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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보는 시대별 교육

 

 

 

 

한국의 교과서-다시 새 세기를 넘어

세계 어느 나라나 어떤 민족이든지 당 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미래 세력에 거는 기대를 교육을 통해 성취하려 애쓴다. 이 교육 행위에서 주된 매체 역할을 감당하는 수단이 교과서이다. 이 때문에 교과서를 말하여 ‘교수·학습 활동에 사용되는 중심적인 수단’이라 일컫는데, 그러한 지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과서는 국가나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형식으로 출판·보급되는 교육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대체로 보편한 지식 대상과 인간 생활에서 터득하고 축적되어 온 경험 내용들을 정선해 제시한 교수·학습용의 표준 매체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 교과서로 말하면, 국가 사회의 이념을 전달하는 제도 매체로서 위력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따라서, 교수·학습 활동의 제도적 장소인 학교에서 사용되는 ‘학생용의 중심적인 교재’라는 현장적 속성이 강한 출판 매체가 교과서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인식이 교과서를 생각하는 아주 오래된, 그리고 널리 일반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어느 나라이든 자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인 국민 개안을 촉진시키는 선도적인 수단 또한 교과서임은 강조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상대적인 면에서 피식민 경험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경우, 압제자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함정 속으로 몰아넣은 매체 또한 교과서였다. 그릇된 세력들이 교과서의 위력을 거꾸로 이용한 탓이다. 


개화기의 교과서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나? 이에 대하여 한 가지로 떠오르는 화두가 있다. 그 나라 국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교과서라는 것. 이를테면, 근대화를 추구하는 민족이나 국가라면 교육을 통한 국민 개명을 지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러한 노력은 결국 교과서를 통한 지식 개안을 꾀하는 당연한 바램을 생성케 한다. 
이러한 경험은 교과서를 접해 본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정서일 터이다. 교과서는 그 나라와 그 국민의 미래 지향을 이끄는 견인차인 까닭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과서와 함께 해 온 학창 시절을 잊지 못한다. 

 

 

 


여기, 이 의미 있는 컬렉션은 그러한 인식에 기반 하여 교과서의 뒤안을 되살필 목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일본강점기의 교과서우리의 교과서가 걸어온 길을 되짚음으로써 지난 1백여 년 동안 민족 교육수단으로서의 위상을 지켜온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이 컬렉션에서 다룬 내용은 다음과 같은 시대 구분에 따라 한국의 교과서가 변천되어 온 과정을 살폈다. 
1. 개화기의 교과서: 1880년대~1910
2. 일본강점기의 교과서: 1910~1945.8.
3. 광복·정부수립기의 교과서: 1945.8.~1954.4.
이와 같이, 우선 세 시기로 나누어 그 안에서 이룩된 각각 10종의 교과서 선정을 원칙으로 삼아 해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대적인 교과서로 첫 얼굴을 보인 개화기에서 교수요목이 마련된 광복 직후와 제1차 교육과정이 공포되기 직전인 1954년 초까지 대략 70여 년간에 걸쳐 주요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변천 과정을 ‘해제’를 통하여 개관한 것이다. 

 

 

 



광복·정부수립기의 교과서이와 아울러, 위의 세 시기 및 제1차 교육과정기에서 제7차 교육과정기에 이르기까지 7개 단위시기의 교과서 변천과 관련하여 개관편을 별도로 내보였다. 이들 시기별 개관이 10편에 이른다. 즉, 제1차 교육과정기 이후는 각각 해당 구간에 나타난 교과서 편찬·발행의 경과 및 특기점 등을 요약해 개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 있어, 이 컬렉션의 전반적인 전개는 몇 가지 유의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각 해당기별 안에서 이룩된 교과서들이 방대한 종수 범위를 점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문제와 상관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해제 대상 교과서들에 대한 선정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3대별 단위 시기 안에서 편찬·발행된 해제 대상 교과서들을 어떤 방법으로 선정해야 할 것인가의 기본적인 문제를 말한다. 이는 매우 난해한 문제였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검증된 도서를 선정해야 마땅하다는 보편성을 중시하고자 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문헌 연구의 성과들에 유의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해제 대상 텍스트에 대한 선정의 요긴성과 필요성 등은 당연히 필자의 판단에 따랐음을 밝혀 둔다. 

둘째, 선정된 교과서에 대한 해제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얼개와 순서로 본문을 배열했다.
· 해당 교과서의 기본에 관한 사항(저자 및 발행 등 서지사항, 시대적 환경 및 그 도서의 성격)
· 해당 교과서의 꾸밈에 관한 사항(외적 꾸밈, 내적 꾸밈, 교육과정과의 연계성)
· 해당 교과서의 의의(그 교과서가 지닌 특성, 역사적 의의) 
이와 같이, 본문의 진술은 위와 같은 연계 체제로 전개했다. 아울러, 각각 주어진 제재의 제시가 책에 따라 가변적이긴 하나, 일단 위의 배열 원칙을 따르려 애썼다. 물론, 해제 대상 교과서의 실물을 필자가 실사하고 객관적인 검증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문헌 고증에 공력을 기울이는 등 여러 필요한 이바지함을 강구하기 위해 애썼음도 밝혀 두는 바이다. 

셋째, 분량의 문제이다. 해제란 ‘논증적인 것’과 ‘해설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이 컬렉션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아우르고자 했다. 그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은 주어진 분량을 적절히 통제하여 내용의 쏠림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분량은 매 건당 A4 3.5매(10포인트)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200자 기준 원고용지로 평균 32매 정도 된다. 이 같은 분량 안에서 ‘논증’에 관한 것은 직접 본문 안에 글줄 주로 표시하여 인용 사항을 명시했고, 글 끝에도 ‘참고문헌’을 소개하여 활용 서지를 밝혔다. 따라서, ‘해설’에 관한 것은 굳이 ‘평가’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교과서가 지닌 고유한 자리매김을 보전하려 노력했다. 

