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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국에서 민국으로


대한민국은 제헌헌법 전문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였고, 현행헌법 전문에도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힘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진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1842년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개항하게 된 상하이에는 영국·미국·프랑스의 행정권과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조계지(租界地)가 설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 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조계를 중심으로 중국의 혁명운동과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상하이를 양분하여 흐르는 황푸강(黃浦江)의 와이탄(外灘) 부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할 때 도착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에 나타난 자주독립 이념을 기반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民國)’을 표방하면서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 지도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27년간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긴 세월 동안 풍찬노숙하면서 국권회복과 항일전선을 이끌었다.




 



 

상하이시기(1919~1932),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 [ 바로가기]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정부와 의회를 갖춘 민주공화제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3·1 운동을 통하여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었다. 1919년 5월부터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아래 논의가 이루어져 노령과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동시기(1932~1940), 고난의 대장정 [ 바로가기]

1932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과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는 13년간의 상하이시기를 마감하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다시 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綦江)으로 옮겨야 하였다. 1940년 9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8년이 넘는 이동시기를 보냈다.
1930년대에 독립운동은 정당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단일정당을 결성하지는 못하였고, 우파의 연합세력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파의 연합세력인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조직된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의 군사조직이었고, 1938년 말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군사조직이었다. 이들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군사활동을 추진하였고, 개별적으로 중국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 통합 그리고 항쟁의 길 [ 바로가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 도착한 1940년은 중일전쟁에 이어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충칭시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동안 가장 강력한 조직과 체제를 갖추고 활동한 때였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전선에 적극 참여하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95년 8월 11일 복원을 완료하고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을 개관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후의 자주독립국가 재건계획을 밝혔다. 이 시기에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도 이루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별도로 활동하던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진영과 통합을 추진하여 마침내 1944년 4월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 뒤 중국 옌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과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그리고 만주·연해주의 무장 독립세력과도 연계하여 통일전선을 추진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

 


 

환국(1945~), 우리의 소원은 완전한 자주독립 [ 바로가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간 독립을 위하여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며 고대하던 해방의 날이 왔다. 임시정부는 9월 3일 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당면정책’도 밝혔다.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라는 미군정의 요구 때문에 시일을 끌다가 결국 그해 11월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두 차례로 나뉘어 환국하였다. 11월 23일에 1진이, 12월 1일에는 2진이 각각 귀국하였다. 미군정은 임시정부가 환국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19일에 거행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서 국민들은 임시정부의 개선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소련과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는 분단되었다. 같은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쳐 이를 무산시켰다. 하지만 더욱 강권해지는 냉전체제 아래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도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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