부도


 

지방마다 출판하여 널리 보급한 책 

 



허준은 1596년부터 의서 편찬을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일이 중단되었다. 1608년에 선조가 붕어하자 책임을 추궁당해 의주로 유배되었지만, 새로 임금이 된 광해군은 허준이 왕자 시절 천연두를 고쳐 준 은혜를 고마워하여 도성을 드나들며 계속 의서를 편찬하게 해주었다. 내의원 실무에서 손을 떼었기에, 오히려 편찬할 시간을 더 많이 얻게 된 것이다. 
1610년 71세가 된 노인 허준이 광해군에게 바친 <동의보감> 25권은 내경 편(內景篇), 외형 편(外形篇), 잡병 편(雜病篇), 탕액 편(湯液篇), 침구 편(鍼灸篇)의 5부로 구성되었다. 「내경 편」에는 양생론을 바탕으로 한 내과 질병, 「외형 편」에는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비뇨기과 등 외부에 생기는 질병, 「잡병 편」에는 진찰법과 병의 원인, 그 밖의 내과적 질병들과 구급,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 등에 대한 처방들을 소개하였다. 「탕액 편」에서는 당시 조선에서 쓰던 약물 1천여 종에 대한 효능, 적용 증세, 산지 등을 소개했는데, 약명 밑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도 적어, 전문가가 아니라도 활용하기 편하게 하였다. 「침구 편」에는 침을 놓는 데 필요한 경혈(經穴)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고, 침과 뜸을 놓는 방법과 적용 증상을 설명하였다. 
허준은 질병의 원인을 몸 바깥에서 찾지 않고 몸 안에서 찾았다. 그랬기에 이전 의서들과 달리 앞부분에 몸에 관한 설명이 나오고 뒷부분에 치료법을 설명했다. 몸의 구조나 질병에 걸리는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나서 처방이나 침 뜸의 치료법은 나중에 소개하였다. 질병을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 것이다. 
1610년 8월 6일에 이 책을 받아든 광해군이 감격하여,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쇄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고 명하였지만, 출판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광해군일기> 1611년 11월 21일 기사에 그 문제점이 자세히 보고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다른 책과 달리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 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하고 교열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25권의 원고를 충청, 전라, 경상도에 나누어 주어 목판에 새겨 출판하려고 했다. 한 군데서 출판하는 것보다 빠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준이 탈고한 <동의보감> 원고가 1부밖에 없어 틀린 글자를 대조할 수가 없었는데, 약 이름이나 처방에서 글자 하나만 틀려도 사람의 목숨이 달린 만큼 졸속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출판 작업은 다시 내의원에서 맡게 되었으며, 목활자로 편집하고, 의관이 교정보았다. 2년 뒤에야 출판된 활자본은 내의원과 사고(史庫)에 소장하고, 지방 감영에도 나누어 주어 목판본으로 다시 출판하게 하였다. 지방의 작은 고을까지 반포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일본과 중국까지 수출한 보편적 의서 <동의보감>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가 끊어진 일본에서는 조선의 의서를 구하려고 애썼는데, 1650년대부터 <동의보감>을 구입해 갔다. <동의보감>에서 약효가 빠른 인삼을 가장 중요한 약재로 사용하자, 일본에서 조선 인삼 수입이 확대되었다. 1722년부터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지시 때문에 조선 각지로부터 초목, 금수의 도판과 실물을 43종이나 수집하더니, 2년 뒤에 미나모토 모토미치(源元通)가 <정정동의보감(訂正東醫寶鑑)>을 출판하였다. 그 뒤부터 조선에서의 수입이 줄어들었다. 1747년에 통신사 일행이 나니와(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병이 들어 일본 의원 히구치 준소(樋口涥叟)에게 치료받았는데, 처음에 조선 사신들이 그의 의학 수준을 믿지 못하자“나도 <동의보감>을 기준으로 치료하는데 왜 의심하느냐?”고 반문하였다. 일본판 <동의보감>이 그만큼 보급되었던 것이다. 
1780년 연행사(燕行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간 연암 박지원은 북경 유리창(琉璃廠)에서 <동의보감>을 보았는데, 은화 닷 냥이 없어서 사지 못 하고 능어(凌魚)의 서문만 베껴 왔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원에서도 동(東)이라 일컫는 것이다. 옛날 이고(李杲, 금나라 의학자)가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로서 강(江)ㆍ절(淛)에 행세하였으며, 주진형(朱震亨, 원나라 의학자)이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로서 관중(關中)에 나타났더니, 이제 양평군(허준)이 비록 궁벽한 외국에 태어났으나, 능히 아름다운 책을 지어서 중국에 유행되었다. (줄임) 또 ‘보감(寶鑑)’이란 무슨 뜻일까. 햇빛이 새어 나오고 잠든 안개가 풀리듯이 살을 나누며 갈피를 쪼개어,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들추게 하면 거울처럼 광명함을 말함이다.”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 이름 붙인 뜻을 능어가 대변해준 것처럼, 허준은 자신의 저서가 금원 대가들이 남의(南醫) 북의(北醫)로 인정받은 것에 못지않다고 자부하였다. 과연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동의보감>을 구해 가고 일본 의원들도 필수서적으로 삼았다. 동의(東醫)가 동쪽 나라 의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인 의서가 되었기에, 2010년 유네스코는 <동의보감>을 우리나라의 일곱 번째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하였다.



집필자

글. 허경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자를 공동 문자로 사용하던 전근대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고 있으며, 외국 도서관에 있는 한국 고서를 조사하는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 
저서로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 고서들>(웅진북스, 2003)이 있으며, 현재 러시아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된 한국 고서 해제를 공동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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