넷째, 글의 전개에 관한 문제이다. 매 건마다 소량의 분량이 주어져 있으므로 매우 절제된 서술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보니 기술적으로 좀 더 압축해야 할 필요성을 고려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도 읽기에 편한 글이 되도록 노력했음을 밝힌다. 그런 가운데 개화기와 일본강점기의 교과서들에 나타난 원문들을 굳이 오늘의 표기법으로 전환해야 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이 컬렉션은 원문을 디지털로 구축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그 텍스트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해제를 아우른 교과서 컬렉션을 구축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이바지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기획 컬렉션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마침내 거대한 교과서 도서관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나머지 시기(제1차 교육과정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교과서 정보에 관한 디지털 구축도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민소학독본2011년, 우리의 교과서 민족 개명 수단으로 첫 모습을 보였던『국민소학독본』(1895) 이후 116년을 넘기고 있다. 이미 한 세기를 뒤로 하고 다시 새로운 역사, 그 21세기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동안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영욕을 겪은 교육 수단이 우리의 교과서였다. 아마도 교과서처럼 뚜렷한 역사적 물증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주권의 있고 없음을 말해 주는 가장 명백한 물증이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하여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고, 오늘에 이룩한 발전상 또한 그 갈피들에서 목격한다. 교과서는 곧 그 시대의 청사진인 것이다. 우리의 교과서는 고난과 시련을 딛고 희망을 안내한 인도자이기도 했으며, 이를 통하여 교육받은 학생들이 나라를 일으키는 역군으로 배양되었다. 강조해 말하지 않더라도, 교과서가 그러한 임무를 감당한 대표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언어·문자 전달 수단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교과서처럼 그렇게 큰일을 해 내는 수단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집필

이종국 교수

감수

이승구 부사장

 

 

 

 

 

[카테고리별 소개]

 

 

개화기의 교과서[ 바로가기]

 

개화기 교과서에서 보는 강한 나라에의 꿈

그 나라의 상징이 말해 주는 것
한 나라의 대표적인 상징을 말한다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국기와 국가를 먼저 꼽게 된다. 국기란, 한 국가의 권위와 존엄을 표상하기 위해 그 나라의 전통과 추구하고자 하는 국민적 이상을 특정한 빛깔과 모양으로 나타낸 고유한 ‘기(旗)’를 말한다. 그것이 창공에 전신을 내보일 때 깃발로 펄럭인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깃발」)이라 했다. 국기가 물리적인 표상물로서 시각적인 상징이라면, 국가 또한 그 나라의 존엄과 명예, 이상을 담아낸 노래로 존재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을 말하게 되는데, 곧 나라꽃인 ‘국화’가 그것이다. 국화는 그 나라의 고유한 정서나 국민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나라꽃은 그 나라의 자연, 풍토, 역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화훼류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법령으로 규정했다거나 어떤 특별한 근거를 정해 놓은 바도 없는데 무궁화를 국화로 삼고 있다. 1946년에 나온『중등국어교본』(상)에서 보면「무궁화」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우리의 나라꽃은 무궁화”라 전제하고


어느 한 사람이 이 꽃으로 나라꽃을 삼자 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나라 안에는 방방곡곡에 무궁화가 피어 있어, 그 아름다움을 외국 사람까지 일컫게 되고, 우리도 또한 스스로 우리나라를 무궁화동산이라고 불러온 것입니다. 
〈조동탁, 1946, 1쪽〉

라고 했다. 우리의 애국가에서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후렴구가 있다. 일부러 배우지 않더라도 어느새 익숙한 음률로 기억되는 노래가 애국가이기도 하다. 귀에 익고 눈에 익숙한 내 나라의 상징이 우리 국가와 국기인 것이다. 
우리의 역대 도덕, 국어, 사회과 교과서들의 앞머리에는 태극기와 무궁화를 내보인 사례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학생들이 국기와 국화의 중요성을 학습하도록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교과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 교육 수단으로 기본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적 가치 교육을 중시하는 시민 교육의 측면에서도 당연히 중요한 요건이 된다. 이를테면, 소속을 상기하고(소속의 상징을 통해) 그 일원으로서의 민주적 책무에 최선을 다하며, 능력 있고 생산적인 시민이 지녀야 할 가치로서 정의, 다양성, 그리고 준법과 인권 존중, 권위 존중, 자유, 공정한 가치 신념 등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인 까닭에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지구촌 구성원으로서의 세계 시민을 지향하는 ‘그 나라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그들만이 공유하는 상징물을 통해 소통의 끈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눔과 화합의 꾀함이라는 것도 그러한 출발점을 통해 가능하게 되며, 이는 자연스러운 인식 조건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어느 민족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각각의 터전에서 내보이고자 하는 전통적인 상징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국기와 국가, 국화야말로 그 나라와 자국민의 자존적 이념을 내세우고자 하는 기나긴 서술들을 단지 하나의 표상으로 농축해 낸 가장 강력한 응집물이기도 하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태극기는 1882년 8월 9일 정부의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일본 방문길에 오를 때 태극사괘를 창안, 국기로 고안한 것이 처음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깃발’로 사용되었다. 멀리 북태평양에서 조업 중인 우리 원양 어선에도, 남극에 설치된 세종기지에도 우리의 태극기는 휘날린다. 
국기는 자국민을 하나로 묶는 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탄 우리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우러르는 태극기는 온 나라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 선수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리면 온 나라 국민들도 눈시울이 뜨겁다. 먼 나라의 경기장에서 땀 뿌리며 내닫는 우리 축구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태극 마크를 보면 마음이 찡해 온다. 그래서 태극기는 온 국민의 노스탤지어로 가슴 깊이 어려 있는가 보다. 이 때문에 국기는 그 나라 사람들을 하나이게 하는 힘의 상징으로 펄럭인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국기는 그 나라의 독립이 유지될 때만이 생명을 누린다. 국기의 수난은 곧 그 나라의 수난이기 때문이다. 국기가 내걸릴 수 없을 때, 그 나라 또한 더 이상 ‘국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국가 역시 그 나라를 표상하는 노래가 아니며, 국화에 부여된 위상도 한낱 그 땅에서 자라는 화훼 식물 중의 하나로 평가 절하될 뿐이다. 
우리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없앴던 사건을 기억한다. 그런데 교과서 편찬에서도 또 하나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교과서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일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는 1909년 애국 출판인 현채(玄采, 1886~1925)가 편집.발행한『신찬초등소학』(1909) 권 4에 실린「군함」이란 단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로부터 27년 뒤(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리의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서로 시기와 유형을 달리하면서도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데가 있다. 

대한제국 전함에 게양된 태극기 
『신찬초등소학』은 과거 대한제국 정부의 학부에서 근대적 납활자 시스템을 적용한 초기의 국어과 교과용 도서였다. 이보다 먼저 발행되었던『국민소학독본』(1895) 등 초창기 교과서들이 소멸되고 그에 뒤이어 새로 나온 도서 중의 하나가 대한국민교육회에서 편찬한『초등소학』(권 1~6, 1906)이었으며, 이 책의 이념을 이은 것이『신찬초등소학』이었다. 
 그 무렵, 그러니까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서울에 일제의 침략 지휘부인 통감부가 들어앉았다. 이로써 2차에 걸친 여러 학교령이 제정 공포되었고, 그에 따라 모든 교과용 도서들도 전면적인 신․개편 작업이 이행되었다. 
이 중에서『초등소학』의 경우도 신편 도서였는데, 이 책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불과 4년 5개월여 만에 발매 반포 금지(1910.11.16.)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 교과서에 “병대들이 나팔 불며 국기 들고 행진”(권 1, 24쪽)하는 모습을 삽화로 게재했는가 하면, 권 5의 경우 제1과를「대한제국」이라 붙여 일제 침략 세력들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병대’란 대한제국 군대이며, ‘국기’도 당연히 태극기를 가리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을지문덕과 강감찬 등 민족 영웅들에 대한 사적을 다루어 우리의 우월한 역사를 학습하도록 이끈 것도 침략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초등소학』 권 6(제4과「군함」)에 내보인 대한제국의 해군함과 거기에 드높이 내걸린 태극기의 출현이다. 
『초등소학』을 낸 대한국민교육회는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와 관련된 교과서를 편찬.발행하고, 고금의 명인 행적을 널리 알리는 출판 활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정기를 높이려 애쓴 애국 단체로 유명하다. 
 대한국민교육회는『초등소학』외에『초등지리교과서』,『신찬소박물학』,『대동역사략』등 국.한문 혼 용 체제로 된 교과서들도 발간한 바 있다. 1907년 7월에는 이준(李儁)의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가두집회를 주도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일제는 새로 제정 공포된 보통학교 교육령(1906.8.27.)에 따른다면서 교과용 도서에 대한 전면 개편을 단행한다. 그럴 때,『초등소학』은 최우선 개편 도서로 꼽혔다. 그래서 새 모습으로 둔갑시킨 것이『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학부 편찬, 대일본인쇄주식회사 인쇄, 1907~1908)이라는 긴 이름으로 탈바꿈되었다.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 권 6의 제3과로 편제된「군함」이라는 단원에서 보면 과거의『초등소학』에 실린 군함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를 걷어 내고 일장기로 바꿔 버렸다. 태극기 대신에 일장기를 살려 낸 셈이다. 
그런데 태극기가 되살아난 것은『초등소학』이 나온 지 1년 뒤에 또 다른 국어과 교과서를 통해서였다. 융희 3년(1909) 애국 출판인 백당(白堂) 현채(玄采)가 편집.발행한『신찬초등소학』 권 4의 경우가 그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신찬초등소학』은 먼저의『초등소학』에서 구현한 정신을 계승한 교과서였다. 이 책에 나타난 대한제국 해군함의 위용은 갑판 위로 솟아오른 두 개의 높다란 돛(mast)과 선미에 이르기까지 무려 6개의 태극기를 내걸고 대양을 항해하고 있다. 그것은『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에 실린 것과 동일한 군함에 내걸렸던 일장기 대신 우리의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이다. 애국 출판인 현채는 이 책을 통하여 일장기를 말살하는 교육적 응징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제 당시의 사정을 되돌아보면 민족 언론이나 뜻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두었던 핵심 과제야말로 부국강병을 하루빨리 성취하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군함 확보에 대한 욕망은 각별했다. 
 이와 같은 추구는 개화파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야심찬 포부이기도 했다. 그들은 동래와 제물포, 그리고 우리 연안 곳곳에 출몰하고 있었던 일본과 서양의 거대한 철선(鐵船)들, 우람한 대포를 드러낸 군함을 목격하면서, 나라의 뒷날을 크게 걱정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도쿄만에 미국의 거대한 군함(이른바 ‘흑선’)이 위용을 드러낸 것은 1853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 만인 1868년 일본은 이른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근대국가로 변신하며 막강한 국력을 키워 나가게 된다. 서양의 군함에 큰 자극을 받아 부국강병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수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 꿈, 그리고 그 후 1세기 
1866년 8월 어느 날, 한강 하구의 양화나루에 거대한 서양 군함이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 조정에서는 ‘이양선(異樣船)’이라 하여 그들과의 접촉을 극력 차단했고, 쇄국의 빗장을 더욱 강하게 걸어 잠그는 것으로 대응할 따름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양선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감지하고 있었다. 
우리 교과서에 내보인 태극기를 게양한 군함도 그와 같은 인식에서 의미 있는 교육 과제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은 결국 뜻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의 자주 독립으로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 무렵, 군함 도입을 힘써 추진한 개화파 인물이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이라는 젊은 승려였다. 그는 어릴 적에 서울의 봉원사에서 자랐으며, 일찍이 한강 하구에 나타난 프랑스 군함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개화사상에 눈떴다고 한다. 이동인은 동래의 범어사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계속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으로 밀항(1879)을 단행한다. 그런 후 교토와 도쿄 등지에서 현지 정치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갖곤 했는데, 이는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1881년 2월,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되어 일본 시찰단인 신사유람단 파견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에서 특히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와 같은 시대적 개안에 눈뜬 유능한 젊은이를 유학생으로 뽑아 일본에 보낸 것도 그가 개입한 일이라 알려져 있다. 
그해 3월, 이동인은 왕명을 받아 동료 참모관인 이원회(李元會)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군함 구입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었으나 출발 직전에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로부터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 수구파 세력들로부터 암살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로써 개화 선각자로서 이동인의 임무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의 바다에서 파도를 가르며 내달릴 ‘꿈의 해군함’도 수평선 저쪽 미망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꿈의 군함은 그날의 교과서 속에서 여전히 힘차게 발진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라진 전함은 비록 적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 교과서 속에서 1세기나 넘도록 항해를 계속하고 있으니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군함은 전쟁을 위해 투입되는 ‘바다의 무기’ 그 자체이지만, 평화를 수호하는 보루로서 늘 든든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것이 독립을 지켜 나가는 그 나라의 국기를 높이 내걸고 대양을 누빌 때 그러한 임무는 더욱 빛난다. 
‘태극기의 군함’을 최초로 내보인『초등소학』에서는 

우리나라는, 3면은 바다가 있고 한 면은 육지인즉 군함을 많이 건설함이 마땅하니라. 
〈대한국민교육회, 1906, 5~6쪽. 현대어 표기: 필자〉 

라고 강조한다. 즉,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고 한 면이 육지이므로 군함을 많이 만들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장기를 내걸었던『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에서는 군함의 전투적 성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침략 세력의 망령이 꿈틀대고 있음을 본다. 일본의 해군력을 선전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해군함이 등장한『신찬초등소학』 권 4에서는 군함을 일컬어 ‘해상성’(海上城, 바다 위에 떠 있는 성새)이라 했다. 그러면서 옛적 군함 천백 척이라도 오늘의 군함 한 척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며, 그 가격 역시 ‘천배의 백배’나 될 정도로 거액이라 씌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학생들에게 자주 독립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큰 소리로 묻고 있음이 분명하다. 
민족 수난기에 일장기를 끌어내고 태극기를 되살린 사건은 역사의 한 중요한 발자취로 남아 있다. 오늘의 우리가 생존경쟁이 치열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그러한 아픈 시련을 딛고 힘써 노력한 결과임은 강조해 말할 나위도 없다. 
〈출전: 이 글은 다음 자료에서 줄여 인용함. 이종국,「일장기를 말소하고 태극기를 내 건 교과서」,《편수의 뒤안길》(제10집),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2011.2.〉 

참고문헌 
대한국민교육회,『초등소학.권 6』, 대한국민교육회, 1906.
이광린,「개화승 이동인」,『개화당 연구』, 일조각, 1973.
이광린,「개화승 이동인에 관한 새 사료」,『한국 개화사의 제 문제』, 일조각, 1986.
이길용,「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울분의 충격―소위 일장기 말살 사건」,『신문기자 수첩』, 모던출판사, 1948.
조동탁,「무궁화」, 문교부 저작,『중등국어교본』(상), 조선교학도서주식회사, 1946.
조선총독부 저작,『조선어독본.권 1』,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191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2260068

 

 

일제강점기의 교과서[ 바로가기]

일본강점기의 교과서―식민 수단을 매개로 한 우민화 겨냥

국권 피탈, 그리고 교육을 통한 식민 사상 주입
‘일본강점기’란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민족 수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35년간에 걸쳐 편찬.보급한 각급학교의 교재를 말하는데, 탈 주권 교육 수단으로 역사의 뒤안에 남아 있다. 
당시의 교과서는 외형상으로 볼 때, 과거 구한말의 그것보다는 지질이나 장정 면에서 향상된 모습을 갖추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식민 이념을 담은 도구로 변색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침략자들이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책략을 교과서 속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압박하여 소위 을사조약으로 올가미를 씌워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시련을 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식민화 전략의 족쇄였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노골적인 간섭을 일삼았으며, 군대마저 해산하는 등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아 마침내 대한제국의 국권마저 강탈해 버렸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의 군인 출신 정치가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조선통감으로 부임케 함으로써 본격적인 국권 침탈 공작을 전개하게 된다. 
데라우치는 1910년 10월 초대 조선통독으로 임명되어 이 땅에서의 식민 정책을 지휘하게 된다. 이로부터 일제에 의한 핍박의 세월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식민 세력이 특별히 중요시하고자 한 것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 문제를 저들의 뜻대로 추진하기 위해 이른바 ‘황국신민’ 사상을 제일주의로 내걸어 세뇌와 핍박의 양면 정책을 펴나갔다. 또 그러한 테두리 안에서 ‘국체명징’(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을 내세웠고, 거기에 덧입혀 ‘내선일체’니, ‘인고단련’이니 하는 슬로건을 우리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 애썼다. 
 이 같은 내세움이 식민화 사상의 골자였으며,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골간이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식민 사상을 담아낸 직접적인 수단이 교과서였고, 이로써 ‘조선적인 일체의 사상이나 태도’를 허물어 버리고자 했다*(이종국, 2008, 88쪽). 
 일제 당국의 한민족 붕괴를 목표로 한 교육 정책은 1940년에 창씨개명을 단행하면서 더욱 깊숙한 수렁 속으로 몰아갔다. 일제는 1939년 11월 이른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시키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그 대신에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같은 해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제출할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후속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제에게는 각급학교의 입학을 불허했고, 그 호주는 ‘불령한 조선인’(不逞鮮人)이라 하여 우선 징용 차출 대상으로 삼거나 각종 배급 대상에서도 제외시키는 등 온갖 사회적 제재를 들씌웠다*(* 이종국, 2008, 88쪽). 이 무렵, 일제는 1면 1신사(神社) 참배를 강요하고, 매달 6일을 이른바 ‘애국의 날’로 정하여 일본기 게양,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부르기, 조서 읽기,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을 강행했다*(김삼웅, 1998, 212쪽). 이 같은 강제된 의식은 일선 학교와 관공서 등에서 어김없이 이행되었다. 그러던 과정에서 그들이 마침내 진주만을 기습 공격(1941. 12.8.)하는 것을 핑계삼아 이른바 ‘시대의 진운’이라는 조작적 사관을 불어넣고자 했다. 
 이렇듯, 일제의 교육 정책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 목표를 이른바 ‘황국(皇國)의 도에 따른 국민 연성’에 두었으며, ‘충량한 황국 신민’으로 한국인 개조의 기본 틀을 고착시키려 했다*(* 함종규, 1974, 159쪽). 이는 그들이 한국 점령을 음모한 19세기 후반부터 끊임없이 추구해 온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 속에 채워져 있던 골간이었다. 
 그러므로 교과서를 통해서도 탈 한국인 전략을 집요하게 주입해 나갔다. 이 같은 책략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기 발전을 차단시켜 ‘숙명적인 영합’을 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명적인 영합이란, 우선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하여 일본인으로 종속, 동화하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그러한 내용이 일제가 편찬한 교과서들에서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자기 부정으로 몰아간 교과서 
일제 침락 세력들은 한국인을 능멸하는 대안으로 몇 가지 조작적인 열등의식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예를 들면, 그들은 우리 민족을 주체성이 없고 퇴영적이며, 독창성이 없고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당파성이 강하며, 내적 발전이 없는 민족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손인수, 1986, 25∼26쪽). 
그래서 일제 당국은 교과서를 가장 요긴한 식민 침탈 수단으로 지목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적인 것’에 대한 유린을 겨냥함으로써 전면적인 탈색으로 몰아간다는 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자 했다. 교과서 내용 중에는 그러한 음모가 무수히 드러나는데 아래와 같은 것도 있다. 

흰옷을 입는 것은 우리 조선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올시다. 이것은 조선에서 염색하는 방법이 충분히 보급되지 못하였던 관계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그러하였겠지마는……힌 옷 입는 것을 과연 좋은 습관이라 하겠습니까. ……흰 옷을 없애고, 무색옷을 입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급무인 줄로 생각합니다.* 
〈* 조선총독부, 1934, 90~96쪽, 현대어 표기: 필자〉 

위의 글은 어느 보통학교에서 열린 ‘생활 개선 강연회’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강조해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들은 백의민족의 고유한 풍습마저 부정하도록 하는 퇴영 심리를 조장한 것이다. 일제에 의한 그와 같은 자기 부정 획책은 모든 교육 내용에 표면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과서를 통해서는 끊임없이 ‘일본적인 것’을 동원하여 우리 것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힘과 능력이 월등하다는 점을 주입시키려 애썼다. 이러한 전략은 결국 ‘시대의 진운’에 따라 일본(인)으로 동화되어야 마땅하다는 목표를 밑자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식민 당국자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교과용 도서에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자기 부정’ 과정을 반영함으로써 체념과 자포자기를 앞당기려 했다. 

①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민족혼을 상실하게 하고, 
② 조상의 무력함과 악행을 들추어 조선인 후손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를 경멸하는 감정을 일으키도록 하며, 
③ 그 결과,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다. 
〈서희건, 1986, 15쪽〉 

이와 같이, 일제는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를 통해 순종과 자기 경멸, 일본주의에의 흠모를 조장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들이 누려온 뿌리의 내력에 귀일시키려 근원을 왜곡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우리의 민족혼을 파멸, 부정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한 구체적인 술책으로 나타난 것이 ‘순종의 마음가짐’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일제 당국에 의해 펴낸 교과서들에서 끊임없이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심을 전제로 하여 ‘덕성의 함양’이라든지 ‘덕성에 자(資)’한다는 등의 교수.학습 방침이 나오는 것도 위장된 술책일 따름이었다. 다시 말해서, 저항하지 않는 ‘식민지 백성’으로 기른다는 목표를 그런 방식으로 덧입혀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첫 단계부터 차단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들 안에서 영원히 종속적인 처지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것은 곧 교과서를 통한 ‘우매 한국인’에의 겨냥으로 나타났으며, 그렇게 되기 위한 체념 종용을 의미했다. 이 중의 한 사례를 1937년 신학기에 보급된『조선어독본』(권 1)*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초판: 1930.3., 저작 겸 발행자: 조선총독부, 인쇄소: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이 책은 초등 교육과정 중 첫 단계인 1학년용 교과서이다. 사물에 대한 기초적인 인지 학습이 안내되어야 할 이 책에 기묘한 내용이 실려 있음을 본다. 
 그것은 책머리 단원(제1과, 제2과)에 실린 이해할 수 없는 작위성에 관한 내용이다. 즉, 제1과의 주제가「소」이고, 제2과는「소나무와 버드나무」라는 단원 이름으로 실려 있다. 여기서, ‘소’는 ‘식민지 사람’을 빗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소’가 뜻하는 ‘순종’의 의미를 학습 내용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하필이면, 수많은 학습 대상이 있음에도, 문자를 처음 익히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왜 ‘소’를(‘ㄱ’이나 ‘ㅏ’로 자소가 조직된 글자가 아닌) 제시했는가? 
그들에게 있어, ‘소’란 주인에게 순종하는 비유적 대상일 뿐이며, 인간 생활에 필요로 하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소나무’(제2과「소나무와 버드나무」)의 경우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소나무란 꿋꿋한 기상과 지조, 절개의 상징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소나무는 비정형(非定形)의 모습으로 드러나, 당초부터 인지 부조화를 꾀한 의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종국, 1991, 275쪽). 
 따라서 소나무와 대칭으로 제시해 놓은 사물(학습 대상)이 ‘버드나무’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두 종류의 학습 소재가 의미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변태적인 학습 대상은 결국 한국인으로서의 가치 신념에 변신적 위상을 주입*하도록 적극 유도한 것으로 요약된다(* 교사가 그 의미를 납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라는 뜻). 
이렇듯, 일제는 바람결에 잘 휘는 버드나무의 생리를 지조와 절개의 표상인 소나무와 비교함으로써, 기초 학습 단계인 초등 교육과정을 통한 탈색 작업을 치밀하게 밀어 나갔다. 이에 따라 창의성을 흐리게 했고, 일상생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식생활까지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경멸적인 우화를 서슴없이 내보였고, 체념과 무미건조한 정서를 조장하는 등 여러 유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종국, 2008, 92쪽). 

출판 형식에 나타난 특징들 
일본강점기에 사용된 교과서는 선장본(線裝本) 등 전통적인 판본 형식이 점차 소멸되면서,『습자』(서예)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에 국판(5.7판)이 주된 판형으로 적용되었다*(*이하의 내용은; 이종국, 2008, 92~93쪽에서 일부 인용함.). 용지 형편도 나아져 갱지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러한 개선은 일본의 조지국(造紙局) 종이를 교과서 제작에 조달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공급된 초·중등 교과서들은 초기에는 조선총독부관방인쇄국(소), 그리고 그 후신으로 설립(1923)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주로 찍어 냈다. 또 근택인쇄소(近擇印刷所), 대해당인쇄소(大海堂印刷所), 조선단식인쇄사(朝鮮單式印刷社) 등에서도 총독부 편찬의 교과용 도서들을 더러 인쇄했다. 이와 함께 도쿄의 대일본도서주식회사, 돗판인쇄주식회사, 삼성당서점 등에서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가 생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설립 이후로 조선총독부 저작.발행 교과서의 일원화 생산이 이 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이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각종 문서들과 교과서 공급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한반도에서 최초로 사진 제판 시설 및 오프셋 인쇄기를 들여놓았을 정도로 시설이 대규모였고 또한 정예화 되어 있었다. 
일제 당국이 교과서 생산 공급을 목적으로 서울에 거대 규모의 전용 회사를 들어앉힌 것은 이 땅에서의 식민 작업을 앞당기려 한 데 있었다. 물론, 만주나 중국 내륙으로 인쇄물을 운송하는 데도 입지 조건이 좋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서울역 부근인 만리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출판 형식의 주된 특징을 보면, 식민 이념을 담은 교육과정에 따라 그 내용 체제 적용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조판 형식의 정연성을 꾀하여 대체로 200쪽 내외의 통제 기법이 반영된 것도 특기점이라 하겠다. 따라서 학교.학년 수준에 걸맞은 활자 크기를 안배했으며, 삽화를 넣어 일본인상의 구체적인 표상화 작업에 주력했다. 
 색도 인쇄의 경우는 흑백이 주종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컬러를 적용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일본강점기 말기에는 태평양 전쟁의 극심한 와중으로 휩쓸리게 되면서 지질의 저하가 계속되는 등 전반적인 부실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교과용 도서에 소요되는 물자(용지 등)들도 군납에 최우선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제본 형식을 보면 책등〔背面〕에 철사매기를 한 다음 배접지(종이 또는 천)로 마무리하는 호부장(풀매기) 형식이 주종이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다른 출판물들에도 적용한 일반적인 기법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외적 체제의 광범한 적용과 더불어, 내적 체제 면에서 보면 한국어 표기의 소멸(1938)로 치닫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교과서에서의 한국어 표기가 소멸되자, ‘일본적인 것’에로의 체제 통일로 일습화되었다. 그 중에도 일련의 수신과(도덕 교과목)와 공민 등 사회과(역사.지리 포함) 교과목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특히, 내용의 전개를 보면 일왕을 정점으로 한 제국주의에의 이념 무장을 강조하고 있음이 뚜렷한 특징이다. 그러한 체제는 모든 학교의 전 교과목을 지배한 일관된 형식으로 고수되었다. 
 일본강점기의 교과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교과서의 시련은 곧 그 나라와 그 민족의 시련이라는 오래된 인식을 다시금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종국) 

○ 참고문헌 
김삼웅,『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사람과 사람, 1998.
손인수,『민족과 교육』, 배영사, 1986.
서희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고려원, 1986.
이종국,『한국의 교과서』,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1.
정재철,『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 일지사, 1985.
조선총독부,『보통학교 조선어독본』(권 5), 조선총독부, 1991.
함종규,『교육과정 연혁조사』,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74. 

 

 

광복, 정부수립기의 교과서[ 바로가기]

 

광복.정부 수립기의 교과서―우리말 교재의 부활과 터다지기

광복 직후의 교과서 환경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8월 23일이었다. 그날, 태평양 지역 미군 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 산하 미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다. 군단장인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재조선 미 육군사령관으로서 서울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남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9월 11일, 하지 사령부는 ‘재한국 미 합중국 군사정부(United State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로 정식 명칭을 정하고, 진주군의 기능을 군정 체제로 발족시켰다. 이날, 하지 사령관은 군정청 진용 중 로카드(Lockard, Earl N.) 대위를 학무국장으로 임명하여 38선 이남에서의 교육 행정을 맡게 했다. 이로부터 교육과 관련된 여러 현안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하의 내용은; 이종국, 2008, 106~123쪽에서 일부 인용함.).

미 군정기의 미 군정청에 의해 추진된 한국 교육을 말하여 ‘문화적 제국주의와의 상관성’으로 보는 시각*1)과 ‘민족.민주 교육의 내세움’2)등 여러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준상, 1989, 541~543쪽. 2)홍웅선, 1991, 215~227쪽〕. 요컨대, 미국이 미군을 통하여 실행한 교육 통치는 기존의 지배 세력이 또 하나의 지배 세력으로 교체된 시대사적 변환이었다. 그러한 이 시기는 3년간에 걸쳐 여러 제도를 정비하는 등 막중한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의 현대 교육사와 교과서 변천사에 굵은 선으로 남아 있다. 
 학무 행정이 시작되면서, 먼저 손대야 할 시급 사안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을 성안하는 일이었다. 즉, ‘교수요목’의 작성을 말한다. 미 군정 당국이 교육에 관한 방침을 최초로 발표한 것은 1945년 9월 17일(일반명령 제4호,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이었다. 교수요목기의 첫 출발이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각 도에 포고한 이 문건은 전국의 공립소학교를 9월 24일에, 중등학교는 10월 1일부터 개학할 것을 전하고, 그에 따른 ‘교훈 용어’와 ‘과정’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9월 29일 법령 제6호 공포로 이어졌다. 그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4조 교훈의 용어 
조선 학교에서의 교훈 용어는 조선어로 함. 조선어로 상당한 교훈 재료를 활용할 때까지 외국어를 사용함도 무방함. 
제5조 과정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과목은 교수하거나 실습하지 아니할 사. 

위의 내용은, 교수요목(교과서 사용을 포함하여)과 관련된 포괄적인 지시로 되어 있지만, 한국에서의 교육 활동이 열리게 된 대단히 중요한 정책 단서였다. 
군정법령 제4호 및 제6호는 학교(공립소학교 및 사립학교) 개학에 따른 수업 재개, 학령 아동의 등록, 인종 및 종교적 차별 철폐, 교훈 용어(교수 용어) 및 교과서 사용 문제, 그리고 국익에 반하는 수업의 금지 등에 관한 응급조치가 골자였다. 
 군정청 학무국은 10월 21일 학무통첩 제352호로 ‘학교의 설명과 지시’를 공포했는데, 이에서도 앞서 지시(군정법령 제6호)한 응급조치의 취지를 구체적으로 보완, 설명했다. 이 중에서 제도에 관한 전면적인 개편은 후일로 미룰 것임을 밝히고 당분간 기존 제도에 따른다고 하여, 임시변통으로서의 상황적 적용이 요청된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런 가운데 교과목 및 그 내용도 ‘일본어’를 ‘한국어’로 고치고, 역사 교과의 경우 일본사에서 한국사 중심으로 고치는 등 최소한의 수정에 그친 형편이었다. 따라서 교과서 편찬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므로, 우선 “어떤 교과는 교과서 없이 그리고 다른 교과는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교사용으로 사용할 것”등에 관해서도 지시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군정 초기의 교수요목은 그 교과 교육에 있어, 경우에 따라 일본강점기에 사용하던 것을 답습 또는 묵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수신’이 ‘공민’으로, ‘국어(일본어)’가 한국어의 ‘국어’로, ‘도화’를 ‘도화 공작’으로, ‘직업’이 ‘실과’로 대체되는 등 명칭의 전환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말 교과서의 실현 
8.15광복 직후에 당면한 문교 현안 중에서, 교과서 편찬이 시급했다는 사실은 새 교육 수단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더하여, 국어 소생과 민족 교육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의의와 직결된다. 
광복과 더불어 가장 먼저 편찬.발행된 국어과 교과용 도서는『한글 첫 걸음』(1945.11.6.)이었다*(* 이하의 내용은; 이종국, 2008, 123~124쪽에서 일부 인용함.). 이보다 약 2개월이 채 안 되어『초등국어교본(상)』(1945.12.30.)이 나왔고, 해를 넘겨 중권(1946.4.15.) 및 하권(1946.5.5.)도 나왔으며, 또『중등국어교본』상.하권(1946.9.1.)과 중권(1947.1.10.)으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모두 조선어학회(오늘의 한글학회)가 저작하고 군정청 학무국에서 발행했다. 그런 가운데 광복 이후 최초의 국사 교과서도 이룩되었다. 이 책이 바로 진단학회가 편찬한『국사교본』(1946.5.26.)이다. 
이 교과서들은 모두 임시 교재로 편찬.발행되었다. 이후 1948년 6월 현재로 초.중등학교용 교과서는 임시 교재 15책을 포함하여 16종 54책으로 불어났다. 
국어과 관련 교과서들은 조선어학회에 의해 편찬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 일은 1942년 10월 이 학회가 일제 당국으로부터 사실상 파멸당한* 이후로 착수한 첫 과업이어서 그 의의가 사뭇 컸다(* 1942년 10월 1일, 최현배 등 회원 11명이 “민족주의자의 단체로서 독립 운동을 비밀히 한다.”는 등의 죄목으로 구속당함.). 이 학회는 한국어의 부활을 교과서로써 실현한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미 군정청에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김민수, 1973, 384쪽). 
조선어학회가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결의한 것은 1945년 8월 25일 임시 총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미 군정청으로부터 국어 교과서 편찬을 위촉받은 데 따른 사후 추진 과제를 협의한 결과,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켜 그 임무를 전담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집필: 이희승 등 9인, 심사: 방종현 등 5인, 위원: 이극로 등 7인 하여 총 21인으로 조직함.). 이에 대한 경위는 다음의 글에서 나타난다. 

새로운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 정식으로 교과서가 나올 때까지, 임시 조처로 우리 조선어학회와 경성초등교육건설회가 협동하여, 우선 1, 2학년용『초등국어교본』과 3학년 이상에 쓰일『한글 첫 걸음』을 시급히 만들어, 9월에 학교가 개학되면 곧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 오던바, 이것을 들은 군정 학무 당국에서는 우리의 원고를 가져다가 직접 발행하여, 이것을 전국에 사용시키기로 되었다. 
〈조선어학회, 1945, 1~2쪽〉 

이로써 조선어학회 측에서 교과서 편찬 업무를 정식으로 위촉받게 된 전말이 나타나며, 이 학회는 이 일을 당연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이응호, 1992, 33쪽). 
 당시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교재를 편찬하는 데 있어 완급 순위로 볼 때 어떤 형식의 교재를 먼저 펴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가 일본어 중심이어서 정작 우리글에 대한 문맹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8.15광복 직후의 13세 이상 문맹률을 보면 그 점유율이 무려 78%에 이를 정도였다*(* 한국교육십년사간행회, 1960, 110쪽). 이 문제는 교과서의 시급한 조달을 해결해 어서 한글을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표로 압축되었다. 
결국, 그와 같은 심각한 문맹 현상은 한글을 처음부터 깨우치게 해야 할 필요성으로 받아들여졌다. 말 그대로 첫 걸음부터 한글을 습득하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으로 편찬된 교과서가『한글 첫 걸음』이었다. 이 책은 초판 보급 실적이 1백만 부를 넘겼고, 또 1년 만에 다시 1백만 부를 돌파했다. 이로 보아 교과서인 동시에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광복 직후의 교과서 출판에 반영된 특징 
 광복 직후의 교과서 사정은 우리말 교재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많은 교과서들이 새로운 얼굴로 태어나 학생들과 만나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실업계 고등학교용 ‘전문 교과’의 교과서*가 공백 상태여서 교과별 교재의 불균형이 심했다(* 농업, 공업, 상업, 수산.해양계 등의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용 도서를 말함. 이하 편의상 ‘실업계 전문 교과서’라 표기함.). 이는 과도정부 문교부가 직면하고 있었던 중대 부담이었다. 
광복 직후 교과서의 구분은 대체로 학년.학기별로 제시한 것도 있지만, 상.중.하 형식으로 분책한 형식 또한 적지 않았다. 판형은 5 .7판(국판)이 주종이었고, 4.6판도 함께 존재했다. 
용지의 경우는 마분지를 주로 사용했고, 군정청 학무국 발행의 교과서 중 일부만 미군 당국에서 조달한 모조지(백상지) 또는 갱지를 썼다. 따라서 수업 시수, 진도 등 교과 학습에 따른 충분한 지도 방침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쪽수 안배도 불규칙한 체제였다. 
활자의 경우는 자형이 다른 활자체를 한 책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예컨대『초등국어』상.중권이 같은 서체로, 그 하권은 다른 서체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침략 세력들이 한글 활자를 녹여 없앤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들은 우리 활자마저 폐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조판이 가능한 활자들을 수습하여 원고에 따라 짜맞추다보니 판면 체제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다. 
 이상과 같이, 미 군정기 및 교수 요목기 중 전반기(1945.9.~1948.8.)의 교과서 편찬.발행에 대하여 개관했다. 이에 따라 당시대의 교과서 출판에 반영된 특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말 교재의 공백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임시 교재’를 편찬.발행했다. 
둘째,『한글 첫 걸음』,『국사교본』등 일련의 임시 교재들이 막중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교과서에서 가로짜기 체제를 굳혔고, 한글 전용화 편찬이 현실화되었다. 
넷째, 다부수권 교과서들에 비하여 실업계 전문 교과서의 편찬이 막혀 있던 상태였다. 

정부 수립기의 교과서 출판에 반영된 특징 
여기서, ‘정부 수립기’란 1948년 8월 15일 우리 정부가 세워지고 이후 교수요목기가 계속되고 있었던 1954년 4월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희망에 부푼 세월을 맞이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6.25전쟁을 당하여 모든 것이 파괴, 단절, 와해되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헌법의 제정(1948.7.17.)과 교육법의 제정(1949.12.31.), 그리고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의 구현(교육법 제2조) 등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건국 기반을 힘써 다진 가장 큰 성과였다. 그런 가운데 교과서 관련 각종 법령들도 속속 공포를 보았다. 즉 ‘국정 교과용도서 편찬규정’(1949.4.29.), ‘교과용도서 검인정규정’(1950.4.29.), ‘국정 교과용도서 편찬심의회규정’(1950.6.2.)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그런가 하면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교과서 사용에 관한 문교부 통첩」(1949.7.11.)을 발표하여 국.검인정 교과서 제도를 새롭게 펴 나가려던 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교육 및 교과서 행정은 전시 체제로 급선회하고 말았다. 
정부 수립기 교과서들 중에서 특기해 둘 일은『바둑이와 철수〔국어 1-1〕』(1948.10.)의 편찬.발행이다.『한글 첫 걸음』,『초등국어교본』등이 ‘자모법(ㄱㄴ식) 교과서’였다면, 이 책은 본문의 내용을 처음부터 문장으로 꾸민 ‘문장법(문장식) 교과서’로 편찬되었다. 이 책은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에 의해 이룩된 최초의 국어과 교과서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전시 교재의 발행이다. 이 교재는 전시 생활을 지도할 목적으로 1951년 3월 임시 수도 부산에서 문교부가 낸 것으로 초등학교용『전시 생활』1(1, 2학년용), 2(3, 4학년용), 3(5, 6학년용) 이렇게 3집 9책, 또 중등학교용 전시 독본인『침략자는 누구냐?』등 3집 3책으로 되어 있다. 
 새삼스러운 되살핌이지만, 교과서 이름이『탱크』,『군함』등의 전쟁 수단으로 매겨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이 교재는 표지와 본문을 합하여 64쪽으로 인쇄한 체제였다. 용지난이 극심하여 전지 한 장을 접어서 4.6판 절수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 수립기에는 실업계 전문 교과서를 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테면, 많은 교과목 수에 비하여 적절한 필자 자원이 태부족 상태였다. 그 발행사 또한 전무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 당시 김기오(金琪午, 문화당 대표)가 전문 교과서를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이로써 대한교과서주식회사가 설립(1948.9.)되었으며, 이후 이 회사를 통하여 많은 실업계 전문 교과서 등을 발행하게 된다. 
정부 수립기의 교과서 편찬 활동에 나타난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정부 수립기의 교과서 문제는 그 초기 과정에서 6.25전쟁을 만나 일시에 정지당했으므로, 적어도 5년간의 후퇴를 가져왔으며, 그 여파로 10년의 뒤쳐짐을 결과했다. 왜냐하면, 1958년에 이르러 교과서의 전면적인 신.개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시국이 전시 체제였음에도 학교를 열어 수업을 계속함으로써 높은 교육열을 유지했다. 그러한 교육 열기로 하여, 우리 교과서사에서 최초의 사례인 ‘전시 교재’도 생산 공급할 수 있었다. 
셋째, 실업 전문 교육과 그에 따른 교과서 편찬에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오늘의 실정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동인(기술.경제 개발)으로 뒷받침되었다. 
한편, 전쟁을 겪은 뒤로 국가 주도형 교과서 편찬.발행 제도가 더욱 강하게 굳혀 갔고, 그러한 과정에서 뿌리 깊은 쟁점들을 파생시켰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을 말한다. 
 이제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내용들이 교육과정.교과서에 활발히 반영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현상은 발전적이며, 민족 통일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종국) 

○ 참고문헌 
김민수,『국어 정책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이응호,「광복 후의 한글강습과 국어교재 편찬」,『광복 후의 국어교육』, 1992.
이종국,『한국의 교과서 변천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8.
조선어학회 지음,『초등국어교본 한글교수지침』, 군정청학무국, 1945.
한국교육십년사간행회 편,『한국교육십년사』, 풍문사, 1960.
한준상,「미국의 문화침투와 한국교육」,『해방 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89.
홍웅선,『광복 후의 신교육 운동』,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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